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피에톤은 카리나를 향해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피에라에게로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피에톤은 무리 없이 카리나를 관찰할 수 있었다.
“말했잖니.”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은 카리나의 모든 것을 붙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또렷하고 명료한 웃음을 머금은 채 자신들을 바라볼 뿐.
피에톤은 그녀가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저보다 한 뼘 정도는 작을진대, 그녀의 시선은 이상하리만큼 고도가 높았다.
“아포칼리타를 멸망시킬 거라고.”
말에는 힘이 있고, 진실성이 있다.
하여 저 말은 몇 번을 들어도 놀라울 뿐이었다. 피에톤은 바싹 마른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기 위해서 얘는 정말 좋은 재료거든.”
그녀는 그제야 피에톤을 바라보았다.
눈이, 눈빛이, 닿는다. 그녀의 시선과 접촉한 피부가 따끔거렸다.
좋은 재료.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자신은 카리나 아포칼리타의 종으로 살겠노라 맹세를 한 상황이었으므로.
피에톤 캄바이트는 그녀의 충실한 종이 되어 아포칼리타와 맞서 싸울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나의 복수를 해 줄 것이다.’
헬리아스를 죽게 만든 마법사들을 모조리 죽여 줄 것이라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헬리아스의 복수를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은 전쟁 중에 죽더라도 만족할 수 있었다.
“지금…… 나의 아이를 그대의 수하로 둔다 말하는 것이오?”
나의 아이. 피에톤은 그 말을 더듬으며 조소했다.
거짓말은 자신이 아니라 피에라가 하고 있었다.
정녕 자신을 ‘나의 아이’라 생각했다면 헬리아스가 죽은 원인을 더 조사했을 것이고 뛰쳐나간 자신을 죽이고자 달려들지 않았을 텐데.
정말 끔찍하게도 역겨운 거짓말이다. 피에톤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너는 피에톤이 돌아오면 죽이려 했잖니. 해서 내가 그 목숨을 거둬 유용하게 써 주겠다 하는 것인데.”
카리나 역시도 만만찮게 기분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한 손에 모으며 턱을 들어 올렸다.
“왜 이렇게 짜증 나게 해.”
쐐액.
그녀의 검은 동공이 길게 찢어졌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몸을 휘감을 것처럼 괴기한 모습이었다.
피에라는 들끓었던 숨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눈을 들어 올렸다.
“그대는 아포칼리타군.”
그래. 카리나는 아포칼리타였다.
그녀가 제아무리 따뜻한 표정을 짓는다 해도, 어린아이들에게 상냥했다 하여도 그녀는 끔찍한 아포칼리타였다. 이 꼬리표는 결코 떨어지지 않으리라.
“분명 아포칼리타를 배신했다 하였는데, 어찌 이렇게 간악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이오? 말장난으로 나를 속이다니!”
“뭐?”
카리나는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는 본연에서 우러나온 웃음이었다. 그녀는 피에라의 말이 정말 웃기다는 듯 한참 배를 잡고 웃었다.
“아포칼리타만이 악한 행동을 한다 생각하는 거니?”
그녀는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내가 볼 때에는 너희 같은 인간들도 충분히 악한데 말이야.”
피에라의 눈가가 사붓 떨렸다.
“인간과 아포칼리타로 선악을 구분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선과 악은 종족에 따라 갈리는 게 아니니 말이야.”
어떻게 그런 망발을. 피에라는 분을 이기지 못한다는 듯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반박하고 싶었다. 네 말은 틀렸노라, 너는 철저한 악이며 우리는 자랑스러운 선이라고.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르네거로 인해 마음에 일었던 의문의 파동이 가라앉지 않은 탓이다.
-신께서는 우리를 선이라 칭하지 않았고, 그들을 악이라 칭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가 확신에 차 뱉었던 말이 귓바퀴를 가득 채웠다. 말을 떨쳐 내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뇌리에 박힌 말이 다시금 재생되었다.
-그러니 이 세계에는 선과 악이 규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지요.
피에라는 주먹을 바르쥐었다.
아니, 아니. 그것은 틀렸다.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외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정을 해 버린 탓일 수도 있었다. 그녀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후우.
피에라는 숨을 몰아쉬었다. 들어 올렸던 어깨를 떨어뜨린다. 눈가에 바짝 힘을 준다.
“피에톤을 보낼 수는 없소.”
“너희가 죽이려고?”
“……피에톤은.”
그녀는 피에톤을 바라보았다. 짓궂던 웃음이 지워져 있는, 매정한 표정의 그를.
“보낼 수 없소.”
그녀는 따라붙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말했다.
카리나의 미간이 깊게 좁혀졌다. 슬슬 짜증이 차오르는 것처럼 보여, 르네거는 그들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피에라 님.”
