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울창한 정글 한가운데.
기다란 나무와 커다란 잎사귀와 굵은 넝쿨이 가득한 곳이었기에 아주 조금의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공간이었다.
덕분에 마물들의 서식지로는 최적의 장소였다.
하지만 불어나는 마물의 수에 비해 먹잇감은 한없이 적었다. 그래서 이곳의 마물들은 한층 더 흉포한 기세를 띠고 있었다.
한 마리를 죽이려면 마법사 셋은 달려들어야 하니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쿵, 쿵.
이렇듯 괴기한 마물들은 먹잇감을 찾기 위해 정글 곳곳을 누볐다.
이런 때.
새하얀 까마귀 한 마리가 정글 위를 빙빙 맴돌았다. 새까만 눈이 반짝인다. 목적지를 찾는 듯싶었다.
끼룩, 소리를 내던 까마귀는 이내 한 곳을 향해 빠르게 하강했다.
“코버!”
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던 피에톤은 까마귀, 코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코버는 속력을 줄이며 그의 팔에 안전하게 착지했다.
“어때? 어떻게 됐어?”
코버는 재잘재잘 떠들었다. 꽤 들떠 있는 울음소리였지만, 그를 듣는 피에톤의 얼굴은 점점 굳어 가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피에톤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깊은 좌절감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아니 왜 아포칼리타가 마탑에 가는데!”
울먹거림이 섞여 있는 외침이었다.
피에톤 캄바이트는, 르네거 라템이 대신전을 빠져나왔을 때부터 그의 뒤를 쫓았다.
물론 그가 로더릭 지역까지 갔을 때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어찌 됐든 불굴의 의지로 그를 쫓아갔다.
그와 손을 잡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와 함께하고 있는 아포칼리타도 어떤 이인지 알고 싶었다.
그 아포칼리타가 자신의 소원들 들어줄 수 있는 존재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곁에서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그들을 지켜보았는데…….
갑자기 새로운 아포칼리타를 찾아가질 않나, 또 느닷없이 나타난 아포칼리타들과 전투를 하지 않나, 거기다 이번에는 와이번을 타고 마탑에까지 오다니.
“대체 뭐 하는 것들이야…….”
피에톤은 절망적인 현실에 깊이 한탄하며 몸에 힘을 풀었다. 나무에 등을 기댄다.
“아, 진짜 어쩌지.”
그의 어깨에 앉은 코버는 또다시 재잘거렸다.
“뭘 찾아가. 그랬다가 수장님께 붙잡혀서 죽으라고?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미친 짓이야.”
그는 정글 너머에 우뚝 서 있을 마탑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씨, 그냥 아포칼리타의 탑이라도 가야 하나.”
그에게는 선택지가 두 개 있었다.
아포칼리타의 배신자인 뱀의 여자와 손을 잡는 것과,
본래의 아포칼리타들에게 합류하는 것.
일단 르네거가 전자를 선택했기 때문에 그쪽에 마음이 더 기울었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는 건가.”
쯧.
그는 혀를 차며 머리를 헝클었다.
높게 묶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긴 했지만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그저 짜증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강구해 볼 뿐.
-꾸웨엑!
이때, 마물의 울음소리가 바로 아래에서 들려왔다.
피에톤은 몸을 기울여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피에톤의 냄새를 맡고 온 마물들 수 마리가 있었다.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잔뜩 굶주린 듯했다.
마물들을 내려다보는 피에톤의 입가에 번듯한 비소가 번졌다.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반짝였다.
“잘됐다. 가뜩이나 기분도 안 좋았는데.”
그는 쥐새끼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생명옹호론자였으나,
“죽어, 그냥.”
마물과 같은, 그러니까 아포칼리타와 같은 ‘이종족’은 생명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번쩍!
콰과광!
고위 마법, 라이트닝 레인이 마물 무리를 덮쳤다.
수십 개의 번개는 정확히 내리꽂혔고, 마물들은 이렇다 할 공격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 버렸다.
