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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93화 (93/135)

93화

“놔.”

카리나는 제 머리채를 잡은 자일을 노려보며 말했다.

“놔, 미친 새끼야.”

자일의 손에 사붓 힘이 풀렸다. 카리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손을 세게 밀쳐냈다. 몸을 벌떡 일으킨다.

“내가 도망칠 수 없다고?”

그녀는 보란 듯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어디 한 번 해 보렴.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나를 감금하고 속박해 봐.”

그러며 허리를 굽혀 자일의 머리채를 휘감았다.

어깨까지 흘러내린 그의 머리칼은 카리나의 손에 힘없이 붙잡혔다.

“그런다고 내가 잡혀줄 건 아니겠지만.”

그렇게 자일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어처구니가 없다는 양 헛웃음을 뱉었다.

그의 시선은 일전부터 계속 카리나의 목덜미에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탁, 그의 머리채를 잡은 손을 놓는다.

“내 눈을 봐, 미친놈아.”

자일은 그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카리나의 녹음을 품고 있는 두 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무 말이 없다. 그저 텅 비어 있는 눈동자로 카리나를 응시할 뿐.

이 미친놈은 예나 지금이나 결코 변하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도 이러하겠지.

대체 무엇이 자일을 이렇게 만들었나, 싶다가도 고민조차 하고 싶지 않은 게 지금의 심정이었다.

“왜, 내 피를 먹고 싶니? 죽을 때까지 빨아 먹고 싶어?”

카리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일의 저 단단한 얼굴도, 제 내면의 약함을 숨기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그렇기에,

“이걸 어쩌니. 난 네게 한 방울도 내 주지 않을 건데. 그럴 바엔 뒈지고 말지.”

그의 마음을 후벼 파는 소리를 하는 것이리라.

그녀의 생각이 맞았던 듯, 자일의 입매가 다소 어그러졌다. 붉은 눈동자가 날름거렸다.

“너는.”

그는 입을 반쯤 벌렸다.

“왜…….”

저 혀 끝에는 무슨 말이 닿아있을까. 저 목은 무슨 말을 담고 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제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아버지가 널 기다리신다.”

그러니 이렇게도 엇갈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카리나는 더욱 큰 헛웃음을 뱉었다. 눈을 사선으로 들어올린다.

“내가 갈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래. 우리 카리나는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카리나의 목을 감싸고 있는 히론은 쐐액 아가리를 벌리며 말했다. 자일의 눈가가 바싹 굳었다.

그는 카리나의 모습을 훑었다. 머리부터 시작해 얼굴, 목덜미, 가슴까지 닿았을 때.

그녀의 상처에 눈을 고정한다.

상처에 담긴 힘을 더듬던 그는, 이내 픽 입술을 비틀었다.

“데이펜에게 당한 꼴이군.”

그 표정이 기분이 나빠, 카리나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어차피 회복될 몸이야. 함부로 덤비지 마.”

“한데 왜.”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나른하나 뚜렷한 눈동자가 그녀의 상처를 주시했다.

“더 약해졌지?”

그는 번뜩 눈을 올려 떴다. 마치 무언가를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다.

“너는 데이펜의 힘에 면역이 있을 텐데…….”

카리나는 등 뒤로 숨긴 손을 바르쥐었다. 설마. 이 작은 단서로 그가 알아챘을까. 바싹 마른 입 안이 텁텁해지는 게 느껴졌다.

자일은 그런 카리나의 변화를 바로 알아챘다. 그는 기울였던 고개를 되돌리며 턱을 들어 올렸다.

“수장이, 너와 상극의 힘을 가졌나?”

젠장할. 카리나는 미간을 좁혔다. 자일의 입술이 더 크게 찢어졌다.

“그 계집의 힘을 뽑아 오는 것도 좋겠군.”

“자일.”

“왜, 이번에도 인간을 보호할 생각인가?”

자일은 카리나에게로 성큼 다가갔다. 그녀의 어깨를 세게 붙잡는다.

“네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는 카리나의 얼굴을 똑바로 주시하며 한 글자씩 힘을 주어 말했다.

