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르네거는 창틀에 기대어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마탑에서 내다보는 풍경은 황폐하기 짝이 없었다.
아주 멀리 보이는 정글을 제외하고, 모든 곳이 다 메마른 대지였다.
캄바이트 일족은 태양신의 비호를 받는 이들이다. 그렇기에 풍요로운 대지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살 것이라 생각할 테지만, 그들은 이렇듯 죽음의 땅에서 머물렀다. 이는 아주 오래전 데이펜 일족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탓이었다.
데이펜 일족은 전쟁의 여신이 내려 준 파괴의 힘을 지니고 있었기에, 본디 정령을 이용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파괴의 힘은 모든 것을 망가뜨릴 수 있었다.
그 힘을 내세워 정령과 강제로 계약한 데이펜은 정령의 주인인 자신들이야말로 자연을 품을 수 있는 존재라는 주장을 하며 캄바이트와 대척했다.
캄바이트는 격하게 반발했으나, 결국 무릎을 꿇고 만다.
황량한 대지로 내쫓긴 캄바이트 일족은 힘을 기르기 시작했다.
태양의 힘. 마력. 이를 이용해 캄바이트는 공격 마법을 구안했다. 다시는 패배하지 않도록.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캄바이트 일족은 3개의 가문 중 가장 강한 일족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동맹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이었기에, 더 이상의 전쟁은 없었다.
그렇기에 캄바이트는 이곳에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역사를 떠올리며, 르네거는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에는 이를 들어도 별반 생각이 없었다. 그저 신의 힘을 이용한다는 자체에 경이로워했을 뿐.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한다면.
그 전쟁에서 몇 명의 인간들이 죽었을까, 무고한 희생자가 얼마나 나왔을까.
어쩌면 전쟁이란 건 강자들의 사사로운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에 피해받는 건 약자들뿐이라고.
메마른 바람이 불어와 르네거의 머리칼이 흩났렸다.
그는 뒤로 돌아 소파에 늘어진 히론을 바라본다.
“히론 님.”
히론의 꼬리가 달싹였다.
[시답잖은 일로 부르는 거면 물어 버릴 거다.]
르네거는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히론에게로 천천히 다가간다.
“제 추측이 맞는지 확인해 주실 수 있습니까?”
[들어 보나 마나 틀렸겠지만, 일단 말해 보거라.]
꽤 쌀쌀한 말이었지만 르네거는 그렇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히론과 함께 다닌 지도 오랜 시간이 지난 터.
이런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상처 받을 때는 지났기 때문이다.
“라템에 새로운 성검의 주인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뭐?]
히론은 눕혔던 고개를 번뜩 들어 올렸다.
[어디 더 이야기해 보거라. 어서!]
“아니요, 더 이야기할 것은 없습니다. 제가 아는 건 이게 다이니까요.”
[이런. 쓸모없는 놈.]
쯧.
히론은 혀를 차며 다시 드러누웠다. 고개만 옆으로 기울이며 르네거를 바라본다.
“해서 제가 추측하건대 그 성검은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당연하지. 신의 성물은 단 한 개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떻게 성검을 만들었는지가 중요할 텐데.”
후우.
르네거는 숨을 들이켰다. 히론의 맞은편에 몸을 앉히고 두 손을 맞잡는다.
“인간의 생명을 모아 만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히론은 르네거의 추론이 놀랍다는 양 눈을 크게 올려 떴다.
[타당한 추측이다.]
그는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파리를 틀고 고개를 빳빳하게 세운다.
[만약 새로운 성검이 네 검과 비교했을 때 능력의 차이가 없다면 말이다.]
“그렇다는 가정하에, 그렇다면 몇 명의 생명이 들어갔을까요? 수십? 수백?”
르네거의 반문에, 히론은 보란 듯이 비웃었다.
[멍청한 놈. 생명의 힘을 쓸 수 있는 검이 그리 쉽게 만들어지는 줄 아느냐?]
그는 튀어나온 독니를 번뜩이며 말했다.
[수천. 그 이상은 들어갔을 것이다.]
아.
르네거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들이 성검을 만든 이유는 라템의 병력이 약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을 터.
강자를 위해, 약자의 생명이 끊겨 버린 일.