비린 피 냄새가 지천에 퍼졌다. 하지만 내리친 번개의 불꽃이 강했으므로 다른 마물들은 접근하지 못했다.
“으으으음.”
피에톤은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 지압하며 미간을 좁혔다.
“부족한데.”
더 죽이러 갈까.
그의 금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렇게 그가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마물 수백 마리를 죽여도 속은 풀리지 않을걸.”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에 꽂히듯 들어오는 음성에, 피에톤은 서둘러 고개를 들어 올렸다.
울창한 숲. 길쭉하게 뻗어 있는 가지. 그곳에,
“안녕?”
카리나 아포칼리타가 앉아 있었다.
* * *
헉, 헉.
페넬로피는 헐떡이며 성전을 가로질렀다. 인사를 건네는 정령사들이 있었으나 페넬로피는 그들을 반겨 줄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발 빠르게 뛰어갔다.
성전의 가장 중앙, 생명의 샘이 샘솟고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아힌!”
샘에서 물을 긷고 있던 아힌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제게로 달려오는 페넬로피를 바라보며 인자한 미소를 짓는다.
“왜 이렇게 뛰어온 거야. 그러다 넘어지면 어떡하려고.”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페넬로피는 크게 소리쳤다.
그에 샘 주변에 있던 이들 모두가 깜짝 놀랐지만,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저 눈앞의 아힌만을 붙잡을 뿐.
르네거가 라템을 떠난 후, 페넬로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했다.
차분했던 행동은 조급해졌고, 부드러웠던 음성은 날카로워졌으며 자애로웠던 눈빛은 사나워졌다.
그에 정령사들은 데이펜의 격이 떨어진 것 같다며 수군거렸지만 아힌은 이런 페넬로피의 모습을 좋아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더’ 좋아했다.
이성을 잃고 날뛰는 모습이, 분별을 하지 못해 자신에게 의지하는 모습이, 저에게 모든 것을 기대는 모습이 지극히도 사랑스러웠으며 또한 만족스러웠다.
아힌은 페넬로피의 뺨에 묻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며 부드러운 눈웃음을 비췄다.
“무슨 일인데?”
“캄바이트에서 전령이 왔어.”
“캄바이트?”
캄바이트 일족은 꽤 폐쇄적인 민족이었기에, 그들이 먼저 연락을 해 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한데 이렇게 갑자기? 아힌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말을 하는데?”
후우.
페넬로피는 가팔랐던 숨을 천천히 몰아쉬었다.
“캄바이트의 마탑에, 아포칼리타가와 있대.”
그녀의 얼굴에 홧홧한 분노가 올라왔다.
“카리나 아포칼리타가.”
* * *
카리나 아포칼리타.
피에톤은 항상 기척을 숨기고 멀찍이서 그들을 지켜보았기에, 뱀의 여자를 이렇게 가까이서 볼 기회가 없었다.
그렇기에.
‘미쳤나 봐.’
그는 빠르게 뛰는 심장을 채 갈무리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밤을 닮은 새까만 머리칼은 마치 별빛을 품고 있는 듯 반짝였고, 초록색 눈동자는 생명의 푸르름을 담고 있었으며 붉은 입술은 타오르는 불처럼 새빨갔다.
쌍꺼풀이 짙고 끝이 올라간 눈매는 깊고 길었으며 작지만 높은 콧대는 그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뚜렷했다.
이제껏 이런 미인을 본 적이 있었던가.
피에톤은 멍하니 넋을 놓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침 떨어지겠다, 얘.”
카리나는 킥킥 웃으며 앉아 있던 나뭇가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네가 코버구나. 태양신의 전령새였던 아이.”
카리나는 피에톤의 어깨에 앉아 달달 떨고 있는 까마귀를 바라보며 말했다.
코버는 카리나를 보자마자 빽빽 소리쳤다.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으음.”
카리나는 부러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새 구이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히익!
