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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89화 (89/135)

89화

케투스 아포칼리타.

괴물 고래와 합쳐진 실험체.

원작에서 피에톤을 죽이는 게 케투스였지.

그나마 다행인 건 피에톤과 르네거를 붙여 놓았다는 걸까. 카리나는 쯧 혀를 차며 날개를 퍼덕였다.

그녀는 해야 할 일이 많은 상태였다. 이제 캄바이트와 동맹을 맺었으니 사도를 찾는 것부터 시작해 신자를 모아 세력을 키워야 하는데.

아포칼리타의 습격이라니.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겠지. 카리나는 그리 생각하며 케투스를 노려보았다.

케투스는 그런 카리나와 눈을 마주하며 양손에 들고 있는 쌍검을 아래로 내리뻗었다.

“네가 없는 탑이 얼마나 조용했는지 너는 모를 거야.”

그녀의 높게 묶은 하얀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왔다. 새까만 피부는 반짝이며 매끄럽다. 손과 발에 돋아 있는 지느러미가 돋보였다.

“그래서 네가 정말 보고 싶었는데…….”

케투스는 은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노후했다.

“왜 그렇게 발악을 하고 다녀. 얌전히 탑으로 돌아와야지. 네가 있어야 할 곳이잖니.”

챙!

케투스의 검기가 곡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카리나는 가볍게 몸을 틀어 그를 피했으나, 검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검기는 부메랑처럼 돌아 카리나에게로 되돌아왔다.

아, 짜증 나.

카리나는 손을 뻗었다.

피융!

뽑혀 나간 검은 기운이 검기를 감싸 안았다. 아작아작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카리나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케투스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보고 싶은 건 자일과 내가 싸우는 장면이었겠지.”

“어머, 당연한 거 아니야?”

“내게는 별로 당연한 일이 아니라서.”

카리나는 케투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직 그녀의 손을 떠나지 않은 어둠이 케투스를 할퀴었다.

케투스는 발에 달린 지느러미를 이용해 공격을 피했다.

“느려졌네, 카리나. 안타깝게도.”

“닥쳐.”

카리나는 다시 한번 손을 휘둘렀다. 케투스는 이번에도 발을 굴렀으나 날아간 히론이 먼저였다.

[얌전히 있거라.]

“윽!”

히론은 케투스의 발목을 묶었다.

챙!

표창처럼 날카로워진 카리나의 힘이 그녀의 어깨에 박혔다.

“아이씨, 진짜.”

케투스는 몸을 비틀었다. 카리나는 빠르게 히론을 거두며 그녀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저 뱀 새끼 좀 죽이면 안 돼? 사사건건 정말 짜증 나게 하네.”

[아서라, 물고기야. 넌 내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

“저 빌어먹을 혀를 잘라 버리면 마음이 풀릴 것 같은데.”

케투스는 번들거리는 눈을 번뜩였다.

카리나는 힘을 쏘아 그녀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촤악!

그녀의 몸이 저 끝까지 밀렸다.

“내 히론에게 감히.”

카리나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널브러진 케투스는 그런 카리나를 올려다보며 크게 웃었다.

“하긴. 넌 예전부터 저 뱀 새끼를 건드리면 화를 냈지.”

그녀는 묻은 먼지를 툴툴 털며 일어섰다.

“그래서 자일이 저걸 괴롭히는 걸 좋아했지. 네가 화내는 꼴을 보는 게 즐겁다면서 말이야.”

“제정신이 아닌 놈의 행동을 굳이 기억해 줄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나도 마찬가지인걸.”

케투스의 지느러미가 파르르 경련했다. 그녀가 기분이 좋을 때마다 나오는 반응 중 하나였다.

“너는 자일이 화를 내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서 그래. 매일매일 그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내 눈알을 뽑아 자일의 옆에 붙여 놓을 수도 있어. 그 정도란다.”

야, 이거 더 미쳐 버렸네.

카리나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찡그렸다.

“네 감상문 들어 줄 여유는 없어, 케투스.”

휘잉!

그녀는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리고 순식간에 낙하해 케투스의 머리 위에 바로 섰다.

