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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85화 (85/135)

85화

피에라는 이른 아침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창문을 활짝 연다. 메마른 대지가 가장 먼저 그녀를 맞이했다. 불쾌한 마음이 미간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곧 날아온 분분한 새벽 향기는 향긋하기 그지없어, 그녀의 들끓었던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

피에라는 창문을 잡은 손에 바싹 힘을 주었다.

제대로 된 잠을 청하지 못한 그녀였다.

이는 아포칼리타와의 동맹이라는 엄청난 제안을 고민하고 있기 때문도 있었으나 그것보다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르네거 라템과의 대화였다.

-신을 따르는 인간들의 심중에 대해 의심을 한 것입니다.

-자신의 행동을 신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라 주장하며 사욕을 챙기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인간들을 방관하는 신은 대체 무엇일까.

터무니없는 소리라 생각했다. 신을 믿는 행위에 그릇된 점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피에라는 알아채지 못했다.

자신에게도 의심의 씨앗이 심어진 것을.

-악과 선을 규정하는 건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니 자꾸만 르네거의 말을 상기하며 불편한 마음을 느끼는 것이 아니겠는가.

후우.

피에라는 이마를 짚었다. 창문에 어깨를 기대며 바깥을 바라본다.

풀 한 포기도 제대로 나지 않는 황량한 대지. 쩍쩍 갈라져 있는 땅이 보였다.

뱀 한 마리가 지나간다. 어찌나 곯았는지 바싹 마른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는 어떻게든 살아 보고자 발악하며 먹잇감을 찾아보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다.

굶주린 매 한 마리가 날아왔다. 순식간에 뱀을 낚아챈 매는 끼룩거리며 하늘 높이 날아갔다.

본디 태양신의 선택을 받은 캄바이트 일족은 이런 곳에서 살 것이 아니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대지를 딛고 자연을 만끽하며 살아야 하건만.

‘데이펜…….’

그들이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하여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힘을 키웠으나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했다. 단단한 동맹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동맹이야 언제든 깨뜨릴 수 있는 것 아니냐, 하겠지만 이들은 달랐다.

3개 가문의 수장들은 피의 맹약을 맺고 있었으므로.

‘배신은 곧 죽음.’

피에라는 목덜미를 더듬으며 가느다란 한숨을 내뱉었다. 입안이 까끌까끌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책상으로 다가갔다. 서랍을 열고 데이펜의 수장, 페넬로피에게서 온 전령을 열어 본다.

《찾아가겠습니다. 그때까지 카리나 아포칼리타를 붙잡아 두시길 바랍니다. 그녀는 반드시 없애야 하는 적이니.》

가타부타 인사말도 없다. 피에라는 페넬로피가 꽤 건방지다 생각했지만 어느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르네거 라템이 배신하지 않았던가.

어릴 적 그들은 매우 가까이 지낸, 어쩌면 가족처럼 지낸 사이였으므로 르네거가 라템을 배신한 것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이렇게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어린아이의 흔들리는 마음이니 건방진 전령쯤이야 이해해 줄 수 있다고. 피에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따로 있었다.

카리나 아포칼리타가 아포칼리타의 탑을 무너뜨리고 도망친 것은 기정화된 사실이다.

그러한 행위의 결과로 그녀가 아포칼리타를 배신했다는 것도,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는 사실이다.

하여 그녀와 손을 잡는다면 아포칼리타를 무너뜨리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할 텐데.

《그녀는 반드시 없애야 하는 적이니.》

페넬로피는 왜 카리나 아포칼리타를 적대하는가.

설마, 카리나 아포칼리타가 르네거와 함께 있다는 이유로?

‘그렇게 어리석을 수는…….’

피에라는 들고 있던 전령을 움켜쥐었다.

페넬로피 데이펜이 오면 그녀와 더 대화를 해 봐야겠군.

그녀는 그리 생각하며 다시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아까부터 자꾸만 시끄러운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창문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피에라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빠르게 방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 * *

카리나는 이른 새벽부터 마탑의 곳곳을 구경하고 있는 중이었다.

르네거와 히론이 일어날 때까지만 돌아다녀 봐야지, 했던 것이 시간이 꽤 지나 버렸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태양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붉은 빛발이 수평선 너머에서부터 밀려온다.

그 햇살을 여과 없이 맞으며, 카리나는 탑의 주변에 조성된 정원을 거닐었다.

사실 정원이라 할 것도 없었다. 나무 몇 그루와 잡초 몇 포기가 심어져 있는 공간일 뿐.

‘죽음의 땅이니까.’

카리나는 그리 생각하며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이른 시간이건만, 정원에는 마법사 여러 명이 나와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지팡이를 들고 영창을 하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마법 연습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구경이나 할까.’

