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카리나는 제 발목까지 차오른 바닷물을 찰박거리며 나아갔다.
그녀의 주변에는 바다 마물이 가득하다.
괴기한 심해어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들은 카리나를 향해 양껏 아가리를 벌렸다.
하지만 달려들지는 않는다. 케투스가 그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리나는 마물들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케투스를 보며 사붓 미간을 좁혔다.
“자일의 능력이니?”
케투스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아니, 내 능력인데?”
카리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이 알고 있던 케투스는 이 정도의 실력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단순한 거대 고래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마물을 부릴 수 있는 거지? 카리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게리오네스의 마나핵을 가져왔거든.”
게리오네스라 하면 세 개의 머리에 세 개의 몸통을 지닌 괴물의 피를 이어받은 형제다. 그는 짐승을 모아 이끄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카리나의 입매가 그대로 굳었다.
그녀는 더욱 싸늘해진 시선으로 케투스를 주시했다.
“그를 죽였다는 말이니?”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마나핵을 가져올 수 있겠어.”
케투스는 킥킥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왼쪽, 오른쪽. 그녀의 지느러미가 있는 곳에 마나핵이 있다.
“나머지 하나는 없어. 자일이 부쉈거든.”
케투스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찡그렸다. 그러다 돌연 킥킥거리며 입을 틀어막는다. 카리나를 힐끗 힐끗 쳐다본다.
“하긴. 네 앞에서 주름을 잡았다. 너는 형제 열셋을 죽였는데.”
“그 입.”
피융!
카리나의 손에서 튀어나온 기운은 케투스의 귓불을 스쳤다.
“다물지 그래.”
따끔, 싶더니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케투스는 제 목덜미에 흐른 피를 닦으며 헛웃음을 뱉었다.
“뭐야, 왜 화를 내?”
케투스는 눈을 부라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난 카리나 네게 더 화가 나는데.”
구우웅.
마물들이 일제히 같은 소리를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카리나를 가운데에 두고 에워쌌다.
“자일이 그렇게 널 사랑해 주면 영광인 줄 알고 받아들여야지, 어딜 감히 네 주제에 자일을 거부할 수 있어?”
또 이 소리다. 카리나는 지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쯧 혀를 찼다.
대체 탑의 형제들은 왜 그렇게 자일을 좋아할까. 대체 그가 무어라고.
어쩌면 아버지를 향한 애정이 자일에게로 돌려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건대, 아버지보다 더 잔혹하고 끔찍한 이가 자일이었다.
아버지는 적어도 자애라는 것이 있었다면, 자일에게는 그마저도 없다. 그는 피에 미쳐 있는 살인귀. 그뿐이었으므로.
카리나는 비스듬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케투스를 빗겨 바라본다.
“너는 내가 자일의 옆에 붙어 그의 정기를 빨아먹고 살길 바라는 거구나. 그럼 네 기분이 참 좋겠네. 자일이 뒈지는 꼴도 보고 말이야.”
“카리나!”
쾅!
그녀가 발을 구르자 거대한 물보라가 일었다. 발목까지 차올랐던 바닷물은 모조리 케투스 쪽으로 몰려갔다.
마치 단층을 쌓듯 켜켜이 쌓인 물은 거대한 파도의 형상을 띠었다.
“적당히 말로 해서 못 알아들으니, 힘을 쓸 수밖에 없네.”
“진즉 그렇게 하지 그랬어.”
“나불대는 것도 지금이 끝일 거야.”
말을 끝으로, 거대했던 파도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카리나가 날개를 펼칠 새도 없이 쏟아진 파도는 그녀의 몸을 덮쳤다.
-꿰애액!
마물들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그들은 바닷물을 가르며 카리나가 있던 곳으로 뛰어갔다.
쾅, 콰앙!
굉음이 울려 퍼졌다. 마물들은 바닥이 파이고 또 파일 정도로 그곳을 후려쳤다. 하지만.
쏴아아.
파도가 물러난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카리나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체 어디에.
초조해진 케투스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사방으로 굴러간다.
“끝이니?”
흐읍.
케투스는 숨을 들이켰다.
제 바로 뒤에서 카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서늘한 감촉이 목덜미에서 느껴졌다. 카리나의 날카로운 손톱이었다.
“고작 이런 힘을 가지고 날이기려 했다니.”
카리나는 피식 조소했다.
케투스는 강했다.
하지만 카리나가 더 강했다.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몸이었지만, 적어도 루나와 싸울 때보다는 양호한 터.
케투스 따위를 이기지 못할 바가 아니었다.
“자일도 참 불쌍하지. 이런 버러지들에게 능력을 나눠 주고 말이야.”
카리나는 케투스의 검은 목을 손톱으로 긁으며 말했다.
“아프지 않게 해 줄게.”
손톱 끝에 핏방울이 맺혔다. 살갗을 가르고 움푹 들어오는 통증에 케투스는 억억 소리밖에 낼 수 없었다.