“마지막 자비로 말할게. 난 더 이상 형제를 죽이고 싶지 않단다. 그러니 어서 돌아가렴.”

케투스는 고개를 올렸다. 카리나의 발을 바라본다. 잡아 보려 손을 뻗었지만 카리나는 그것을 가볍게 피했다.

“으음. 나는 그렇게 약하지 않은데.”

그래 봤자. 카리나는 피식 헛웃음을 뱉었다.

“자일의 이능이라도 이어 받았니?”

“그러지 않으면 네 능력에 돌이 되어 버릴 텐데, 당연히 받아야지.”

“그러게. 널 석상으로 만들어서 부숴 버리고 싶었는데 말이야.”

싸늘한 시선에 케투스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는 학습된 공포에서 비롯된 것. 그녀는 푸시시 웃으며 카리나의 그림자에서 벗어났다.

“뭐, 나도 내 목숨은 소중하니까.”

“알면 꺼지지 그래?”

“그래서 나름의 준비를 해 왔어.”

하아.

카리나는 이마를 짚었다. 무얼 준비했든 어차피 내가 승리할 것이다. 카리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친구들을 불렀거든.”

쿠구궁!

땅이 흔들렸다.

동시에 움푹 구덩이가 파였다. 그 아래에서 무언가가 움찔거렸다.

쾅!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곳에서부터 바닷물이 솟구쳤다. 더불어 그 바닷물을 먹고 사는 마물들까지도.

“이 정도면 비등할까?”

수백 마리의 마물들이 카리나를 향해 아가리를 벌렸다. 비린내가 코를 뜯을 듯 우악스럽게 풍겨 왔다.

* * *

“저건…….”

르네거는 저 멀리 카리나와 대치하고 있는 아포칼리타를 응시했다.

어디서 많이 본 이인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는 초점을 맞추겠다는 양 눈살을 찌푸렸다.

“케투스 아포칼리타.”

그의 옆에 서 있던 피에톤의 말이었다.

피에톤은 아래로 내려 묶은 녹색 머리카락을 빙빙 꼬며 말했다.

“고래랑 섞인 놈이야. 기억하나?”

그런 그를 힐끗 쳐다보던 르네거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앞을 응시했다.

어떤 말도, 표정도 없다. 그저 무정할 뿐.

피에톤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야. 너 아직도 나 싫어하냐?”

그는 르네거의 팔을 붙잡았으나, 르네거는 그의 손이 닿자마자 곧장 뿌리쳤다.

“이곳에 계십시오. 귀찮게 따라오지 말고.”

“아, 진짜. 너 계속 이럴 거야?”

피에톤은 왈칵 성을 냈다. 다시금 르네거에게 손을 뻗어 어깨를 붙잡았다.

르네거는 그의 손이 닿아 있는 제 어깨를 무심히 내려다보다, 이내 피에톤에게로 눈을 돌렸다.

“피에톤.”

그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가만히 두는 건, 카리나가 당신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르네거는 카리나의 앞에서 피에톤을 향한 분노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았었다.

그녀가 피에톤을 기꺼이 받아들인 만큼, 그녀의 선택에 영향을 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모두 다 카리나의 앞에서일 뿐.

그녀가 없을 때에 굳이 피에톤에게 상냥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녀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제 눈앞에서 멀쩡히 서 있지 못할 겁니다.”

그는 피에톤의 손을 뿌리치고 앞서 걸어갔다.

피에톤은 뿌리쳐진 손을 거둘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게 정말 르네거 라템이 맞는가?

껍데기만 뒤집어쓴 다른 이가 아니고?

“이야, 많이 변했네.”

그는 허무한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피에톤이 그런 생각을 하건 말건, 르네거의 발은 바쁘기만 했다.

그는 카리나가 보이는 방향 쪽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카리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하며 날아갔으나, 르네거는 묘한 불안함을 떨쳐 낼 수 없었다.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직감.

아니, 아니.

자신도 있을뿐더러 캄바이트의 마법사들이 곧 달려 나올 테니 승리에는 변함이 없으리라.

