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피에라 캄바이트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방을 뛰어 내려온 이유는 카리나 아포칼리타가 어린 마법사들에게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혹 아이들에게 나쁜 짓을 할까, 그들을 달콤한 뱀의 속삭임으로 유혹할까 걱정되어 곧장 뛰쳐나온 것인데.
-마법을 쓰려는 이유는 나 같은 아포칼리타들과 싸우기 위해서일 텐데, 눈앞에 그 존재가 있잖니. 나에게 공격해 보렴.
대관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아이들이 자라나 자신에게 덤벼들 것을 알면서도 가르침을 주고 있다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괜찮니? 그럼 어서 나가렴. 위험하니.
다칠 뻔한 아이를 구해 냈다. 그저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보살피던 그녀는 제 팔에 상처가 난 줄도 모르고 있는 듯했다.
왜?
잔잔한 수면에 던져진 돌덩이는 파동을 일으켰다.
대체, 왜?
아포칼리타는 인간을 학살하는 이종족이다. 괴물이다. 그들은 인간과 같은 감정이 없는 존재였다. ……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리나를 보면. 그녀의 얼굴에 이는 표정과 말에 담겨 있는 따뜻함을 보면 마치 자신의 생각이 틀린 것 같았다.
그럴 리 없다.
아포칼리타는 악이요, 없어져야 하는 쓰레기이다.
제아무리 카리나가 다른 아포칼리타와 다르다 한들 그녀 역시도 아포칼리타인 터.
그녀 역시도, 악이다. 이건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악과 선을 규정하는 건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니 자꾸만 귓바퀴를 맴도는 르네거의 말을 무시해야 한다고.
-신께서는 우리를 선이라 칭하지 않았고, 그들을 악이라 칭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가 라템을 배신한 이유를 헤아려 보면 안 된다고.
피에라는 파동이 자욱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정원을 빠져나갔다.
* * *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카리나가 방문을 열자마자 맞이한 건 달려 나온 르네거였다.
그의 검은 머리칼은 땀에 흠뻑 젖어 있다. 항상 건조했던 얼굴 역시 식은땀이 흘러 있다.
“잠깐 산책을. 그런데 너는?”
“당신을 찾아다녔습니다.”
르네거는 카리나가 방에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뛰쳐나가 탑 곳곳을 돌아다녔다.
어제 자신과 피에라가 말다툼을 하지 않았던가. 결과로 카리나에게 분노의 화살이 돌려질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후우.
그는 눈앞의 카리나를 바라보며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턱 끝에 맺힌 식은땀을 닦는다.
카리나는 그런 르네거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날 찾아다닐 필요가 없을 텐데. 그녀는 르네거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우리는 맹약으로 이어져 있어.”
르네거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집중하면 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는 말이야.”
“집중이요?”
“그래.”
그녀는 자신이 르네거를 찾을 때에 썼던 방법을 떠올렸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고, 네 손바닥에서부터 천천히 내 흔적을 더듬어 봐.”
르네거는 카리나의 말을 따라 읊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후우.
깊은 호흡으로 인한 가슴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카리나는 그의 가슴에 대었던 손을 떼어 내고,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처음 보았던 그의 얼굴은 그늘이 져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었다. 시름이 켜켜이 쌓인 퀭한 눈매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늘진 눈가는 달라진 게 없지만 그렇다고 해 기운이 없어 보이진 않았다. 이는 한층 더 또렷해진 눈과 촉촉해진 눈가 덕분이라고. 빌어먹을 성검을 떼어 놓은 덕분이라고. 카리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듯 기운이 맑아지니 외모마저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를 지켜보고 있자면 밤의 장막에 한 줄기 내려진 빛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텁텁한 방 안에 내리 갇혀 있다 탁 열린 창문 너머의 쾌청한 공기를 맡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기에 어젯밤 그의 옆에서 잠을 들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내다본다.
자일은 아멜과 제이슨의 죽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한데 아직까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분명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걸 텐데.’
카리나는 사붓 눈을 찡그렸다. 그 미친놈의 심중을 도통 짐작할 수 없었다.
이때, 그녀의 허리를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카리나는 놀라지 않고 르네거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잘 찾네.”
“당신이 잘 알려 주셨으니까요.”
르네거는 카리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말대로, 맹약에 담긴 힘을 더듬다 보면 이어진 실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것을 천천히 따라오니 카리나가 있었다. 참으로 신기하며 대단한 일이었다.
“이보다 더 떨어져 있어도 느낄 수 있습니까?”
“멀리까지는 안 될 거야. 근방에 가면 알아차릴 수 있는 정도겠지.”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르네거는 씨익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그 이상으로 떨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숨이 꽤 뜨거웠다. 살에 닿는 온기가 부드러웠다.
“어리광이 늘었어.”
카리나는 그런 르네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르네거는 더욱 세게 카리나를 끌어안았다.
