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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91화 (91/135)

91화

“잘 피해 보렴.”

수백 마리의 언데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리나는 그제야 입술을 비틀었다.

피로 점철된 얼굴에서 유일하게 어긋나 있는 비소는 그 무엇보다 악독해 보였다.

콰과광!

언데드들은 마물에게 달려들었다.

마물의 덩치보다는 한참 작은 언데드지만, 하나하나가 뛰어난 생명이었던 터.

그들은 조금도 밀리지 않으며 마물들과 대적했다.

“카리나! 이 망할……!”

케투스의 비명 섞인 외침이 들렸다.

카리나는 그녀를 향해 조금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아니, 주지 못했다.

[괜찮은 것이냐? 무리하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

호기롭게 언데드를 소환했으나, 부상을 입은 그녀의 몸으로는 무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통증을 호소했다.

만약 케투스에게 당했다면 이 정도까지 몸이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름 아닌 페넬로피의 힘이었다. 카리나와 상극 중의 상극인 페넬로피의 힘.

그렇기에 카리나는 쉬이 회복할 수 없었다. 고통이 거세진다.

[어떻게, 그만하거라. 응? 여기서 더 하면 정신을 잃을지도 몰라!]

히론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만큼 정신이 흐려지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카리나는 이를 꽉 깨물며 가슴을 일으켰다.

입안에 고인 끈적한 침을 삼키며 허리를 편다. 그녀는 주먹을 바르쥐었다.

“난 괜찮아.”

[카리나야. 제발!]

“나는.”

후우.

카리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 올려 뜬다. 뻑뻑한 눈알에 시야가 건조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페넬로피와 눈을 마주했다.

“괜찮으니까.”

카리나는 페넬로피가 죄책감을 갖길 바랐다.

공격이 실수였건 의도한 것이었건, 자신이 그녀 때문에 이렇게도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길 바랐다.

그래야…….

‘나에 대한 분노가 아포칼리타에게 돌아갈 테니까.’

어쨌든 아포칼리타의 멸망에 주축이 되는 건 페넬로피라고. 카리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두 눈에 바싹 힘을 주었다.

이때였다.

피융!

날카로운 힘이 카리나의 어깨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카리나는 빠르게 날개를 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아 날아오를 수가 없었다.

“죽어! 죽어!”

케투스의 외침과 동시에, 화살처럼 날카로운 힘이 수없이 달려들었다.

이런 젠장.

카리나는 빠르게 결계를 펼쳤다. 페넬로피가 있는 곳까지 닿는 것이 힘들었으나 그러해도 성공했다.

쿵, 쿠웅.

케투스의 공격에 맞은 결계가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콜록…….”

카리나는 울컥 피를 토했다. 바닥을 까득 긁으며 정신을 부여잡는다.

조금만, 아주 조금의 시간만 있다면 몸은 회복될 텐데.

페넬로피가 시간을 벌어 줄 수 있을까?

카리나는 페넬로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허망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를, 뻐끔거리며 말을 고르지 못하고 있는 그녀를.

‘안 되겠네.’

카리나는 이를 꽉 깨물며 정신을 집중했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저가 고래 새끼에게 지는 것은 면이 서지 않았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조금만 더 버티면 돼.

그러니까,

[르네거 놈은 대체 언제 오는 것이냐!]

르네거가 올 때까지.

카리나는 스스로의 생각에 놀란 듯 눈을 다소 크게 올려 떴다.

“하…….”

그러곤 헛웃음을 내뱉었다. 스스로가 너무도 우스웠기 때문이다.

믿지 않노라고, 감정이란 쉬운 것 따위는 결코 믿지 않노라고 다짐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르네거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그가 달려와 저를 도와줄 것이라 생각하는 게 아니던가.

카리나는 헛헛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오래전, 르네거와 첫 맹약을 맺을 때를 떠올렸다.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오기 전에, 당신을.

그때의 네가 이런 마음이었을까. 아니, 이보다는 더 짙지 않았을까.

쾅, 쾅!

공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케투스의 소란스러운 목소리도 연이어 들려왔다. 그렇지만 카리나는 버텼다.

믿을 수 있는 게 있었으므로.

그래. 믿는 이가 있었으므로.

그녀는 결계 바깥에 서 있는 케투스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케투스는 이미 승리라도 한 양 비죽배죽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저앉아 있는 카리나와 우뚝 서 있는 케투스. 이 모습만 본다면 승패는 명확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꺄아악!”

그녀의 어깨가 그대로 잘려 나갔다. 피로 범벅이 된 새까만 검이 그녀의 몸을 뚫고 튀어나왔다.

“카리나!”

르네거였다.

그녀를 구하러 온.

* * *

페넬로피가 뛰쳐나간 후, 그녀를 뒤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르네거였지만 쓰러져 있는 아힌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는 아힌까지 대강의 치료를 마친 후에야 발을 떼어 낼 수 있었다. 때마침 캄바이트의 마법사들도 출병해 그들과 함께 움직였다.

하지만 그때.

번쩍, 새빨간 불꽃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설마.

내가 불안했던 이유는,

‘어쩌면 페넬로피가 카리나를…….’

르네거는 그때부터 성검을 쥐고 뛰기 시작했다.

마물들이 그의 앞을 막았으나 그의 발을 막을 만한 적수는 되지 못했다.

카리나의 것으로 추측되는 언데드들이 보였다. 언데드까지 소환할 정도라면 문제가 생긴 것일 터.

르네거는 더욱 발을 재우쳤다.

그리고.

“…….”

결계 안에 갇혀 있는 카리나가 보였다. 그녀의 옆에 페넬로피도 있었으나 르네거는 알아채지 못했다.

르네거의 눈은 오로지 카리나에게만 붙박였다.

