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샐러딘은 그 어느 때보다 신나 있는 상태였다.
그토록 찾아 헤매고 다녔던 사도 중 한 명을 발견하지 않았던가.
물론 중간에 방해꾼-안타레스-이 있기는 했다만 지옥 불에 가둬두었으니 그것도 문제될 게 없었다.
‘한 백 년 후에나 봉인이 풀리려나.’
킥킥.
샐러딘은 웃으며 캄바이트의 마탑을 올려다보았다.
제 외침을 듣고 카리나가 당장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탑은 조용했다.
그녀의 검은 날개도 보이지 않았으며 새빨간 셔츠도 보이지 않았다.
왜? 밥을 먹나?
샐러딘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머릿속엔 카리나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상상할 만큼의 불안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들어가 봐야 하나. 샐러딘은 고개를 쭉 빼며 안쪽을 살폈다.
이때였다.
“포위하라!”
갑자기 몰려든 마법사들이 샐러딘의 주변을 에워쌌다.
수십 명의 군단을 이룬 그들은 하늘과 땅을 빼곡하게 메워 샐러딘을 포위했다.
샐러딘은 그제야 이곳이 ‘캄바이트’의 마탑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아, 이런.”
그는 이마를 짚었다.
과거에 저질렀던 악행에 이렇게 대갚음을 받는구나, 싶다가도 지나가 버린 과거는 뭐 어쩔 건가 싶기도 하였다.
샐러딘은 제게 이를 가는 마법사들을 보며 슬쩍 웃어 주었다.
“이야, 오랜만이야. 다들 얼굴이 좋아 보이네. 처음 보는 얼굴들이지만.”
그는 양손을 흔들어 주며 말했다.
당연히 처음 보는 얼굴들이겠지. 그와 마주친 마법사들은 모두 죽었을 테니까.
마법사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여러 가지 색깔로 변했다.
그들이 쥐고 있던 지팡이 끝에 초록색 빛이 맺혔다.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샐러딘은 전투가 일어날 것임을 예상하며 자세를 정비했다.
“샐러딘 아포칼리타.”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샐러딘은 고개를 위로 젖혔다.
로브를 나풀거리며 허공에 떠 있는 피에라 캄바이트의 모습이 보였다.
“야, 넌 진짜 진짜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샐러딘의 격의 없는 인사에, 피에라는 뒷목이 빳빳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샐러딘 아포칼리타.
저자는 어떤 전투에서건 항상 캄바이트의 마법사만 노렸다.
라템이 함께 있어도, 데이펜이 함께 있어도 그는 마법사를 죽인 후에야 다른 가문에게로 눈을 돌렸다.
저 아포칼리타에게 죽은 마법사들의 수만 해도 수백은 넘어갈 것이리라.
다음번에 만나면 반드시 죽여 주리라, 다짐했던 것만 해도 벌써 열 번이 넘어간다. 피에라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제 발로 우리의 본거지까지 오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보군.”
“야, 알아, 알아. 나도 너희가 다 덤비면 힘들지. 그런데 난 진짜 너희와 싸우러 온 게 아니거든.”
샐러딘은 진정하라는 듯 들어 올렸던 두 손을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며 말했다.
“카리나 어디 있어?”
꿈틀.
피에라의 눈썹이 움직였다.
샐러딘이 찾아올 만큼 카리나와 그가 막역한 사이였다는 것을 몰랐던 탓이다.
과정이 어찌 됐건 간에 카리나는 자신들과 동맹을 맺고 있는 이였다.
결과로 그녀 혼자 케투스 아포칼리타를 상대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 뒤에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지만…….
어쨌든 그녀 덕분에 마법사들의 피해는 없었고, 데이펜의 수장과 정령사는 무사히 살아났다.
그러니…….
‘저놈을 완전히 내칠 수는 없겠군.’
피에라는 주먹 쥔 손을 바르르 떨었다.
지금이라도 저놈에게 달려들어 목을 잘라 버리고 싶은 마음이 치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자칫하다간 동맹이 어그러져 카리나가 우리를 공격할 수도 있었으므로.
‘그랬다간 르네거도 우리와 척을 지게 되겠지.’
르네거의 엄청난 힘을 본 그녀로서, 그것만큼은 절대 사양하고 싶었다.
피에라는 탁, 땅으로 착지했다. 그리고 전투 준비를 하고 있는 마법사들에게로 손짓했다.
그에 마법사들의 지팡이 끝에 맺혀 있던 초록색 빛이 사그라들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난 이길지 몰라도 카리나는 아닐 테니까. 그러니까 빨리 카리나 데리고 나와. 응? 할 말이 있단 말이야.”
샐러딘은 차근거리며 말했다. 피에라는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그대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나 보군.”
“모르다니?”
샐러딘의 순진무구한 질문에, 인상을 잔뜩 구긴 피에라의 입이 벌려질 때였다.