코버는 날개로 얼굴을 가리며 피에톤의 등 뒤로 숨었다.
피에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달달 떠는 코버를 안아 들며 카리나와 눈을 마주했다.
“저를…… 아니, 아니. 나를 어떻게 찾았나?”
카리나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간 네 기척을 숨겼다 생각하면 틀렸어. 모르는 체해 주었던 거거든.”
“이런.”
피에톤은 짧게 혀를 찼다.
제 마법 실력은 마탑의 마법사 중 최고이다.
그러니 이 대륙을 통틀어 자신보다 강한 마법사는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한데,
‘이런 내 은신 마법을 알아채다니.’
역시 아포칼리타란 말인가.
피에톤은 그녀에게 들키지 않게 손바닥에 묻은 땀을 닦아 냈다.
“그동안 그렇게 모른 체를 했다면, 왜 나를 찾아온 것인가?”
“왜일 것 같아?”
카리나는 후훗 웃으며 눈을 찡긋했다.
지극히도 아름다운 모습이었으나, 그렇기에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다.
저 아름다운 얼굴이 언제 어떻게 변모해 제게 달려들지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캄바이트의 수장이 널 찾아오래.”
역시나.
피에톤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날 끌고 갈 생각이라면 계획은 성공하지 못할 거다.”
“그럴 리가.”
카리나는 우습다는 듯 크게 조소했다.
“난 지금도 너를 기절시킬 수 있는 방법 수백 개를 가지고 있는데 말이야.”
“그건.”
“그러지 않는 건 내 자비란다. 내가 웃고 있을 때에 얌전히 따라오면 좋으련만.”
음성은 다정했으나 뜻은 시리다.
피에톤은 뼈에 사무치는 공포를 느꼈다. 애써 갈무리한다. 마른침을 삼킨다.
“마탑에는 가지 않을 것이다.”
“으음. 하지만 네가 가야 캄바이트와 동맹을 맺을 수 있는걸.”
“동맹?”
피에톤은 제가 들은 게 맞냐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아포칼리타가 연합군과 동맹을 맺겠다는 말인가?”
그는 황당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카리나는 어깨를 으쓱 올리며 대꾸했다.
“다들 그런 반응을 보이곤 하지.”
“당연하다. 어떻게 아포칼리타가 우리와 동맹을 맺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아포칼리타를 멸망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해도?”
피에톤은 그대로 굳었다.
그동안 그녀를 지켜본바, 그녀는 다른 아포칼리타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살육에 미쳐 있는 아포칼리타처럼은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여 이종족 중에서도 나름의 이지를 지니고 있는 이가 있구나, 생각할 뿐이었는데.
‘멸망이라니…….’
피에톤은 다시금 마른침을 삼켰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팔이 후들거렸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네가 꼭 필요하거든. 어떠니? 나와 같이 갈래?”
카리나는 야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에 훅 넘어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한 피에톤은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다시 말하지만 캄바이트의 마탑에는 가지 않을 것이다.”
“하아.”
카리나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네게 권유를 하라는 게 아니란다.”
그녀의 부드러웠던 눈이 날카롭게 변모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복종하라는 것이지.”
“윽!”
쿵.
피에톤의 무릎이 절로 꿇려졌다. 대체 어떻게. 피에톤은 몸을 움직이고자 발악했으나 그럴수록 저를 누르는 힘은 거세지기만 했다.
카리나는 그런 피에톤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어깨에 발을 올린다. 꾸욱 누르며 그를 짓밟는다.
“네가 왜 캄바이트를 배신했는지 알고 있어.”
피에톤 캄바이트.
캄바이트의 배신자.
아포칼리타의 이중 첩자.
이는 모두 다,
“헬리아스의 복수를 하고 싶은 거지?”
죽어 버린 누이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해 줄 수 있어.”
카리나는 마치 뱀의 혀를 지닌 것처럼 유혹적인 음성으로 속삭였다.
“어떠니?”
피에톤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그의 금안이 사납게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