이때였다.
피융!
“쿨럭!”
[카리나!]
카리나는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갑작스레 공격이 날아온 탓이다.
오직 케투스에게만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던 그녀였기에, 느닷없이 날아온 공격을 막을 재량이 없었다.
아아, 신음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타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제 가슴을 뚫고 나온 붉은 화살이 보였다.
붉은 화살.
이는 분명…….
“페넬로피.”
카리나는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파르르 떨고 있는 페넬로피가 서 있었다. 아아, 카리나는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나, 나는…….”
그녀는 경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손발을 바들바들 떨며 말을 더듬었다.
“자, 잘못 조준한 거야. 네게 하려던 게 아니었어. 난 저 아포칼리타를 공격하려 한 건데.”
진심이었다.
카리나와 케투스의 전투를 본 페넬로피는, 당연히 카리나를 공격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카리나가 승기를 잡고 있는 터. 그녀와 함께 케투스를 공격해야 하는 게 옳았다.
그래서 케투스를 향해 화살을 쏘아 낸 것인데.
카리나가 맞을 줄은 몰랐다. 아니, 그녀가 그렇게 갑자기 튀어나올 줄은 몰랐단 말이다!
‘정말?’
정말 몰랐는가? 카리나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지 않았던가? 정말,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던가?
“아니야!”
페넬로피는 소리쳤다. 덜덜 떨리는 걸음으로 카리나에게 다가간다.
“괘, 괜찮은 거야?”
[카리나! 정신을 차려 보거라!]
카리나는 몸을 웅크리고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이 낯선 페넬로피로서는, 흔들리는 시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달달 떨려 왔다.
“뭐야.”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쇠끼리 부딪치는 듯 차갑고 서늘한 음성. 이는 분명,
“살아 있었네?”
자신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아포칼리타, 케투스였다.
그녀 역시도 부상을 입었다.
목에서 콸콸 흐르고 있는 피를 보아하니 지혈이 되지 않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러해도 그녀는 아포칼리타였다. 쉬이 죽지 않는 아포칼리타.
제대로 된 몸 상태일 때도 그녀를 이기지 못했던 페넬로피였다.
팔다리를 움직이는 게 불편한 지금, 패배할 것은 자명했다.
“카리나와 아는 사이 같기도 하고…….”
케투스는 비죽 웃으며 눈을 들어 올렸다.
“둘 다 죽이면 되겠네.”
탁, 그녀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 즉시 마물들이 몸을 일으켰다. 카리나와 페넬로피를 향해 달려온다. 카리나는 그때까지도 몸을 가누지 못했다.
[카리나야. 일어나 보거라!]
페넬로피는 정신을 다잡았다. 후우, 후. 숨을 가다듬으며 두 다리에 힘을 준다.
마물 정도는, 내가 이길 수 있어.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정신을 집중했다. 두 손에 불의 기운을 모은다. 새빨간 구체가 손끝에 맺히기 시작했다.
회복되지 않은 내장에서 꿀렁꿀렁 피가 솟구쳤다. 온몸이 갈가리 찢기는 통증이 찾아왔다. 그렇지만 무너지지 않는다. 페넬로피는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그보다 카리나의 힘이 먼저였다.
콰앙!
카리나는 마물들 한가운데에 검은 구덩이를 만들었다.
-꿰에엑!
구덩이 근처에 있던 마물들은 채 반항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끌려 들어갔다.
마치 개미지옥에 빠진 듯한 광경이었다.
페넬로피는 겁에 질려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페넬로피.”
카리나는 그런 페넬로피의 어깨를 붙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꺼져.”
그녀는 싸늘한 시선으로 페넬로피를 내려 보았다.
“방해되니까.”
후우.
카리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통증이 만연했으나 이 정도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터.
카리나는 양팔을 아래로 벌렸다.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새까만 기운이 손가락과 손바닥을 채웠고, 손을 따라 팔까지 번져 어깨와 가슴을 뒤덮었다. 몸 전체가 어둠에 잠식되었다.
우웅, 우우웅.
기이한 소리가 너른 벌판을 가득 채웠다.
카리나의 몸 역시 점점 더 짙어졌다.
마치 지옥의 색처럼, 죽음의 색처럼 새까매진 그녀는 이승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았다.
피융!
어둠이 순식간에 카리나의 몸에서 뽑혀지듯 올라와 커다란 구체가 되어 그녀의 머리 위에 떠올랐다.
“케투스.”
사방을 훑던 무심한 눈동자가, 곧 케투스에게로 닿았다.
“널 죽일 생각은 없었다만.”
카리나는 그녀가 흘리고 있는 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미안. 내가 힘 조절을 못 해.”
콰앙!
대지가 갈라졌다. 갈라진 틈을 따라 어둠이 흘러나왔다.
“잘 피해 보렴.”
그리고.
수백 마리의 언데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