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까끌까끌한 모래바람이 뺨을 스쳤다. 눈알을 헤집는 모래의 느낌에 샐러딘은 벅벅 눈을 비볐다. 빨개진 흰자가 도드라진다.
그러나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시야를 흩뜨리지 않았다. 사막의 가장 높은 지대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샐러딘은 언제나 직감이 맞는 편이었다.
다른 아포칼리타들은 그가 개의 피를 이어받았기에 본능에 충실한 것 아니냐며 낄낄 비웃었지만, 샐러딘은 스스로의 직감에 자부심이 있었다.
그렇기에 오늘도 남쪽 사막에 다다른 것이리라.
‘이곳에 사도가 있을 것이다.’
찾아야 한다. 찾아야 해.
반드시 찾아 카리나에게 데려다줘야 해.
자일이 먼저 잡아채 가기 전에.
실은, 샐러딘에게 있어 아포칼리타의 멸망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포칼리타가 멸망을 하건 부흥을 하건 샐러딘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지금도 그들과는 척을 지고 살고 있고, 자일은 자신을 귀찮게만 할 뿐 통제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그건 샐러딘 자신의 입장과 생각일 뿐이었다.
카리나는 아니다.
그녀에게 있어 아포칼리타라는 꼬리표는 지겨운 것, 끔찍한 것 그 이상의 의미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포칼리타의 멸망을 바랐다. 스스로가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그렇다면?
‘당연히 들어줘야지.’
카리나는 형제들이 죽고 난 이후부터, 무언가를 원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마치 화려하게 불탔다 소멸돼 재만 남아 있는 자리와도 같았다.
부스러기만 남아 있는 삶.
그게 바로 카리나를 정의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카리나는 완전히 달라졌다. 마치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린 것처럼, 그녀는 일전처럼 차갑거나 냉정하지 않았다.
저가 저택을 떠날 때 무어라 말해 주었던가?
-몸조심해.
평생 동안 들어 본 적이 없던 말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변한 것은 완전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리라. 목표를 향해 나아가며 배우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렇기에, 샐러딘은 카리나가 품은 열망을 완전하게 들어주고 싶었다.
‘설사 내가 죽더라도 말이야.’
샐러딘은 다소 침울한 조소를 뱉으며 생각했다.
그는 기어 다니는 개미 한 마리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에 바싹 힘을 주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 때.
“……저게 뭐야.”
멀지 않은 곳에서, 모래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갈라져 한쪽으로 나아가는 모양은 마치 지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 저거 어디서 많이 봤는데.”
샐러딘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정신을 집중했다.
갈라지는 모래 너머, 근근이 모래 밖으로 튀어나오는 날카로운 꼬리가 보였다.
아.
샐러딘은 손뼉을 치며 고개를 주억였다.
“안타레스였네.”
그는 사막의 전갈과 합쳐진 아포칼리타, 안타레스였다.
저놈이 여기 있다는 건 사도 또한 이곳에 있다는 뜻일 터.
“역시 내 직감이 맞았어.”
샐러딘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안타레스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았다.
안타레스는 한 지점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협곡 사이에 있는 작은 동굴이었다.
“와, 내가 오늘 딱 저기 가려 했었는데.”
역시 내 직감. 샐러딘은 스스로를 칭찬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곧장 아래로 뛰어내렸다.
파스스슷!
그의 발이 닿는 지면에 불꽃이 일었다. 작은 모래 알갱이가 불꽃에 얽혀 타닥거리는 소리를 냈다. 영롱한 빛이 반짝인다.
빠르게 뛰어간 샐러딘은 갈라지는 모래의 앞을 막아섰다. 그곳을 향해 새하얀 불꽃을 날린다.
콰앙!
거친 폭음이 울려 퍼졌다. 거센 폭발에 모래가 솟구쳐 시야를 가렸다. 샐러딘은 씨익 웃으며 손톱을 길게 세웠다.
“뭐야, 뭐야!”
모래를 잔뜩 먹은 것처럼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샐러딘은 그런 그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야, 오랜만이다.”
벌떡 고개를 든 안타레스는 눈앞의 샐러딘을 보며 경악했다.
“뭐야. 샐러딘?”
그는 몸에 가득 묻은 모래를 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샐러딘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너 이 새끼……! 네가 왜 여기 있어! 도망칠 땐 언제고!”
하. 샐러딘은 헛웃음을 뱉었다.
“내가 왜 여기 있겠냐?”
안타레스의 눈이 커졌다.
설마. 샐러딘도 나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이 사막에 온 것인가? 그는 주춤거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야.”
샐러딘은 그런 안타레스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찾았지?”
“뭐, 뭘 말하는 거냐? 난 모르겠는데?”
“교만? 인색? 시기? ……나태?”
사도의 능력을 쭉 읊던 샐러딘은, 이내 알겠다는 듯 크게 웃음 지었다.
“나태의 사도구나.”
더욱이 잘된 일이다. 샐러딘은 카리나가 기뻐할 것을 상상하며 양껏 입술을 찢었다.
“에이씨. 젠장.”
안타레스는 머리를 헝클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샐러딘을 바라본다.
“야. 됐어. 네가 데리고 가. 너랑 싸워 봤자 내가 질 테니까. 난 지는 싸움은 안 하는 주의라.”
본디 호전적이지 않은 안타레스는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샐러딘은 그를 얌전히 보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이대로 널 보내면 넌 자일에게 말을 할 거잖아.”
우뚝.
안타레스의 꼬리가 그대로 굳었다.