그러다 문득 미간을 좁힌다. 그는 빠르게 고개를 떼어 내고 카리나의 반대쪽 어깨를 살폈다.
“다치셨습니다.”
그녀의 왼 어깨에 상처가 나 있었다. 보아하니 방금 전 다친 듯했다. 르네거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어쩌다 다치신 겁니까?”
“음.”
카리나는 눈을 굴렸다. 구구절절 말하기에는 일이 너무 많았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아이를 구하려다?”
이 단순한 말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뭐가 됐든 중요한 것은 카리나가 다쳤다는 사실이었다.
르네거는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카리나의 몸을 돌렸다.
“제가 무슨 말을 할 것 같습니까?”
마주 본 그의 얼굴은 다소 일그러져 있었다. 카리나는 멋쩍게 웃었다.
“몸을 생각하라고?”
“아시니 다행입니다만.”
르네거의 눈에 걱정스러움이 번졌다.
반응을 보건대 카리나는 저가 다친 줄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 사실이 못내 불편했다. 르네거는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다치지 마십시오.”
“별것 아닌데, 뭘.”
카리나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어차피 네가 치료해 줄 거잖아.”
그녀는 야살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르네거의 턱을 더듬었다. 하, 르네거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정말 못 말리는이다.
그는 그리 생각하며 카리나에게로 몸을 숙였다.
그녀의 상처에 입을 가져다 댄다. 조심스럽게 그곳을 핥는다.
따뜻한 기운이 퍼져 왔다. 따끔거리기도 하지만, 통증보다는 편안한 기운이 우선이었다.
카리나는 눈을 감은 채 그의 뒷목을 그러안았다. 르네거 역시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어깨에서부터 시작한 입맞춤은 천천히 자리를 옮겨 갔다. 쇄골, 목덜미, 턱, 그리고 입술까지 다다른 그의 숨은 보다 깊어졌다. 카리나는 익숙한 양 입술을 벌렸다.
아랫입술을 핥으며 들어온 그는 한참이나 카리나를 붙들었다.
하아.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그들은 같은 숨을 토해 냈다. 그러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서로의 입술을 어루만지며 코끝을 맞댄다.
“있지 않니.”
카리나의 말에, 르네거는 느리게 눈을 들어 올렸다. 나른한 시선이 닿았다.
“만약 내가…….”
그녀는 르네거의 뒷목을 천천히 더듬으며 말했다.
“사라진다면, 넌 날 찾으러 올 거니?”
르네거는 그대로 굳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카리나를 멍하니 주시한다.
“왜…… 당연한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있었다. 당황한 것일까, 화가 난 것일까.
어떤 감정이 담겨 있는지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무어가 됐든 르네거는 동요하고 있었다. 그는 카리나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당신이 죽는다 한들 찾아갈 겁니다. 죽음의 강을 건너서라도.”
그의 손은 뜨거웠다.
가해진 힘은 거셌지만 연약하다.
카리나는 그의 무거운 마음을 더듬으며 작게 조소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글쎄.”
카리나는 애써 입술을 들어 올렸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혹시 모르잖니, 일이라는 게.”
“그게 무슨…….”
르네거는 입을 뻐끔거렸다. 그녀의 의중을 캐고 싶다는 욕망이 목 끝까지 치달았다. 그는 목을 긁으며 낮게 노후했다.
하지만.
[뭔가가 온다.]
히론의 목소리가 먼저였다. 르네거와 카리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소파에 누워 하품을 하고 있는 히론이 보였다.
“일어났니?”
[아까부터 깨어 있었다. 네놈들이 달라붙어 있어서 몰랐던 것이겠지.]
“어머, 질투는.”
카리나는 히론의 투덜거림을 귀엽게 여기며 싱긋 웃었다.
“그런데 뭔가가 온다니? 무슨 말이야?”
[창밖을 보거라.]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날아오는 하얀 까마귀가 보였다. 저건 분명…….
“코버?”
르네거와 카리나는 동시에 말했다.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갸웃한다.
“너도 알고 있니?”
“피에톤의 전령새이지 않습니까.”
“그래.”
카리나는 바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날아오던 새는 한 바퀴 허공을 돌더니, 이내 카리나의 팔에 안착했다.
르네거는 그런 코버를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몸을 뒤로 빼는 게, 격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는 듯싶었다.
“넌 피에톤을 싫어하나 보구나.”
카리나는 코버의 목을 긁으며 말했다.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먼젓번에도 피에톤을 ‘이상한 놈’으로 칭하며 질색했었지.
르네거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그는 라템의 수장인 스벤까지도 포용했던 그릇이 넓은 이가 아니었나.
물론 피에톤이 제정신이 아닌 건 카리나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르네거의 이러한 혐오도 어느 정도 이해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어.”
그녀는 코버가 물고 온 작은 쪽지를 펼치며 말했다.
“그가 우리 편에 섰거든.”
씨익.
카리나의 입꼬리가 보란 듯이 치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