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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87화 (87/135)

87화

“…….”

피에라는 마주 앉아 있는 카리나와, 그녀의 어깨에 올라타 있는 하얀 까마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 새는 아무리 보아도 피에톤의 전령새였다. 하, 피에라는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어떻게 찾았소?”

정말 궁금했다.

넉 달 가까이 피에톤을 찾아 헤맸던 캄바이트의 마법사들이었다.

한데 이렇게 하루 만에 찾아오다니. 그 방법이 너무도 궁금했다. 피에라는 눈을 빛냈다.

“내가 말해 줄 거라 생각하고 물은 건 아니라고 믿을게.”

카리나는 고개를 까딱이며 대답했다. 피에라는 기대에 찼던 눈을 거두며 쯧 혀를 찼다.

“하면, 피에톤은 언제 이곳에 오는 것이오?”

“글쎄.”

카리나는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았다.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살펴본다.

“그러니까…….”

그녀는 탁,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지금?”

쾅!

벽이 부서졌다. 창문을 지탱하고 있던 지지대까지 부서져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뿌옇게 이는 먼지 너머, 서 있는 이는,

“아. 실수.”

전혀 실수인 것 같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피에톤이었다.

저 망할 새끼가. 피에라는 뒷목을 붙잡았다.

* * *

“조금 더 빨리 움직일 수는 없어?”

말의 안장에 앉아 아힌의 허리를 붙잡고 있는 페넬로피의 말이었다.

아힌은 그런 페넬로피의 손을 부드러이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지금이 최고 속도야. 여기서 더할 수는 없어. 그리고 거의 다 왔어. 조금만 기다려.”

“하지만 이러다 뱀의 여자가 떠나 버리면.”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캄바이트의 수장께 전달을 해 놓았으니.”

“……그 여자는 믿을 수가 없단 말이야.”

페넬로피는 손에 바싹 힘을 주며 중얼거렸다.

캄바이트의 수장, 피에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페넬로피로서는 마탑에 가는 지금의 상황도 영 마뜩잖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카리나 아포칼리타가 그곳에 있다는데.

오늘에야말로 반드시……!

페넬로피는 으득 이를 갈았다.

“케셰트 라템은?”

“바로 마탑으로 오겠다 전령이 왔어.”

“그럼 걔도 도착하지 않았겠네.”

페넬로피는 입술을 짓씹으며 미간을 좁혔다.

느려.

정말 느려서, 미칠 것만 같아.

참을성이 언제부터 이렇게 없어진지는 모르겠다.

페넬로피 스스로가 생각해도 자신의 성격이 많이 변한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그녀는 지금의 자신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오직 목표만 바라보고 사는 삶.

이것만큼 효율적이고 완벽한 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이번에는 기필코 카리나 아포칼리타를 죽여야 한다고. 그래야만 나의 목표에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페넬로피는 그렇게 굳은 다짐을 했다.

“힘들지는 않아?”

그녀는 고삐를 잡고 있는 아힌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아힌은 여전히 다정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보다야 익숙지 않은 네가 더 걱정이지. 꽉 잡고 있어.”

그런 그를 바라보며, 페넬로피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반쯤 벌렸다.

아힌은 참 여전했다. 그래. 여전하다는 말이 어울렸다.

페넬로피는 르네거가 실종됐을 때 그에게 책임을 물으며 폭언을 쏟았다. 그뿐인가. 마주치기만 해도 소리 소리를 지르며 그를 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 끔찍한 행동이었으니, 아힌이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힌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전부터, 지금까지. 여전한 다정함으로 페넬로피를 대했다. 정말 변함없이…….

페넬로피는 손을 움찔거렸다. 후우, 숨을 크게 들이킨 그녀는 이내 아힌의 등에 천천히 뺨을 기댔다.

“고마워.”

자신을 떠나지 않은 것도, 여전하게 자신을 대해 주는 것도.

모두 다 고마울 뿐.

페넬로피는 어쩐지 가벼워진 마음을 느끼며 작게 웃었다.

“별말을 다 하네.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

아힌은 제 등에 닿은 페넬로피의 온기를 느끼며 대답했다.

음성은 지극히도 따뜻했으나, 서려 있는 표정은 그와 정반대였다. 그는 입술을 비틀며 조소했다.

‘반은 넘어왔군.’

아힌은 불쑥불쑥 튀어나오려는 웃음소리를 꾹꾹 억누르며 잔기침을 했다.

이대로라면 페넬로피는 자신에게 홀랑 마음을 주어 버리리라. 그렇다면 페넬로피를 독차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일 테지.

짜릿한 희열이 올라왔다. 지금도 이럴진대, 그녀를 완전히 정복하게 됐을 때에 느낄 희열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 정도면 도망친 르네거 라템에게 고맙다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힌은 낄낄 웃음을 흘리며 말을 재우쳤다.

이때였다.

-히이힝!

말이 갑자기 앞발을 구르며 멈춰 섰다.

“꺄악!”

“조심해!”

아힌은 고삐를 잡아당기며 페넬로피를 붙잡았다.

하지만 말은 쉽게 진정하지 못했다. 자꾸만 앞발을 들어 올리며 기겁을 할 뿐이다.

갑자기 왜.

아힌은 바람을 이용해 고삐를 고정한 후 페넬로피를 그러안았다. 바닥으로 떨어진다.

쿵!

낙법을 펼치긴 했다만 충격은 상당했다. 아힌은 어깨를 꾹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그는 곧장 검을 빼 들었다.