이 역시도 무고한 피해자가 나온 일이다.
이는 누구의 탓인가?
성검을 들고 라템을 뛰쳐나온 나의 탓인가?
아니, 아니.
‘라템의 탓이다.’
더 이상 신을 섬기는 이들이라 할 수 없다고.
수천의 생명을 죽인 파렴치한 족속이라고.
르네거는 두 주먹을 바르쥐며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라템 안에 있었다면 이러한 부조리를 몰랐을 것이다.
아니, 알았더라도 부조리하다 여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한 발짝 떨어져 나온 지금은 어떠한가?
라템의 잔인한 면모에 분노하고, 신의 매정함에 좌절하고 있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이자 성장이었다.
이 모든 건.
‘카리나.’
그녀 덕분이었다.
카리나가 아니었다면 죽었을 테고, 설사 살아남는다 한들 라템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라템의 성기사로 사는 것은 오감을 발동하는 삶이 아니라 오감을 거세 당한 채 죽어 가는 것이었을 터.
그녀에게 감사했다.
정말, 그녀에게…….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르네거는 히론이 건네는 말로 인해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고개를 두어 번 흔든 후 숨을 크게 들이켰다.
“별것 아닙니다.”
[별것 아니라는 놈이 그렇게 손에 피가 날 정도로 쥐고 있느냐?]
쯧.
히론은 탁자 위에 있던 손수건을 꼬리로 집어 던져 주었다.
르네거는 그제야 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주먹을 쥔지도 몰랐다. 손을 펴 보니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이런.
그는 히론이 건네준 손수건으로 피를 닦으며 한숨을 뱉었다.
“감사합니다.”
[그래. 당연히 고마워해야지.]
르네거는 낮게 웃으며 두 손을 맞잡았다. 우웅, 낮은 진동이 울리더니 손 사이에 하얀 빛무리가 일기 시작했다.
신성력.
그 힘을 품은 르네거의 손은 언제 다쳐 있었냐는 양 말끔하게 치료돼 있었다.
르네거는 피가 묻은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카리나는 언제 올까요?”
자조적인 질문에, 히론은 지겹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대꾸했다.
[나간 지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 보채지 말거라.]
“그러고 싶습니다만…….”
르네거는 진심이 담긴 웃음을 뱉었다.
“보고 싶네요.”
따스한 성력이 그의 손안에 퍼져 있다. 이는 따뜻해진 그의 마음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 * *
피곤해라.
카리나는 중얼거리며 날개를 펄럭였다.
그녀의 뒤편으로 가득 찬 보름달이 보인다. 달이 높이 떠 있는 시간. 모두가 잠든 시간에 카리나는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며칠간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한 그녀였다.
와이번 언데드를 부르고, 그를 조종해 이곳까지 오고 조금도 쉬지 못한 상태로 피에톤을 만나지 않았던가.
-어떻게 알았나?
피에톤은 사나운 눈빛을 내보이며 으득 이를 갈았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지. 잘 생각해 보렴. 네 복수를 해 줄 수 있는 존재가 과연 누구일지.
카리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를 떠났다. 그녀가 하늘로 날아오를 때까지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죽은 헬리아스는, 피에톤의 유일한 가족이었으니까.
피에톤은 태양신의 아들이고, 헬리아스는 태양신의 딸이다.
그들은 쌍둥이 남매로, 어느 날 갑자기 마탑의 마법진 위에 나타났다고 한다.
폐쇄적인 공간인 마탑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들은 서로를 유일한 가족으로 인식하며 의지하고 살아왔다.
피에톤은 자유분방하며 개방적인 성격이었지만, 헬리아스는 얌전하고 소극적인 성격이었다.
그렇기에 피에톤은 더 헬리아스를 끼고돌았다.
그녀의 마법 실력이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핍박을 하는 마법사들은 혼쭐을 내 줬고, 태양신의 딸임을 의심하는 마법사들이 있다면 기를 쓰고 달려들어 반박을 했었다.
그런 일들은 꽤 빈번했고, 그렇기에 피곤한 나날이었지만 그러해도 피에톤은 행복했다. 헬리아스라는 사랑스러운 가족이 있었으므로.