“네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생긴다면 난 그것을 부술 것이다.”

그는 금방이라도 카리나의 목덜미를 줴뜯을 것처럼 송곳니를 번뜩였다.

“또한, 네가 사랑하는 것이 생긴다면 난 그것을 죽음까지 몰고 갈 것이다.”

왜?

너는 왜 이런 말을 하는가?

-자일은 너를 사랑해!

아멜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이 진실이라면, 자일이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다면,

“넌 일평생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내가 함께 불행으로 떨어지길 원하는 것인가. 나락으로 치닫길 원하는 것인가.

그의 손이 닿은 팔이 너무도 뜨거웠다.

이는 르네거와 같은 온도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더 냉정한, 또한 그보다는 더 매정한.

“그러니 얌전히 있어라. 네 것은 영원할 수 없으니.”

이는 마음의 차이처럼 느껴졌다.

마음의 온도가 다르기에 몸의 온도조차 다르다는 것을.

카리나는 떠나가는 자일의 뒷모습을 보며 두 주먹을 바르쥐었다.

문이 닫혔다. 카리나는 그제야 손에 쥐었던 힘을 풀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괜찮은 것이냐?]

“어.”

그녀는 한숨을 뱉으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언젠가 자일의 심중을 짐작해 보고자 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내가 조금쯤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그와의 관계도 최악으로 치닫지 않을 수 있다고.

하지만 노력은 허사였다. 자일은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고, 카리나는 그의 꽁꽁 닫힌 마음의 문을 열만큼의 열성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 같은 관계가 된 것이겠지.’

쯧. 카리나는 혀를 차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자일이 붙잡았던 머리칼을 탈탈 털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이곳은 과거 자신이 있었던 방과 똑같은 공간이었다.

똑같은 침대, 책상, 마물의 시체, 떨어지는 피까지.

‘빌어먹을 자식.’

그녀는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었다.

창가로 다가간다. 뻑뻑해 열리지 않는 창문을 힘을 주어 밀어 본다.

쏴아아. 바람이 불어왔다.

하지만 바깥에서 맡는 바람과는 결이 달랐다. 그보다 더 어두운, 더 꿉꿉한, 더 죽음의 향이 짙은.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히론은 그런 카리나의 뺨을 할짝이며 물었다. 카리나는 피식 실소를 뱉었다.

“딱히 생각 같은 건 없어.”

그녀는 히론을 팔에 감았다.

그리고 지평선 너머를 내다보았다. 하지만 저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는 공간에 이 탑이 존재하는 것이었으니까.

“어차피…….”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깜깜한 어둠 속을 헤집는다. 이내,

르네거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저의 손을 잡고 있던 그를, 저를 보며 울부짖던 그를, 제 손을 놓친 것에 허망해하던 그를.

그 얼굴에 담긴 감정은 단 하나.

저를 찾아오겠다는 의지.

그렇기 때문에,

“르네거가 올 테니까.”

그는 반드시 올 것이다.

* * *

“전령새는 갑자기 왜?”

탑으로 돌아온 피에톤은 마뜩찮은 표정으로 코버를 내어 주며 르네거에게 말했다.

“카리나가 아포칼리타의 탑으로 끌려갔습니다.”

“뭐?”

피에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는 르네거의 팔을 잡아당겼다.

“정말? 그래서 지금 카리나가 없다고?”

“네.”

“이 미친……!”

뒤늦게 도착한 피에톤은 카리나와 케투스와의 일을 보지 못했다.

이제야 사건을 알아챈 피에톤은 양손으로 머리를 잡으며 줴뜯었다. 소리를 지르며 발을 동동 구른다.

“그 새끼들은 하여간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돼요. 아악! 다 죽여 버리든가 해야지!”

카리나는 저의 복수를 해 주기로 한 이였다.

그렇기에 피에톤은 이 끔찍한 마탑에 제 발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녀가 나의 복수를 해 주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싶어서.

한데 아포칼리타의 탑으로 끌려가 버렸다니?

‘그럼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잖아.’

