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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80화 (80/135)

80화

-동맹을 맺으러 왔어.

피에라는 잠시 멍해졌다.

한 일족의 수장으로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생각을 항시 하고 있는 그녀였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차마 당황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바로 들은 것이 맞나, 싶어 카리나를 바라본다.

카리나는 생긋 웃고 있었다. 아포칼리타가 웃고 있다, 는 것 역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지만 어찌 됐든 피에라는 간신히 이성을 되찾았다.

“농담을 하는 것은 아닐 거라 믿소.”

“이런 거창한 농담을 할 생각은 없어.”

카리나는 피에라에게 더 다가갔다. 한 뼘 정도의 거리가 남게 되었을 때 비로소 발을 멈춘 그녀는 팔짱을 끼며 턱을 비스듬하게 들어 올렸다.

“진심이야. 동맹을 맺겠다는 말도, 거절하면 이곳에 있는 마법사 모두를 죽이겠다는 말도.”

피에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눈앞의 아포칼리타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강자였지만, 자신 역시도 강한 인간이었다.

자신뿐이랴. 이 탑은 캄바이트 마법사의 본거지. 캄바이트의 최고 실력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던가.

이 모두가 죽을 각오로 덤빈다면 …….

‘이길 수 있지 않을까.’

피에라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카리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조소했다.

원작의 피에라는 항상 정공법을 고수하는 인물이었다. 속임수는 없고, 우회해 돌아가는 일도 없다. 그저 닥친 일을 처리하며 나아갈 뿐.

‘나와 싸울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이는 정답이었다. 피에라의 오른손에 초록색 빛무리가 차오르고 있지 않은가.

카리나는 그녀와 한 걸음 거리를 벌렸다. 카리나 역시 힘을 모은다. 언제 피에라가 달려들어도 방어할 수 있을 정도로.

금세라도 폭발할 것처럼 조마조마한 순간이 이어졌다.

이때였다.

“카리나!”

르네거의 외침이 들려왔다. 동시에 새까만 검이 카리나와 피에라 사이로 밀려들어 왔다.

허억, 헉.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묻어 있었다. 아무래도 계단을 뛰어 올라온 듯싶었다.

“뛰어 왔니?”

카리나는 그의 턱 끝에 묻은 땀방울을 닦아 주며 말했다.

“예. 누가 던져 두고 갔지만 누구 곁에 있어야 해서요.”

“비꼬는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르네거는 피식 웃으며 카리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당황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피에라를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오랜만입니다. 피에라 님.”

그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르네거의 탄생부터 지켜본 이가 바로 피에라였다.

그렇기에 피에라는 더욱 황당해할 수밖에 없었다.

르네거 라템은 라템 일족 중에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신실한 이였다. 한데 ‘그’ 르네거 라템이 정말 아포칼리타와 함께 있다니.

“사실 믿지 않고 있었다만……. 소문이 진실이었나 보오.”

피에라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마른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그대까지 함께 있다면 우리에게는 승산이 없겠군.”

그녀는 움켜쥐었던 힘을 흩뜨리며 짧게 혀를 찼다.

뒤를 돌아보며 마법사들에게도 눈짓한다. 공격 태세를 중지하라는 뜻이었다.

“들어가지. 차를 내주겠소.”

피에라는 부서진 문을 힐끗 바라본 후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카리나는 싱긋 웃으며 그 걸음을 따랐다.

* * *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물이 담겨 있는 잔이 탁자 위에 올려져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쉽사리 찻잔에 손을 대지 않는다. 탁자 주변을 맴도는 기류에 바싹 굳은 긴장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피에라는 마주 앉아 있는 카리나와 르네거를 응시했다.

카리나는 턱을 괸 채 창밖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고, 르네거는 그런 그녀를 좇으며 슬쩍슬쩍 웃고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그들이 어떤 관계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르네거가 저 아포칼리타를 쫓아다니는 것이겠지. 그렇기에 신도 버리고 라템도 버리고 데이펜의 수장까지 버리고.

피에라는 사붓 눈을 찡그렸다.

‘대체 왜?’

연합군 중에, 가장 신실한 일족이 누구냐 묻는다면 모두가 입을 모아 라템이라 할 것이다.