그러나 그런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 년 전, 헬리아스는 죽었다.
원작에서 이유는 명확하게 설명돼 있지 않았다.
그저 헬리아스가 죽었고, 피에톤이 그녀의 죽음에 관련된 마법사들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반려되었다는 서술뿐이었다.
분개한 피에톤은 그때부터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누이를 죽게 만든 마법사들을 똑같이 죽이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내가, 감히 인간을 죽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아포칼리타를 이용하자.
그들은 생명을 넘겨받고 복수를 대신 해 주는 이들이니, 나의 생명 전부를 넘겨서라도 헬리아스를 죽게 만든 마법사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리라.
이게 바로 피에톤이 캄바이트를 배신한 이유였다.
‘참 불쌍하기도 하지.’
카리나는 그의 눈에 서려 있던 복수심과, 그에 양립하는 연민이 섞여 있던 것을 떠올렸다.
-마탑에서 기다릴게.
그리 말을 남겨 두고 왔으니, 피에톤은 분명…….
‘찾아올 테다.’
저의 목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아포칼리타를 외면할 리 없었다. 카리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럼 이렇게 피에톤을 끌어들이는 것과 캄바이트와의 동맹까지 무사히 마쳤으니, 남은 건 아포칼리타의 동향을 살피는 것뿐인데…….
“후우.”
머리가 아팠다. 너무 많은 일을 한꺼번에 그러안고 있다 보니 과부하가 온 것 같았다.
‘하지만 쉴 수는 없지.’
그녀는 그리 생각하며 창틀에 발을 올렸다. 날개를 접고 방 안으로 들어간다.
르네거와 히론은 벌써 잠든 걸까.
등불 하나 켜있지 않은 방은 캄캄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어둠 속을 보는 것에 익숙했으므로, 아무 거리낌 없이 발을 내디뎌 침대로 걸어갔다.
일단 조금만 쉬고, 다시 일어나 계획을 세워 봐야겠다.
카리나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때였다.
뒤편에서 뒤척거리는 기척이 나더니 불쑥 팔이 뻗어졌다.
“카리나.”
르네거였다.
그는 누운 채 카리나의 뒤에서 허리를 끌어당겼다. 눈을 가물가물하게 뜨며 멍하니 카리나를 올려다본다.
“내가 깨웠니?”
“아닙니다. 이제 막 잠에 든 터라…….”
말끝이 흐려지는 걸 보니 잠기운이 만연한 듯싶었다.
“어서 자렴. 피곤했을 텐데.”
르네거는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잠을 몰아내려 하는 듯싶었다.
“피에톤은…… 만나셨습니까?”
“응.”
“잘 해결되었습니까?”
“그럼. 내가 누군데.”
르네거는 피식 웃었다. 그러며 멍하니 카리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깊은 눈매에 진 그림자는 다른 때보다 조금 더 짙었다.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푸른 눈동자가 다소 흐릿했다.
“많이, 늦었습니다.”
그는 띄엄띄엄 말했다. 카리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고작 하루인데?”
“예. 늦었어요.”
살짝 칭얼거림이 섞인 목소리였다. 카리나는 재차 실소를 터뜨렸다.
“또 날 걱정한 건 아니길 바라.”
“……그건 아닙니다.”
르네거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툭, 카리나의 뺨을 만진다.
마치 소중한 것을 다룬다는 듯 섬세하게 카리나를 어루만지던 그는, 이내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끌어당겨 그곳에 입을 맞췄다.
“보고 싶었으니까요.”
입술이 조금씩 올라간다. 호선이 그려지는 입가는 그가 느끼고 있는 행복의 정도를 그대로 드러내 주었다.
“이대로…….”
르네거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그대로 잠에 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멍하니 그를 내려다보던 카리나는 이내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르네거의 뺨을 쿡쿡 찔러 본다.
“이런 어리광도 보게 되다니.”
그녀는 기분 좋은 미소를 입가에 걸며 팔베개를 하고 그의 곁에 누웠다.
생각할 거리가 많았는데,
별로 생각하고 싶지가 않아졌다.
그저 이렇게 누워 있고 싶었다.
이것 역시도 기분 좋은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