그는 애써 불안함을 억누르며 발을 재우쳤다.

그렇게 뛰어가던 중, 르네거는 자신이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뭔가를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잊고 있다,

무엇을?

대체…….

“…….”

르네거는 우뚝 발을 멈췄다. 그의 눈이 경악으로 물든다. 꽉 다물려 있던 입술이 벌어졌다.

그의 눈앞에는 두 명의 사람이 쓰러져 있다. 피 칠갑을 한 채, 정신을 잃고.

저 얼굴을 안다.

어찌 잊을 수 있는가.

“페넬로피!”

르네거는 악을 지르며 뛰어갔다. 머리가 새하얬다.

-데이펜의 수장께서 위험을 알리셨습니다!

왜 이 말을 잊고 있었을까.

아무리 라템을 뛰쳐나왔다 한들, 아무리 페넬로피와 대척점에 서 있다 한들, 그러해도 그녀는 어린 시절을 함께한 친구이자 가족이 아니던가.

그렇다고 해 과거처럼 돌아갈 생각은 결코 없었지만, 또한 그렇다고 해 죽기 전까지 다친 그녀를 내버려 둘 생각도 없었다.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감정인 연민까지 저버릴 수는 없었으므로.

그는 페넬로피를 붙잡았다. 그녀의 가슴에 귀를 대 본다.

다행히도 숨은 붙어 있었다. 르네거는 빠르게 성력을 발동시켰다.

“아파도 참아. 금방, 금방 나을 테니까.”

그의 성력이 살에 닿자, 페넬로피는 기겁하며 몸을 뒤틀었다.

“가만히 있어. 치료를 해야 할 거 아니야.”

르네거는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성력을 주입했다.

컥, 페넬로피의 입에서 핏덩이가 튀어나왔다.

페넬로피는 그제야 감았던 눈을 올려 떴다.

그녀는 멍하니 르네거를 바라보았다.

깜빡이는 눈 안에는 차마 이 상황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당황함이 담겨 있었다.

“……왜?”

그녀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번에 날 만나면 죽인다고 했잖아.”

르네거는 대답하지 않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성력을 쏟아 넣는다. 갈라졌던 페넬로피의 살이 조금씩 붙는 것이 보였다.

“그러니 다신 보지 말자고, 그랬잖아.”

“말하지 마. 움직이면 덧나니까.”

“그런데 왜 살려. 왜 치료를 하려 해. 난 네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

“페넬로피.”

“죽인다면서, 나를!”

르네거는 페넬로피의 상처에 두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분간이 힘들 만큼 일그러져 있는 페넬로피의 얼굴을 바라본다.

“놔.”

“더 해야 돼.”

“놓으라고 했어.”

페넬로피는 안간힘을 써 르네거의 손을 뿌리쳤다. 그녀는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르네거의 치료 덕분에 몸은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고맙지 않았다. 결코, 고마워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내가 불쌍해?”

그녀의 축축한 눈이 르네거에게로 닿았다.

“내가 아포칼리타와 어떻게 싸우는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거지?”

페넬로피는 피식 조소하며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힘없이 꺾인 목은 가긍하기 짝이 없다.

“봐. 이렇게 죽기 직전까지 싸워. 네가 없었다면 죽었겠지. 그래. 죽었을 거야.”

그녀는 피로 물든 제 두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니지, 너도 알겠지. 너도 한때는 이렇게 싸우던 신자였으니까.”

그녀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것. 이렇듯 신관들은 언제나 죽음을 곁에 두고 산다. 아포칼리타, 때문에.

“한데 넌…….”

페넬로피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르네거를 한껏 노려본다. 흰자가 새빨개질 때까지.

“아포칼리타에게 붙어 버렸네. 나는 이렇게 싸우고 있는데.”

손등으로 슥슥 눈을 닦은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제 꺼져. 난 아포칼리타를 죽이러 갈 거니까.”

페넬로피는 카리나와 케투스에게로 향했다.

쿠구궁.

흔들리는 대지와, 튀어나오는 마물들을 또렷이 주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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