그녀는 벤치에 몸을 앉혔다. 그리고 허리를 앞으로 숙여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손에 턱을 괴었다. 마법사들을 멍하니 바라본다.

피에톤도 찾았으니 캄바이트와의 동맹은 무리 없이 이뤄질 것이다.

다만 문제는 데이펜과 라템인데…….

‘피에라가 어떻게든 해 주지 않으려나.’

피에라는 골수적인 면모가 있는 인물이었다.

저가 옳다 생각하면 옳은 것이고 틀렸다 생각하면 틀린 것이다. 하여 자신이 선택한 것에 철회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자신을 믿어 주기만 한다면 연합군과의 동맹은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카리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믿기까지가 어려운 거지, 한번 믿으면 끝까지 갈 테니까.’

그녀는 생각을 읊조리며 몸을 쭉 폈다. 고개를 뒤로 젖힌다. 거꾸로 솟은 마탑이 시야에 담겼다.

‘데이펜과 사이도 안 좋을 테고.’

땅을 둘러싸고 일어난 데이펜과 캄바이트의 분쟁은 이곳 인간들에게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승리자인 데이펜은 별생각이 없지만, 패배자인 캄바이트는 이제까지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동맹 관계로 묶여 있으니 어찌할 방도가 없는 터.

‘정 안 되면 둘이 싸움이라도 붙이 든가 해야겠네.’

카리나는 킥킥 웃으며 젖혔던 고개를 되돌렸다.

그리고, 저를 향해 굳어 있는 마법사들을 볼 수 있었다.

왜 저래?

카리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보니?”

“히익!”

그들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을 쳤다. 카리나는 미간을 좁혔다.

“마치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그러면 내가 기분이 나빠지지 않겠니?”

물론 인간들에게 있어 나는 괴물이 맞긴 하지만. 카리나는 씁쓸한 생각을 하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 그런 게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마법사들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푹 허리를 숙인다.

흐음.

카리나는 그들을 면밀히 살펴 보았다. 자세히 보니 꽤 어린 나이의 인간들이었다. 고작해야 열 살쯤 되었을까.

저렇게 어린 나이에 마탑에 들어와 있다니.

카리나는 입술에 호선을 덧그렸다.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로 다가간다.

“왜 그렇게 쳐다본 거니?”

그들은 쭈뼛거리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카리나는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눈을 보렴.”

그녀는 어린 마법사들의 앞에 쪼그려 앉으며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다.

조금의 불순물도 없는 깨끗한 눈동자가 카리나에게로 닿았다.

다분히도 매혹적인 빛이 담겨있는 초록색 눈동자가 그들에게로 닿았다.

화르륵!

그들의 얼굴이 불타올랐다. 어린 마법사들은 저마다 뺨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눈을 질끈 감는 아이도 있었다.

카리나는 재차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너희 수장님이 보면 기겁을 하겠구나.”

그녀는 그들의 정수리 위에 손을 올려 머리칼을 헝클었다.

“걱정 마렴. 말하지 않을 테니.”

“아, 가…… 감사합니다.”

갈색 머리의 아이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귀여워라. 꼭 릴리 같네.

카리나는 헤어진 릴리를 떠올리며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마법 연습을 하고 있었던 거니?”

“……네.”

“그럼 어디 해 보렴.”

“예?”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마법을 쓰려는 이유는 나 같은 아포칼리타들과 싸우기 위해서일 텐데, 눈앞에 그 존재가 있잖니.”

카리나는 스스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에게 공격해 보렴. 알려 줄 테니.”

“하, 하지만…….”

“괜찮대도.”

카리나는 쭈뼛거리는 아이들의 팔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그에 어린 마법사들은 머뭇거리다, 개중 가장 덩치가 큰 아이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중얼중얼 주문을 왼다.

그 즉시 지팡이 끝에서 빨간 불꽃이 피어올랐다.

피융!

불꽃은 기세 좋게 카리나에게 날아왔지만, 그녀의 살에 닿자마자 기화돼 사라져 버렸다.

아이들은 휘둥그레 한 채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카리나는 팔에 맺힌 그을림을 털며 생긋 웃어 주었다.

“아포칼리타의 속성은 다들 제각각이란다. 나 같은 경우는 어둠의 속성을 띠고 있지. 이런 불꽃 같은 건 내게 아무 소용이 없어. 하면 무엇으로 공격해야 할까?”

아이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깜빡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몇몇의 아이가 손뼉을 치며 대답했다.

“빛이요?”

“그럼 번개?”

“똑똑하네.”

카리나는 칭찬하며 뒤로 물러섰다. 양팔을 벌리고, 그들과 마주 선다.

“해 보렴.”

방금 전 아이의 공격으로 긴장이 풀린 듯, 자신감이 생긴 어린 마법사들은 저마다 지팡이를 들고 주문을 외웠다.

피융!

