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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92화 (92/135)

92화

휘이잉.

메마른 바람이 불어왔다. 지평선의 끝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은 너른 벌판을 내리훑으며 쏟아졌다.

마물의 시체는 없다. 르네거가 폭발시킨 힘으로 인해 모두 가루가 되어 버린 탓이다.

하지만 핏자국은 점점이 남아 있다.

페넬로피의 것, 아힌의 것, 케투스의 것, 그리고 카리나의 것.

“…….”

르네거는 꽉 쥐었던 손을 천천히 풀어냈다.

케투스가 카리나를 어디로 데리고 갔는지는 당연히 예상할 수 있었다.

-넌 아포칼리타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말인즉, 아포칼리타의 탑으로 간 것이었다.

그렇다면 르네거로서는 그들을 쫓을 방도가 없었다.

아포칼리타의 탑은 세계의 끝에 존재했고, 세계의 끝을 아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샐러딘.’

그가 알고 있을 것이다.

-사도를 찾으면 캄바이트 근처로 오렴. 네 기척을 느끼면 내가 마중 나갈 테니.

카리나의 말을 똑똑히 기억하는 그였다.

샐러딘은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때에 그를 만나 탑의 위치를 물으면 된다 생각이 들었으나.

‘대체 언제?’

으득.

르네거는 이를 갈았다.

지금도 카리나는 고통받고 있을 터. 시간이 없다.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머리가 바삐 굴러간다.

“르네거.”

그런 르네거의 상념을 멈춘 건 페넬로피의 목소리였다.

르네거는 그제야 멀리 내던졌던 시선을 되돌렸다. 그녀를 내려다본다.

“……내가.”

페넬로피는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일부러 한 게 아니야.”

이는 반드시 말해야 했다. 실수였다고. 실수로 카리나 아포칼리타에게 화살을 쏘아 버린 것이라고.

자신은 정말,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페넬로피는 진실된 얼굴을 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가는 불그스름했으며, 입술 끝은 축 처져 있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르네거의 시선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 매정한 것도 아니다. 그저 그는 페넬로피에게 아무 감정이 없어 보였다.

일전에 그녀를 치료해 주었던 것은 정녕 도의였다는 듯이.

그렇기에 페넬로피는 더 절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르네거에게 비겁한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와 아무리 멀어졌다 한들 자신의 존재가 오염되길 바라는 건 아니었으니까.

“믿는 거지? 날 의심하는 건 아니지?”

그녀는 재차 채근했다. 르네거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네 말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어.”

믿는다, 와 믿고 있다, 의 차이란 얼마나 아득한가.

페넬로피는 표정을 채 갈무리하지 못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두 손을 맞잡는다. 상처가 가득한 피부가 보였다.

과거의 르네거였다면 자신이 알아차리기 전에 치료를 해 주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는 이미…….

‘나와 멀어져 버린 사람이니까.’

페넬로피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간 얼마나 부정하고 또 부정했던가.

르네거는 돌아올 수도 있다고, 혹은 르네거는 영영 떠나 버린 거라고.

르네거는 아포칼리타에게 홀린 죄밖에 없다고, 혹은 르네거는 스스로 신을 배신한 죄인이라고.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바뀌는 마음을 종잡을 수 없어 괴로워하던 그녀였다.

그러나 이렇게 다시 르네거를 만나게 되니, 이제야 현실이라는 것을 체감하게 되었다.

현실, 현실.

믿고 싶지 않아도 믿어야 하는 현실.

르네거는 더 이상 과거의 그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

그녀는 울컥 차오르려는 마음을 꽉 억눌렀다. 르네거를 올려다본다.

“카리나 아포칼리타는 어디로 간 거야?”

르네거의 눈매가 사붓 굳었다. 그의 시푸른 눈동자에 차가운 이채가 스쳤다.

“……그건.”

그는 느린 숨을 내뱉었다. 들끓는 속에서부터 올라온 뜨거운 열기가 퍼졌다.

“내가 해결할 일이야.”

그는 말을 마치며 뒤를 돌았다. 일단은 마탑으로 돌아가 상황을 파악해 봐야 할 듯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뒤를 돈 순간.

“피에라 님?”

수백 명의 마법사들과 피에라를 볼 수 있었다. 따라온 피에톤까지도.

그들은 모두 멍하니 르네거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놀라고, 경악한 얼굴들.

이는 르네거가 마물들을 한꺼번에 해치우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검으로 땅을 내려치는 모습은 고대 설화 속 영웅 같았고, 폭발하여 땅이 뒤틀리던 장면은 고대 설화 속 전투와도 같아 보였다.

그의 몸은 온통 마물의 검은 피와 새빨간 피로 점철돼 있었지만, 역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가 품고 있는 시푸른 눈동자만큼은 지극히도 뚜렷했기 때문이다.

정녕.

저자가 르네거임이 맞는가.

그가 이렇게도 강했던가.

지금의 그는 마치…….

‘아포칼리타처럼.’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르네거가 아무리 라템을 배신했다 한들 바다신의 아이가 아닌 것은 아니었으므로.

“……카리나 아포칼리타가 사라진 것을 우리도 보았소.”

개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피에라의 말이었다. 그녀는 르네거를 향해 손수건을 건네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미안하오. 오는 길에 마물을 만나.”

“이해합니다.”

르네거는 곧장 대꾸했다. 그에 피에라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아침께 보았던 그와 같은 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온도의 차이가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카리나 아포칼리타가 없는 르네거는 이런 모습인 것인가.’

