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카리나가 떠난 뒤, 르네거는 어쩐지 텅 비어 버린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함께 있었다고 하나, 각자의 할 일을 위해 떨어져 있던 적도 있지 않은가.
한데 왜 이렇게도 마음 한구석이 허한 것일까.
곰곰이 생각건대 이건 그녀에게 마음을 오롯이 고백하고 난 후에 오는 후유증 같은 것이었다.
감정이라는 것은 마음속으로 꾹꾹 눌러 한 자 한 자 더듬어 보는 것보다,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더 깊이가 있다고.
소리가 되어 읊어진 감정은 보다 강화된다고.
그래서,
-사랑합니다.
그리 말을 했기에 마음에 앉아 있던 사랑이 더 커진 것이라고.
르네거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녀의 곁에 있고 싶다.
지금보다 더, 더, 더.
조금의 공허함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참…….’
중증이군.
르네거는 귀를 덮을 정도로 길어 버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읊조렸다.
이때였다.
문 바깥에서 여러 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설마.
르네거는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차고 있던 검을 바르쥔다.
“르네거 님. 수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아.
르네거는 인상을 찡그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보니 이런 작은 일에도 날이 서 반응하게 되었다.
라템에서도, 저택에서도, 이곳 캄바이트에서도.
언제까지 이런 살얼음판 위에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하는 막연한 걱정과,
카리나는 대체 이 긴장과 압박감을 어떻게 견디며 산 것일까 하는 뚜렷한 걱정이 르네거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빠른 시일 내로.’
모든 것이 끝나야 했다.
르네거는 손바닥에 맺혀 있는 맹약의 문양을 바라보며 다짐을 읊조렸다.
“나가겠습니다.”
그는 천천히 방을 빠져나갔다.
* * *
피에라가 르네거를 부른 장소는 집무실이 아니었다.
협소한 계단을 지나 낡은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르네거와 함께 간 마법사는 문고리를 잡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문을 연 순간, 이 텁텁한 탑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탁 트인 벌판이 그를 반겼다. 끝이 없는 하늘이 보이는 것으로 짐작건대 공간 마법을 시동한 듯싶었다. 르네거는 안내해 준 마법사에게 목례한 후 그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래전에.”
피에라의 목소리였다. 르네거는 느긋하게 고개를 돌렸다. 벽에 기대어 서 있는 피에라가 보였다.
“그대에게 말을 했었소. 마탑에 놀러 오면 마법사들의 공간을 보여주겠다고.”
그랬었나.
르네거는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피에라 캄바이트와는 좋은 추억이 꽤 있었다.
그녀는 냉정했으나 다정했고, 혹독했으나 관용이 있었다.
어린 르네거가 스벤에게 매질을 당할 때에 막아 줬던 유일한 어른이 바로 피에라였다.
그렇기에 지금의 르네거도 그녀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것이었다.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만, 어린아이와의 약속을 지켜 주신 점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르네거의 깍듯한 태도를 보며, 피에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양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항상 예의가 바르지.”
그녀는 벽에 기댔던 몸을 떼어 냈다.
“그래서 그대가 라템을 배신했다는 말을 믿지 않았소.”
르네거의 눈썹이 사붓 좁혀졌다. 하지만 곧 원래대로 돌아온다.
“믿고 있는 이들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겠지.”
피에라는 후후 낮은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아포칼리타를 사랑하기 때문이오?”
피에라는 못내 품고 있던 의문을 내뱉었다.
“그녀를 사랑하기에 라템을 배신한 거요?”
르네거는 그런 피에라와 눈을 마주했다. 그 눈 속에 담긴 진의는 분명했다.
“그렇게 대답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군요.”
피에라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맞는 말이다.
그녀는 르네거가 아포칼리타를 사랑했기 때문에 라템을 배신한 것이라 믿고 싶었다.
자신이 보았던 르네거는 신실한 신자였으니까. 신을 배신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피에라는 순순히 수긍했다.
“그럴 수도 있소. 그렇지 않고서야 도무지 그대를 이해할 수 없으니.”
르네거는 다소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피에라를 존경했던 것은 맞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형이다.
피에라는 피에라 캄바이트였다. 신을 모시는 가문의 수장.
아무리 캄바이트 일족이 다른 일족에 비해 맹목적 신앙이 부족하다 한들, 그녀의 얼굴에는 신에 대한 믿음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르네거는 그 얼굴이 못내 불편했다.
“저는 신에 대해 의심을 한 것입니다.”
피에라의 눈이 커졌다. 르네거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신을 따르는 인간들의 심중에 대해 의심을 한 것입니다.”
“그게…… 무슨.”
“자신의 행동을 신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라 주장하며 사욕을 챙기는 것이 아닐까. 과연 부끄러움이 없는 행동일까. 하면 그러한 인간들을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방관하는 신은 대체 무엇일까. 과연 내가 생각하던 선이 맞는가.”