또한 가장 맹목적인 일족이 누구냐 하면 라템이요 자기희생적인 일족이 누구냐 하면 라템이라 할 것이다.

르네거 라템은 그중에서도 특별히, 유독 더 신실한 신앙을 품고 있는 자였다.

과거를 떠올린다.

아포칼리타에게 물들은 땅을 정화하고자 할 때, 여덟 살의 르네거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팔을 검으로 갈랐다. 그리고 흘러나온 피를 땅에 흘렸다. 그 넓은 대지가 충분히 젖어들 때까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쓰러질 때까지.

그 일은 피에라에게 꽤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캄바이트 일족에게 여덟 살은 한없이 어린 아이요 보호를 받아야만 하는 나이였으니까.

하여 피에라는 생각했었다.

라템 일족은 다음 세대까지는 걱정이 없으리라.

한데 결과는 어떠한가?

그 르네거는 라템을 배신했고, 아포칼리타와 함께한다. 이유는 아포칼리타를 사랑하기 때문에.

‘신에 대한 맹목이 옮겨 간 것일 수도.’

피에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나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단 과자는 없느냐?]

카리나의 허벅지 위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던 히론의 말이었다.

피에라는 히론을 보며 다소 눈을 크게 올려 떴다.

[뭘 보느냐. 꼭 말하는 마물을 처음 보는 것처럼 구는구나.]

처음 보는 것이 맞다. 피에라는 뻐근한 입을 간신히 다물며 정신을 다 잡았다.

[흥. 얼빠진 얼굴 하고는.]

히론은 쯧 혀를 차며 비웃었다.

피에라는 울컥했지만 차마 성을 낼 수는 없었다. 히론에게서 풍겨지는 기운이 퍽 흉흉했기 때문이다.

“르네거의 가방에 릴리가 준 쿠키가 있어. 그걸 꺼내 먹으렴.”

카리나는 히론의 꼬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히론은 곧장 바닥을 기어 내려가 르네거의 가방을 뒤졌다.

“내 애완동물이야.”

[누가 네 애완동물이란 말이냐!]

“무시해도 돼.”

카리나는 피에라를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그제야 피에라는 긴장을 풀며 허탈하게 웃을 수 있었다.

확실히, 눈앞의 아포칼리타는 다른 아포칼리타들과는 다르다.

웃고, 농담을 하고, 인간과 함께 있으면서도 공격을 하지 않고…….

그래. 마치 인간처럼.

‘……!’

피에라는 스스로의 생각에 놀랐다는 듯 잠시 숨을 멈췄다. 이내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카리나를 바라본다.

“동맹을 맺자는 것이 무슨 뜻이오?”

“말 그대로지.”

카리나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어느덧 식어 버린 찻물을 한 모금 들이켠다.

탁.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눈을 들어 올려 피에라를 주시한다.

“내가 아포칼리타의 탑을 무너뜨린 건 알고 있던데.”

움찔.

피에라는 제게 닿는 시선을 거부하며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소문으로 들었소.”

“소문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르네거의 말이었다.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닌 이상 사실이라 단언할 수는 없는 것이오.”

“하지만 사실입니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은 아니고?”

“피에라 님.”

아차.

피에라는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너무 날 서게 대꾸를 한 듯싶어, 카리나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사실로 믿고 있건 아니건 간에, 그건 내게 중요한 게 아니란다.”

카리나는 입술을 둥그렇게 말아 올리며 말했다.

“내가 아포칼리타의 배신자라는 것이 중요할 뿐이지.”

배신자. 피에라의 손끝이 사붓 떨렸다.

“배신자라 하면…….”

“더 이상 아포칼리타가 아니란 뜻입니다.”

피에라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말아 쥐었다.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아포칼리타란 영원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힐끗, 르네거가 붙잡고 있는 카리나의 손을 바라본다.

카리나 아포칼리타가 아포칼리타를 배신했기에 르네거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 말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그런 경우라면 이해가 가능할 수도 있다. 피에라는 복잡한 마음을 애써 정리했다.

“르네거의 말이 맞아.”

카리나는 느긋하게, 그러나 명료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너희와 뜻을 함께하고 싶은 거야. 난 아포칼리타가 멸망하길 바라거든.”

대체 이 아포칼리타는 어디까지 나를 놀라게 할 셈인가.