피에라는 르네거의 면면을 살피며 생각했다.

“페넬로피가 많이 다쳤습니다. 오는 길에 아힌 경도 있었고요. 그들을 치료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럴 생각입니다.”

르네거는 가볍게 목례한 후 피에라를 지나쳤다.

사람들의 관심이 귀찮기만 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저런 것이 아니지 않은가.

카리나를 구해야 한다.

그러려면 아포칼리타의 탑의 위치를 알아야 하고,

또한 그러려면 샐러딘과 연락이 닿아야 한다.

대체 어떻게…….

우뚝.

르네거는 자신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그리고 빗겨 서 있는 피에톤을 바라보았다.

피에톤은 살육의 현장인 벌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득 시선을 느낀 양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르네거를 보며 인상을 찌푸린다.

“뭐, 왜. 나한테 할 말 있어?”

르네거는 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피에톤은 움찔거리며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르네거는 피에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이거.”

그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전령새를 보고 있었을 뿐.

“쓸 수 있습니까?”

* * *

“쿨럭!”

카리나는 몸을 웅크리며 울컥 피를 토했다.

르네거에게 치료를 받긴 했으나 그 역시 응급 처치였을 뿐이니까.

페넬로피에게 당한 내상은 쉬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었다.

[괜찮은 것이냐? 어디, 얼굴 좀 보여 다오.]

히론은 꼬리로 카리나의 턱을 들어 올리며 걱정스레 말했다.

카리나는 그런 다정한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지막한 웃음을 짓는다. 그러며 손을 들어 히론을 쓰다듬으려 했다.

‘손?’

카리나는 제 손을 붙잡고 있는 무언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런.”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카리나의 손을 잡고 있는 건 케투스였고, 그녀는 죽어 있었으니까.

하아.

카리나는 깊은 한숨을 뱉으며 눈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내가 멋대로 굴지 말라고 했잖아.”

그녀는 이미 생명이 끊어져 버린 케투스를 보며 자조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왜, 함부로 덤벼서 죽기까지 하니.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입술을 잘근 씹는다.

케투스의 시체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답답했다. 텁텁한 느낌이 목 끝까지 치달았다.

그녀는 다시 한번 기침을 뱉으며 어깨를 달싹였다.

[동정할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그보다 네 몸을 먼저 살펴보거라. 어디 심각한 데가 없는지.]

히론은 그런 카리나의 뺨을 꼬리로 밀며 말했다. 카리나는 그제야 표정을 풀고 입술을 당겼다.

“다행히도 괜찮아. 가슴이 좀 아픈 것 빼고는.”

[그 망할 데이펜 계집 때문이다!]

“실수였다잖아.”

아마도.

카리나는 피식 조소하며 이마를 짚었다. 두통이 찾아와 이마가 지끈거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케투스를 내려다본다. 만신창이의 몸을 하고 있는 그녀를.

그녀의 오른팔에 있던 마나핵은 르네거에게 잘려 사라졌고, 심장에 있던 마나핵도 르네거에게 꿰뚫려 사라졌다. 마지막 왼팔에 남은 마나핵은…….

‘어디로 간 거지?’

카리나는 제 손을 잡고 있는 게 케투스의 왼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찌푸린다.

“설마.”

그녀는 케투스의 팔을 더듬어 보았다. 마나핵은 역시나 없다. 조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

“마나핵으로 워프를…….”

카리나는 번뜩 고개를 들었다.

음습한 공기가 그녀 주변을 가득 메웠다. 퀴퀴한 냄새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

왜 이제야 알아챘는가?

이곳이 어디인지를.

“……아포칼리타의 탑.”

그녀는 흡 숨을 들이켰다. 아니, 믿을 수 없다. 믿고 싶지 않았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시야가 어지러웠다. 손과 발이 달달 떨려 제대로 된 사고조차 할 수가 없었다.

[카리나, 정신 차리거라!]

히론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그녀는 정신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내가 이곳을 어떻게 도망쳤는데.

이렇게 붙잡힐 수는 없다.

도망쳐야……!

“카리나.”

이때, 그녀의 뒤편에서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정글의 짐승처럼 웅장하고 느른한 음성이었다. 카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일.”

예상한 듯, 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카리나는 까득 손을 말아 쥐었다.

“오랜만이군.”

자일은 피식 입술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온다. 카리나는 그의 걸음을 지켜보다 시선을 올렸다.

“미친 새끼.”

우뚝.

그의 발이 멈췄다. 카리나는 더욱 신랄한 목소리로 그를 비난했다.

“케투스의 목숨을 이용해서 나를 데리고 와? 네가, 네가 그러고도 수장이라 할 수 있니? 네가 제정신이야?”

자일은 그런 카리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언제부터 그렇게 형제들의 목숨에 관심이 많았지?”

그는 카리나의 앞에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손을 들어 그녀의 턱을 잡아당긴다.

“너는 항상 너의 것만 챙기지 않았나.”

“…….”

“나는 그것을 보고 배운 것인데.”

그의 새빨간 눈동자가 카리나의 면면을 훑었다. 마치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왜, 나를 비난하지?”

나른하게 내려오는 시선에는 불순물이 없다. 매끄럽게 올라가는 입술은 지극히도 순수하다.

“카리나.”

그는 카리나의 한쪽 어깨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너는 이제 내게 잡힌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 속삭인다.

이 탑의 공기처럼 음습한 음성으로, 퀴퀴한 향을 풍기며.

“도망칠 수 없어.”

벗어날 수 없다고.

그는 그렇게 카리나를 속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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