르네거의 말을 경청하던 피에라의 손이 반발하듯 쥐어졌다.
그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깊게 자리 잡은 주름에 시름이 얹혔다. 분노도 함께했다.
“하여 내린 결론이 지금의 행동이오?”
“그렇습니다.”
르네거는 보다 더 단호히 대답했다. 피에라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어찌 신을 의심하고 신자를 의심할 수 있는가?
저러한 태도는 분명…….
‘아포칼리타에게 홀린 탓이다.’
그래. 르네거가 사랑에 눈이 멀어 있기 때문에 저러한 사고를 하는 것이라고.
르네거가 아무리 아니라 한들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피에라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신을 의심하는 르네거를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아포칼리타는 악이요.”
피에라는 탑을 떠난 카리나 아포칼리타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카리나가 아무리 다른 아포칼리타들과 차이점이 있다 한들 어찌 됐든 아포칼리타였다.
제 말을 듣지 않으면 모든 인간을 죽이겠노라 엄포하는 잔혹한 아포칼리타.
아포칼리타는 세계의 악이다. 이 명제는 지워지지 않는 각인이었다.
“그런 악한 존재와 함께 있으며 선과 신을 논하다니. 그대가 생각하여도 이치가 맞지 않는 것 같지 않소?”
“악과 선을 규정하는 건 인간이 아닙니다.”
르네거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피에라는 왈칵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그들이 선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선도, 악도 아닙니다.”
르네거는 차분함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신께서는 우리를 선이라 칭하지 않았고, 그들을 악이라 칭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세계에는 선과 악이 규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지요.”
피에라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얼굴에 붉은 열이 올라온 것으로 보아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인간을 멋대로 죽이고 신을 배반하는 그들이 선일 수도 있다라. 참으로 재미있는 말이오.”
그녀는 한껏 빈정거리며 르네거를 노려보았다.
“그대가 변심한 것에 대해 질타할 생각은 없다만, 적어도 이 탑에서만큼은 신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은 삼가 주길 바라오.”
“저는 대답을 한 것뿐입니다.”
르네거는 생긋 웃으며 말을 마쳤다. 그렇기에 피에라는 그에게 더 화를 낼 수 없었다.
하지만 분노는 켜켜이 마음에 쌓여 버린 터.
한참 눈을 굴리던 피에라는 이내 잊고 있던 한 가지의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의 굳었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성검은 아직 가지고 있소?”
“예.”
르네거는 허리에 차고 있는 성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피에라의 시선 역시 그를 따라 내려갔다.
“변했군.”
검의 손잡이뿐 아니라 검집까지도 새까맣게 물들어 있다. 새하였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진정한 힘을 흡수했으니까요.”
“진정한 힘이라니?”
반응을 보아하니 피에라는 성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하기야, 그렇겠지. 스벤은 라템에 비난의 화살이 쏘아질 만한 일을 절대 만들지 않으니까.
성검이 검을 쓰는 주인의 생명을 뽑아 힘을 채운다는 사실은 절대 밝히지 않았을 테다.
이야기를 해 줄까, 잠시 고민하던 르네거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구구절절한 사연 등을 이야기해 피에라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르네거는 그녀를 설득할 마음이 없었으므로.
“라템에 관한 일입니다. 자세한 것은 라템의 수장님께 여쭤보십시오.”
“그 늙은이와는 대화하지 않으니 평생 모르겠군.”
피에라는 피식 조소하며 대꾸했다. 그리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성검에 향했던 시선을 들어 올려 르네거를 바라본다.
“라템에 성검의 주인이 나타났소.”
르네거의 입가에 여린 경련이 돋았다.
성검은 내가 가지고 있다. 성검의 주인은 나였다.
하면 라템에서의 성검과 주인이라면…….
‘만들었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르네거는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과연 짐작 가는 것이 있어 불안함이 피부에 스며들었다.
“아는 것이 있소?”
아는 것.
짐작건대 그것은 인간의 생명을 그러모아 만든 검 같다고.
인간의 생명이라 하면 신자들의 생명일 테고 신관들의 생명도 들어갔겠지.
수십 명, 어쩌면 수백 명의 인간들을 집어넣어 만든 검일 수도 있다고.
목 끝까지 치달은 말이었지만, 르네거는 말을 삼켜 냈다. 말하지 않는다. 라템에 대한 거북한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다.
“설사 아는 것이 있다 한들, 이제는 제 소관이 아닙니다.”
그 검이 인간을 갈아 넣은 것이건 무엇을 갈아 넣은 것이건, 이제는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는,
“전 더 이상 라템이 아니니까요.”
라템이기를 거부했으며 신을 거부한 신자였으므로.
카리나가 아포칼리타를 부정할 때에 이런 마음이었을까.
르네거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차오른 역겨움을 흩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