르네거는 피에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죽음의 강에 서약한 맹세를 지키십시오.”
“그것은……!”
“맹세를 어긴다면 신을 배신하는 것.”
그는 피에라의 어깨를 붙잡았다. 단단한 힘이 들어간 손이 느껴졌다.
“부디 옳은 선택을 하시길 바랍니다.”
피에라는 으득 어금니를 물었다.
반박하고 싶었으나 할 말이 존재하지 않았다.
말장난이건 무엇이건 맹세는 스스로가 한 것이었으니까. 전적으로 자신의 탓이었다.
그러해도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을 테다.
그녀는 한숨을 내뱉으며 몸에 주었던 힘을 풀어냈다.
이때였다.
“수장님!”
벌컥 문이 열리더니 마법사들이 뛰쳐 들어왔다.
“크, 큰일 났습니다!”
그들은 허옇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공포와도 비슷한 감정이 그들의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피에라는 놀랍게도 의연했다.
무어가 됐든 지금의 상황보다 더 큰일이 있을까, 그리 자조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오? 진정하고 말해 보시오.”
꿀꺽.
마법사들은 침을 삼키며 호흡을 정돈했다.
“데이펜의 수장께서 위험을 알리셨습니다!”
“아포칼리타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뭐?
피에라는 곧장 창문으로 뛰어갔다. 창밖을 내다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새까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기를 감싸고 있는 시푸른 바람과 새빨간 불꽃이…….
“당장 병력을 모으시오. 지금!”
피에라는 빠르게 명령을 내리며 그녀 역시 로브를 걸쳤다.
“그대 때문이오?”
피에라는 카리나를 향해 말했다. 르네거와 함께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카리나는 그제야 느리게 시선을 돌렸다.
“그대 때문에 저 아포칼리타가 온 것이냐 물었소.”
거짓말을 할까, 진실을 말할까. 카리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이내 생각을 정한 듯 생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면 뭐라 할 거니?”
“그대 때문에 온 것이오?”
“그래. 맞아.”
피에라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녀는 꽉 쥔 주먹을 풀지 않은 채로 카리나를 주시했다.
카리나에게 속아 넘어간 것에 대해 화가 나 있는 피에라였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감정일 뿐이었다.
르네거의 말마따나 자신은 죽음의 강에 맹세를 하였고, 그것을 지켜야 했다.
그러니.
“우리의 사명은 아포칼리타를 숙청하는 것. 더불어 그대와 동맹을 맺었으니.”
카리나 아포칼리타의 손을 뿌리칠 수는 없다고.
“한 마리씩 상대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피에라는 로브의 앞섶을 여미며 방을 빠져나갔다.
원작에서 올곧은 이라 서술되어 있었던가.
정의를 알고 불의를 못 본 체하지 못하는 이라 하였던가.
그 서술이 딱 들어맞는 인간이라고.
그래서 밉다가도 더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고.
카리나는 피에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 * *
‘엉망이네.’
카리나는 하늘 높은 곳에 떠올라,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움푹 파인 구덩이 수 개가 보였다. 불꽃의 흔적은 페넬로피의 것일 테고 검 자국은 아포칼리타의 것일 테다.
아포칼리타 중에 검을 쓰는 이가 누구였던가. 카리나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쯧. 지긋지긋한 놈들 같으니라고.]
카리나의 목을 감싸고 있던 히론의 말이었다.
그는 하품을 크게 하며 꼬리를 달달 떨었다.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좀 일어나지? 정신 차리고?”
[노력하는 중이다.]
히론은 재차 하품을 했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흠, 꽤 축축하군.]
“맞아. 습해.”
카리나는 공기 중에 가득한 물기 어린 기운을 느끼며 생각했다.
훅 숨을 들이켜니 짠 내까지 풍겨졌다. 마치, 바다에 빠진 것처럼.
[이런 느낌을 주는 놈은 한 놈밖에 없었다만.]
히론은 목을 쭉 잡아 빼며 말했다. 카리나는 날개를 퍼덕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아, 제발. 걔라고 하지 말아 줘.”
[너도 짐작하고 있지 않느냐?]
히론은 피식 웃으며 한 곳을 가리켰다. 검 자국이 자욱한 구덩이였다.
[저 쌍검 자국을 본다면 말이다.]
“다른 애일 수도 있잖…….”
쾅!
카리나는 빠르게 공중제비를 돌아 날아오는 일격을 피했다.
하지만 완전히 피하지 못해, 뺨에 길쭉한 상처가 났다.
카리나는 한숨을 뱉으며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아. 정말 짜증 난다.”
지상에는 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아포칼리타가 있었다.
케투스.
케투스 아포칼리타.
“오랜만이야, 카리나.”
자일의 개가 된 아포칼리타 중 하나였다.
“보고 싶어서 뒈지는 줄 알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