초록색을 띠고 있는 빛줄기가 카리나에게로 날아왔다.

번쩍!

번개가 내리쳤다.

카리나는 그 모든 것을 가감 없이 맞아 주고 있었다. 이런 것쯤은 히론에게 물리는 것보다 아프지 않았으니까.

휘이잉.

마법이 한바탕 쏟아진 후, 폭발로 인해 치솟았던 연기가 모두 물러갔다.

카리나는 자신의 멀쩡한 모습에 크게 놀라고 있는 아이들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지금 공격들은 정말 좋았어. 이제 힘만 기르면 되겠구나.”

카리나는 한 아이의 뺨에 묻은 검은 재를 닦아 주며 말했다.

“더불어 아포칼리타들은 각각의 마나핵이 있단다. 위치는 모두 달라. 심장, 머리, 팔, 다리, 자신을 제외하고 알기가 힘들지. 너희는 그곳을 찾아 공격하면 되는 거란다. 그곳이 약점이니.”

“그럼 카리나 님은 어디인데요?”

눈을 끔뻑이며 경청하던 아이들 중 한 명이 튀어나와 물었다. 카리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열세 명의 형제들의 마나핵이 내 척추를 따라 박혀 있다. 한 개의 마나핵은 내 심장에 박혀 있고.

카리나는 번진 씁쓸함을 지우며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나는 워낙 많아서. 찾아볼래?”

으음.

아이들은 눈을 가늘게 뜨며 카리나의 곳곳을 관찰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조금 더 크면 배우게 될 거란다.”

카리나는 그런 아이들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이들은 이제 완전히 긴장이 풀렸다는 듯 헤헤 웃는 반응을 보였다.

정말 귀엽네.

요즘 들어 왜 이렇게 인간들이 귀엽게 보이는 건지.

르네거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마음이 변한 건가. 카리나는 생각을 흩뜨리며 그들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한 번 더 해 볼래?”

“네!”

“해 볼래요!”

아이들은 다시금 주문을 외웠다. 마치 이번에는 카리나를 이길 수 있다는 듯 비장한 눈빛을 하고 있다.

카리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이때였다.

피융!

한 아이의 지팡이에서 갑자기 빛줄기가 뽑아져 나왔다. 아이가 조준하지 않은 상태에서 날아간 마법이라, 그 빛줄기는 아이의 옆쪽에 있던 나무에 내리꽂혔다.

쿠웅!

나무가 기우뚱하더니 그대로 기울어 쓰러졌다. 나무 아래 서 있던 아이가 겁에 질려 외쳤다.

“꺄악!”

아이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런.

카리나는 빠르게 뛰쳐나갔다.

“으악! 악! 나 다쳤…… 어?”

호들갑을 떨던 아이는 이내 자신의 몸이 멀쩡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무가 바로 제 위에서 멈춘 것이 보였다. 황급히 눈을 들어 올린다.

“괜찮니?”

옆에는 카리나 아포칼리타가 있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나무를 받친 채 자신을 보호해 주고 있었다.

딸꾹 아이는 느닷없이 튀어나온 딸꾹질에 입을 손으로 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서 나가렴. 위험하니.”

“가, 감사합니다……!”

아이는 엉금엉금 기어 그곳을 탈출했다. 카리나는 그제야 나무를 받치고 있던 손에 힘을 줄 수 있었다.

우웅.

새까만 어둠이 그녀의 손끝에서 피어올랐다. 뽑혀져 나온 힘은 그녀의 손이 닿은 나무줄기를 물들이며 몸통, 뿌리까지 나아갔다.

파스슷.

거대했던 나무는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다. 카리나는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몸을 일으켰다.

귀한 나무를 없애 버렸다고 화내는 건 아니겠지.

카리나는 피에라를 떠올리며 뺨을 긁적였다. 이때였다.

“이게 무슨 짓이오?”

피에라의 목소리였다. 카리나는 생각하자마자 바로 등장한 피에라에 놀람을 느끼며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음.”

피에라는 오만상을 짓고 있었다. 카리나는 더욱 멋쩍어져 슬그머니 눈을 굴렸다.

“아이를 구하려고?”

으득.

피에라는 이를 꽉 깨물었다.

“들어가시오.”

“아니,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들어가라 하지 않았소!”

그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카리나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굳어 있는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어깨를 으쓱 올린다.

“너희의 수장님이 내게 화가 났나 봐.”

“하, 하지만……!”

“언니는 저를 구하려고…….”

언니라니. 카리나는 푸훗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지칭한 아이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는다.

“잘 있으렴, 애들아.”

카리나는 아이의 뺨에 제 뺨을 가져다 대고, 몸을 일으켰다.

“다음에 날 죽이러 올 때 만나자꾸나.”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얼어 버린 아이들을 뒤로하고, 카리나는 피에라를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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