피에톤은 으득 어금니를 씹으며 분노에 몸을 떨었다.

이렇듯 피에톤은 격한 반응을 보였지만, 르네거는 그를 무시했다. 묵묵히 필기를 할 뿐이다.

“그래서 탑의 위치를 알 만한 분께 서신을 보내려 합니다. 최대한 빨리 이곳으로 돌아오라고.”

“그래. 누군지는 몰라도 빨리 연락해 봐. 탑으로 간 거면 심상찮은 일일 텐데, 카리나가 더 위험해지기 전에 가 봐야지.”

가 본다? 르네거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는 느리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피에톤을 바라본다.

“뭘 그렇게 봐? 나도 갈 거야.”

르네거의 눈이 사붓 흔들렸다. 그는 미간을 깊게 좁혔다.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단호히 대꾸했다. 다시 종이로 시선을 돌린다.

“뭐? 왜?”

“당신은 약하니까요.”

“야! 네가 괴물 같은 거지, 나도 강하거든?”

“전 저와 비등한 이가 필요합니다.”

“너 이씨……!”

피에톤은 삿대질을 하며 입을 뻐끔거렸다.

“야. 너 혼자 가서 구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네가 딱 등장해서 왕자님 노릇하려고?”

르네거는 또다시 손을 멈췄다. 그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하며 피에톤을 흘겨보았다.

“제가 그렇게 몰지각한 인간으로 보입니까? 중요한 건 카리나의 안전입니다. 사사로운 욕심을 부릴 수는 없지요.”

“그러니까, 그런 욕망은 있다는 말이네?”

르네거의 손이 살짝 떨렸다. 그느 애써 모르는 척을 하며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야. 말해 봐. 그러니까 그런 마음은 있는 거라고?”

“좀, 닥치십시오.”

우웅. 그의 허리에 묶여있는 성검이 낮게 진동했다. 방출되는 힘이 르네거의 전신을 휘감았다.

윽, 피에톤은 그에게 가까이 했던 몸을 떼어냈다.

‘괴물같은 새끼.’

으으. 피에톤은 어깨를 한 번 떨고는 르네거가 쓰고 있는 종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래서, 누구한테 연락하는 건데?”

“샐러딘 아포칼리타에게 보낼 겁니다.”

르네거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렇기에 피에톤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 것도, 턱이 달달 떨리는 것도 모두 보지 못했다.

“……설마 이곳으로 오라고 보내는 건 아니지?”

“맞습니다만.”

“하, 진짜.”

피에톤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꽉 묶은 머리카락이 우수수 흔들렸다. 그는 눈가에 바싹 힘을 주었다.

“우리가 그놈과 얼마나 사이가 안 좋은지 몰라서 하는 짓이야?”

“알고는 있습니다만, 제가 알 바 아닙니다.”

“야!”

“그리고.”

르네거는 정말 짜증이 난다는 듯 눈썹을 깊게 좁히며 피에톤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의 꽉 다물린 입은 견고했으며 건조한 낯빛은 냉정했고 힘이 들어간 두 눈은 싸늘했다.

꿀꺽. 피에톤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쪽은 이제 캄바이트가 아니지 않습니까. 또한 저 역시 라템이 아니니.”

그의 눈에는 아주 조금의 신앙심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 간의 싸움은 신경 쓸 바가 아니지요.”

신을 믿는 자였던 과거를 상기하기 어려울 만큼.

피에톤은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르네거가 아니었기에.

그리고 자신조차 저렇게 변해 버릴까 두려웠기 때문에.

그는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피가 통하지 않았다. 꿀꺽, 마른입 안에 맺힌 침을 간신히 삼켜냈다.

어긋난 기류가 그들 사이를 맴돌았다.

르네거는 피에톤을 응시하고 있었고, 피에톤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시선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였다.

쾅!

갑자기 폭발이 일어났다. 재빨리 중심을 잡은 르네거와 피에톤은 동시에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카리나! 나 찾았어! 사도 찾아왔어!”

제 발로 사지에 찾아와 놓고, 세상 환하게 웃고 있는 샐러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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