“나, 날 죽일 생각이냐? 같은 형제를?”
“그럴 리가. 난 이래 봬도 착한 놈이라고.”
“지, 진짜?”
“그럼. 죽이진 않을게.”
샐러딘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봉인만. 가볍게. 이 정도는 괜찮지?”
우웅.
그의 손끝에 새하얀 불꽃이 피어올랐다.
* * *
피에라는 마법사들을 시켜 카리나와 르네거에게 방을 안내해 주었다. 그곳에서 짐을 풀고 쉬라는 뜻이었다.
히론은 오자마자 침대에 올라가 쌕쌕 잠을 청했고, 르네거는 짐을 풀며 방 곳곳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리나는.
쉴 생각이 없었다. 쉬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아포칼리타가 접근하기 전에 빠르게 움직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또…….
‘비슷하단 말이지.’
캄바이트의 마탑은 아포칼리타의 탑과 묘하게 비슷했다.
빛이 잘 들지 않는 컴컴한 계단과 곳곳에 있는 실험실, 매달려 있는 짐승의 가죽까지.
그나마 다른 점이라 하면 커다랗고 투명한 창문뿐이라 할까.
카리나는 본능적으로 창가를 향해 다가갔다. 그래야만 숨이 트일 것 같았으므로.
탑이라는 공간은 그녀의 끔찍한 과거를 상기시키는 매개체였다.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던 곳, 도망치기 위해서 몸을 낮추고 숨어있어야만 했던 때.
시공간을 넘나드는 기억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후우.
카리나는 창틀을 붙잡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괜찮으신 겁니까?”
다가온 르네거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말했다.
훅 다가온 숨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카리나는 몸을 뒤로 젖히며 다소 거리를 벌렸다.
“왜 이렇게 붙는 거야.”
“위험하니까요.”
“무엇이?”
르네거는 창밖에 펼쳐져 있는 높은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카리나의 등을 감싸고 있는 두 날개를 바라보았다. 음. 멋쩍은 침음을 흘리며 슬쩍 손에 힘을 푼다.
“제가요. 당신과 떨어져 있으면 제 마음이 불편해져 위험합니다.”
“실없긴.”
카리나는 피식 웃으며 르네거의 가슴에 등을 기댔다. 그에게 안겨 있는 채로 머나먼 지평선을 내다본다.
“그런데…….”
르네거는 속삭이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피에톤을 찾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카리나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거꾸로 떠 있는 르네거를 바라보며 묻는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그렇지만, 피에톤은 정말…….”
그는 사붓 미간을 좁혔다.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라서요.”
카리나는 실소를 뱉었다. 역시나 실없는 말이다.
“그런 건 나도 알아.”
카리나도 그가 어떤 이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피에톤 캄바이트.
원작의 주연.
그는 여주인공인 페넬로피 데이펜의 서브 남자 주인공 중 한 명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캄바이트를 배신하고 뛰쳐나온 그는 아포칼리타와 손을 잡게 된다. 그리고 아포칼리타를 위해 싸우지만, 어느 날 페넬로피를 만나 그녀에게 푹 빠지게 된다.
그 후로는 이중 첩자로 생활하게 된다. 캄바이트의 배신자인 척 하며 아포칼리타들과 가까워지고, 그들에 대한 정보를 페넬로피에게 넘겨주고.
모든 건 페넬로피의 마음을 동하게 만들기 위해 한 일이었으나, 애석하게도 페넬로피는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끝은 어떠했더라. 그러니까,
‘들켜서 죽었던가.’
자일에게 죽은 것은 아니다. 자일은 끝까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피에톤이 첩자라는 사실을 밝혀 낸 건 분명…….
‘케투스였지.’
카리나는 짧게 혀를 찼다. 그녀와 사이가 좋지 않은 탓에, 상기하니 기분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피에톤이 캄바이트를 배신한 것까지는 원작과 다름이 없는 일이다. 이다음 수순으로 그는 아포칼리타와 손을 잡으려 하겠지.
그러니.
‘내 편으로 만든다.’
카리나는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피에톤이 합류한다면 전력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더불어 그를 이용해 캄바이트를 쥐락펴락할 수 있을 테니, 피에라의 제안은 카리나에게 퍽 이득인 것이었다.
“르네거.”
카리나는 몸을 뒤로 돌렸다. 르네거와 마주 선다.
“나는 승산이 없는 게임은 하지 않아.”
이곳에 오기 전, 히론이 했던 말이 있지 않은가.
-일전에 내가 북쪽 숲에 갔을 때가 있지 않느냐. 그때에도 꽤 이상했단 말이지. 자꾸만 시선이 느껴지고.
-지금도 같은 시선이 느껴지는구나.
그 시선의 주인공이 누구이겠는가.
“난 걔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거든.”
피에톤 캄바이트.
그밖에 없었다.
자신과 같은 배신자, 르네거 라템의 주변을 배회하고 있던 것일 터였다.
잘된 일이지. 카리나는 재차 같은 생각을 하며 고개를 까딱였다.
“금방 올 거야. 히론과 잘 있어야 해.”
촤악!
그녀는 접어 두었던 날개를 활짝 펼쳤다. 새까만 기운을 품고 있는 날개가 화려하게 펼쳐졌다.
그에 몇 걸음 뒤로 물러섰던 르네거는, 이내 다가와 카리나의 손을 붙잡았다.
“다치면 안 됩니다.”
허리를 숙여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춘다.
따뜻하게 퍼지는 체온에, 카리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르네거의 뺨을 툭 쓰다듬었다.
“얌전히 있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