피에라는 주먹 쥔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입술을 꾹 눌렀다. 가팔라진 숨을 가다듬지 못하고 토해 낸다.

“왜?”

그녀는 다소 격양된 음성으로 말했다.

“왜 아포칼리타의 멸망을 바라는 거요?”

그녀의 금색 눈동자에 번진 경악을 관찰하며, 카리나는 낮게 조소했다. 손등에 턱을 괴고 몸을 기울인다.

“글쎄.”

무어라 답해 줄까.

아포칼리타의 수장이 나의 소중한 것들을 죽여 버렸기 때문이라 할까, 복수심이라 할까, 아니면 나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할까.

아니, 아니.

때때로 사실은 사실처럼 들리지 않는 법이다.

카리나는 자신이 무어라 말하는 피에라가 믿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지겨워서?”

그녀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피에라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그대를 믿을 수 없소.”

“언제는 믿은 적이 있다고.”

“……하여 당신을 시험해 봐야겠소.”

카리나는 눈을 찡그렸다.

“귀찮은 일을 맡긴다는 걸 거창하게 말하는 것 같은데.”

“거절하는 것이오?”

“들어 보기는 할게. 말해 보렴.”

카리나의 얼굴에 다시금 인자한 미소가 번졌다. 피에라는 숨을 가다듬으며 허리를 곧게 폈다.

피에톤 캄바이트.

피에라의 본래 계획은 그를 잡아 와 숙청시키는 것이었다. 모두의 앞에서 배신자의 말로를 보여 주고 마법사들의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그렇지만 피에톤은 자신의 포위망을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마법사들은 이제 용병까지 고용해 그를 쫓겠다고는 했지만…….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피에톤은 만만찮은 실력자였으니 말이다.

하여 피에라는 피에톤의 행방을 카리나에게 맡기기로 결심했다.

카리나는 아포칼리타였으므로, 인간인 마법사보다 기감을 더 잘 느낄 것이며 피에톤을 제압할 능력도 충분하리라 판단한 까닭이다.

더불어 피에톤은 캄바이트 중에서 유독 아포칼리타를 적대했으니 그들이 붙어 전투를 벌이는 그림까지도 그려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피에톤은 죽을 테지.

하여 그걸 빌미 삼아 카리나의 동맹 요청을 거절할 수 있을 테고.

이렇게 생각을 마친 피에라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캄바이트를 탈출한 마법사가 있소.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그를 찾아 주었으면 하오. 초상화를 주겠소.”

깜빡, 깜빡.

카리나는 눈을 수차례 깜빡였다.

그러다 씨익,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의뭉스러운 구석이 다분한 미소였다.

“찾아오기만 하면 되는 거니?”

“그렇소.”

“한데 찾아왔다가 네가 말을 바꾸면?”

“그럴 일은 없소. 캄바이트는 한번 뱉은 말에 책임을 지니.”

“흐음.”

카리나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피에라를 바라보았다.

물론 피에라가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을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러해도 안전장치는 만들어 놔야 했다.

“죽음의 강에 맹세하렴.”

피에라의 눈매가 사붓 굳었다.

죽음의 강은 저승의 강. 인간계와 신계의 경계를 이루는 강이다.

이 강을 두고 하는 맹세는 결코 거역할 수 없었다. 신을 두고 하는 맹세와 다름이 없었으므로.

잠시 생각하던 피에라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의 강 앞에 맹세하겠소. 그대가 마법사를 찾아온다면 동맹을 맺겠노라고.”

“좋아.”

카리나는 발끝을 까딱이며 말했다. 어쩐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피에라는 묘한 불안감이 들었으나, 기우라 생각하며 애써 넘겼다.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기간은 얼마가 필요하오?”

으음.

카리나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녹색 눈동자의 검은 동공이 한층 또렷해졌다.

“이틀.”

그녀는 두 손가락을 펴며 말했다. 그러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천천히 창가 쪽으로 다가가, 창틀에 손을 얹는다. 최상층의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칼을 나부끼게 만들었다.

“그러면 내 말을 듣는 거다?”

말을 하는 그녀의 입술은 한껏 찢겨 올라가 있었다.

마치, 당연히 그가 어디 있는지 아는 것처럼.

피에라는 짙은 불안함을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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