아힌! 페넬로피의 외침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서걱 말의 머리가 잘렸다. 피가 솟구쳤다.

“아힌! 이게 무슨 짓이야!”

페넬로피는 아힌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이미 늦었다. 말은 죽어 널브러져 있는 터였다.

“왜, 왜 죽인 거야? 왜?”

페넬로피는 경악이 가득 찬 눈으로 아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힌은 그런 페넬로피가 더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 말 때문에 우리가 다칠 뻔했잖아?”

그는 별일이 아니라는 듯 푸시시 웃으며 페넬로피의 손을 잡아끌었다.

“내 바람을 타고 가자. 그럼 비슷하게 도착할 거야. 응?”

그의 손은 지극히도 차가웠다. 냉랭한 바람과도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페넬로피는 잡힌 손을 따라 소름이 오도도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을 사방으로 굴린다. 복잡하고 불안한 감정이 가슴을 가득 메웠다.

“페넬로피?”

아힌은 재차 그녀를 불렀다. 여전히 다정한 얼굴이다.

직전에 한 생명을 끊은 것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페넬로피의 입이 벌어졌다. 비난의 말이 쏟아져 나오기 직전이었다.

이때.

“그러게. 별일은 아닌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넬로피와 아힌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곧,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있는 한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넌 누구지?”

아힌은 페넬로피를 뒤에 숨기며 나섰다. 여자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눈을 반짝였다.

“데이펜의 아이들이구나. 어딜 가고 있는 걸까?”

여자는 턱을 괸 채 두 다리를 흔들었다.

흐음, 흐음.

비음이 연달아 들려온다. 페넬로피와 아힌은 긴장감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아. 카리나를 찾으러 가나?”

탁.

그녀는 지면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등 뒤에서 두 개의 검을 꺼내 들었다.

“이걸 어쩐다. 카리나는 내가 데리고 갈 건데.”

씨익.

여자의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치켜 올라갔다.

“너희부터 죽여야겠구나.”

케투스 아포칼리타.

그녀는 포식자의 아가리를 벌리며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 * *

“지금 네놈이 마탑을 부순 것이냐?”

피에라는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한눈에 보아도 흉흉한 모습이건만, 피에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실수였습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아, 실수였다니까요.”

피에톤은 눈을 찡그리며 귀찮다는 듯 가벼이 대꾸했다.

피에라는 이마를 짚었다. 당장에라도 튀어나오려는 욕지거리를 애써 억누르며 바득 이를 간다.

“저놈을 추포하도록. 지하 감옥으로 끌고 내려가라.”

그녀는 방 안에 서 있던 마법사들에게 명령했다. 하지만 그들은 움직 일 수 없었다. 카리나가 사이에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건 안 되지.”

카리나는 생긋 웃으며 피에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를 지켜보던 르네거의 미간이 좁혀진다.

“나는 얘를 찾아온다 했지 너희에게 넘겨주겠다고는 안 했거든.”

뭐?

피에라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리고 얘는 이미 내 쪽에 붙어서.”

“네. 그렇게 됐네요, 수장님.”

피에톤은 피에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피에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그 무슨 망발이오!”

피에라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카리나를 향해 삿대질을 한다.

“당장 피에톤을 내놓으시오. 그렇지 않는다면……!”

“왜, 동맹을 맺지 않으려고?”

카리나는 싸늘하게 반문했다. 그녀는 언제 웃음기를 머금었냐는 듯 매정해진 시선으로 피에라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죽음의 강에 맹세를 하지 않았니? 그때에 맹세의 서약 역시 피에톤을 찾아온다는 말뿐이었을 텐데 말이야.”

피에라는 자신이 뱉었던 말을 상기했다.

-죽음의 강 앞에 맹세하겠소. 그대가 마법사를 찾아 온다면 동맹을 맺겠노라고.

……이런 젠장.

피에라는 당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으득 이를 갈았다.

“나를, 이 나를 농락한 것이오?”

“그럴 리가.”

카리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멍청하게 넘어간 거지.”

“카리나 아포칼리타!”

피에라는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부터 튀어나온 빛줄기가 카리나에게로 쏘아졌다.

챙!

하지만 카리나에게는 닿지 못했다. 르네거가 검집으로 마법을 튕겨 낸 덕분이다.

“지금 제 앞에서 카리나를 해하려 한 겁니까?”

르네거는 피에라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그의 푸른 눈에는 조금의 동정도 남아 있지 않아, 피에라는 자신도 모르게 사붓 어깨를 떨었다.

후우.

그녀는 한숨을 길게 뱉었다. 두통이 온 이마를 짚는다. 식은땀이 손바닥에 묻어났다.

“피에톤을 데리고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요?”

카리나는 우스운 질문을 들었다는 양 헛웃음을 뱉었다.

“말했잖니.”

그녀는 피에톤과 르네거와 피에라를 지나쳐 창가로 다가갔다. 창틀을 잡는다.

휘이잉.

몰아치는 바람이 그녀의 모든 것을 나부끼게 만들었다.

“아포칼리타를 멸망시킬 거라고.”

그녀는 반쯤 고개를 돌렸다. 독을 품고 있는 초록색 눈동자가 잔인하게 번뜩였다.

“그러기 위해서 얘는 정말 좋은 재료거든.”

입술을 할짝이는 그녀의 모습은, 그 무엇보다도 간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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