르네거의 꽉 다물린 턱이 사붓 떨렸다.

스며든 분노가 그의 너른 어깨를 옥죄었다. 솟구치는 화가 그가 달려나가도록 부추겼다.

“꺄아악!”

르네거는 지체 없이 케투스의 어깨를 베었다.

잘려 나간 팔을 짓밟으며 그녀의 등에 검을 내리꽂았다.

촤악!

케투스의 몸을 관통한 검을 뽑아 낸 그는 곧장 카리나에게로 달려갔다.

“카리나!”

결계가 허물어졌다. 르네거의 평정심도 함께 허물어졌다.

[늦었다! 왜 이렇게 늦은 것이냐!]

히론의 말대로, 르네거는 어쩌면 늦은 것일 수도 있었다.

카리나의 몸 상태는 좋지 않았다. 자잘한 상처 같은 것은 없다. 다만 가슴이 뻥 뚫려 있을 뿐.

그녀 특유의 회복력은 전혀 들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 상처의 원인은.

“……페넬로피.”

원망 섞인 시선이 페넬로피에게로 닿았다.

페넬로피는 입을 뻐끔거렸다.

고의가 아니라고, 실수일 뿐이었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말은 입안을 맴돌 뿐이었다. 차마 흘러나오지 못한다.

르네거는 그런 페넬로피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지금은 그녀를 탓할 때가 아니었다.

“카리나. 제게 기대십시오.”

그는 카리나의 몸을 일으켜 제 어깨에 얼굴을 기대게 만들었다.

쌕, 쌔액.

가파른 숨이 여과 없이 느껴졌다.

르네거는 카리나의 양 뺨을 붙잡았다. 그리고 주저하지 않고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새하얀 힘이 입을 타고 넘어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기도를 타고 흘러내려 왔다.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쾅쾅 뛰던 심장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하아…….”

카리나는 숨을 토하며 정신을 되찾았다.

가슴을 만져 본다. 일전보다 격한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느리게 눈을 들어 올렸다. 미안함이 다분한 르네거의 얼굴을 바라본다.

“늦었어.”

르네거는 입술을 짓씹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늦었어.”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우묵 파인 눈매가 축축해지는 게 보였다. 금방이라도 부풀어 터질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카리나는 낮게 웃으며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기다렸어.”

그의 눈이 커졌다.

들은 말을 되짚어 보며, 눈을 꽉 내려 감는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

하지만 왜일까.

왜 기쁘지 않을까.

그녀를 아프게 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르네거는 카리나의 손을 붙잡았다. 깍지를 꽉 끼며,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앞으로는 기다리는 일이 없게 할 겁니다.”

손등에 입을 맞춘다. 건조하지만 부드러운 입술이 살결을 간지럽혔다.

카리나는 그제야 노곤해진 마음을 느끼며 몸에 힘을 풀었다.

이때였다.

“하, 하하…… 하하…….”

케투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카리나.”

그녀는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리나 아포칼리타!”

아악!

케투스는 재차 소리쳤다.

한쪽 팔이 없는 몸을 간신히 일으킨다. 바들바들 떠는 다리로 한 걸음씩 발을 내디뎠다.

“어째서 너만 그런 삶을 누리는 거야?”

음성에는 분노가 있었다. 동시에 책망도 있었다.

“어째서 너만 그렇게 행복한 건데? 어째서! 형제를 죽여 놓고, 아버지를 죽여 놓고, 가질 것은 다 가져 놓고서 도망친 주제에 왜! 너 따위가!”

그녀는 목구멍을 긁으며 소리쳤다.

시뻘게진 흰자가 돋보였다. 은색 눈동자에 질투와 시기 같은 검은 감정이 스쳤다.

“용서 못 해. 넌 아포칼리타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눈 깜짝할 새, 그녀는 카리나에게로 달려들었다.

카리나의 손을 낚아챈다. 르네거와 잡고 있던 손이 삽시간에 빠져 버렸다.

파앗!

빛무리가 퍼졌다.

르네거와 페넬로피는 동시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눈을 올려 떴을 땐.

“카리나?”

카리나와 히론. 그리고 케투스까지 모두 다 사라져 버렸다.

“카리나!”

르네거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딜 보아도 카리나는 없다. 그녀가 부리는 언데드마저 사라졌다.

-꿰에에!

언데드와 싸우던 마물은 상대가 사라지자마자 다른 상대를 찾았다.

그들은 곧장 르네거에게로 뛰어왔다.

달려오는 마물들 사이사이를 바라보며, 르네거는 카리나의 흔적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는 없다.

사라져 버려…….

쾅!

르네거는 성검을 그대로 땅에 내리꽂았다.

쿠웅!

엄청난 진동이 온 벌판을 뒤흔들었다.

땅을 딛고 있던 마물들은 그대로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이제 그를 괴롭히는 것은 없다.

케투스도, 마물도.

하지만 카리나마저 사라졌다. 사라져, 버렸다.

하, 하하.

르네거는 헛웃음을 뱉었다. 허청거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는다.

얼굴을 쓸어내린다. 축축한 기운이 손바닥에 묻어났다.

-사라진다면, 넌 날 찾으러 올 거니?

카리나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지. 그에 나는 무어라 답을 했던가.

그는 그녀에게 단언했던 말을 찾기 위해 기억을 더듬었다.

-당신이 죽는다 한들 찾아갈 겁니다. 죽음의 강을 건너서라도.

“…….”

르네거는 두 주먹을 바르쥐었다. 결연한 다짐이 그의 얼굴을 가득 채웠다. 시푸른 눈동자에 화기가 들어찼다.

“어디든 저승보다는 가깝겠지요.”

8장 뒤쫓는 삶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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