“샐러딘!”
르네거의 음성이었다.
그는 한달음에 뛰어내려 온 듯 격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샐러딘은 그를 보자마자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야, 난 너 보고 싶은 게 아니었거든? 왜 너만 나오고 지랄이야. 카리나랑 나와야지.”
르네거는 숨을 몰아쉬며 턱 끝으로 흘러내린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굽혔던 허리를 펴고 샐러딘을 바라본다.
“카리나는 이곳에 없습니다.”
“그게 또 뭔 개소리야.”
샐러딘의 얼굴에 그제야 진중함이 서렸다. 르네거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케투스와의 전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후우.
르네거는 잠시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 두 다리를 곧추세우며 샐러딘을 지그시 응시했다.
“끌려갔습니다, 그녀는.”
“……뭐?”
“아포칼리타의 탑으로.”
샐러딘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눈을 깜빡이지조차 않는다. 숨조차 쉬지 않는다. 미세한 움직임도 없다.
생각한다.
카리나가 얼마만큼 탑을 증오했던지.
그녀가 얼마만큼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 했던지.
아버지의 명령으로 인간을 죽일 때마다 그녀의 얼굴에 빗겨 있던 죄책감을, 피를 씻어 낼 때마다 서러운 듯 역겨워하던 모습을, 모두 다 떠올린다.
“자일 이 미친 새끼가……!”
쾅!
샐러딘이 서 있던 땅이 그대로 움푹 파였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튀어나온 검은 귀와 날카로워진 송곳니는 그가 이성을 잃고 있다는 증거였다.
“가자.”
그는 곧장 발을 굴렀다.
“지금 당장.”
* * *
카리나는 창틀에 앉아 있다.
황폐한 대지를 쓸고 온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 속에는 까끌까끌한 모래가 가득하다.
바람을 맞을수록 쾌청해지기는커녕 텁텁해지고 따끔거렸지만, 카리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여전한 풍경을 바라보며, 슬그머니 실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포칼리타의 탑은 세계의 끝에 있다.
세계의 끝은 곧 세계가 아닌 곳.
그렇기에 이곳은 포탈을 이용하지 않으면 올 수 없는 공간이었다.
원작에서도 끝까지 아포칼리타의 탑을 찾지 못하던 페넬로피가 자일의 뒤를 밟아 이곳까지 쫓아오지 않았던가.
그럴 정도로 이곳은 보통의 인간이라면 절대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샐러딘이 있으니까.’
르네거는 샐러딘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이곳으로 올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다져진 믿음과도 같았다.
언제 이렇게 그를 믿게 된 것일까. 그녀는 새삼스러운 감정을 느끼며 사붓 조소했다.
[괜찮은 것이냐?]
히론의 목소리였다. 어느새 기어 온 그는 벽을 타고 올라와 창가에 턱 고개를 기댔다.
“뭐가?”
[네 몸 말이다.]
“다 나았는걸.”
르네거가 있었다면 더 빨리 나았겠지만. 카리나는 아쉽다는 양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떨어진 지도 벌써 이틀째네.”
이곳의 시간은 바깥보다 빠르게 흘렀다.
이곳의 하루는 바깥의 한나절.
이곳에서 이틀이 지났으니 바깥에선 하루 정도가 지났으리라.
“이제 슬슬 절박해질 때가 왔는데.”
카리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히론은 그 말을 넘겨 듣지 않았다.
[뭘 말하는 것이냐? 뭐가 절박해져?]
질문에, 카리나는 그제야 시선을 내렸다. 히론의 검은 눈을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르네거와 나와의 맹약?”
[……그래. 그게 있었지.]
히론은 쯧 혀를 차며 짜증 섞인 음성을 뱉었다.
[피를 섞지 않는 날이 길어지면 네게도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더냐?]
“맞아.”
라템의 피와 아포칼리타의 피는 상극이었기에, 매일 피를 섞어 맹약을 확인해 주지 않는다면 피가 몸속에서 발화돼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럼 둘 다 몸속에서부터 녹아 버리겠지.
하지만 그건 지금 걱정할 게 아니었다.
그럴 일은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피를 섞지 않아야 일어날 상황이었으니까.
중요한 건 다른 것이었다.
“맹약의 맹점 때문에 걱정이 드는 거지.”
[맹점?]
되묻는 히론을 내려다보며, 카리나는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대답해 주지는 않는다. 그저 웃으며 그를 쓰다듬어 줄 뿐.
-피를 섞지 않은 기간이 길어질수록 정신과 영혼의 교감이 멀어져. 짐승처럼 원초적인 욕구만을 탐하게 된다는 거지. 너나 나나, 모두 다.
카리나가 절박하다 뜻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그녀는 이종족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욕망을 절제할 수 있었다. 때론 달뜬 숨이 올라와도 충분히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하지만 르네거는 다를 것이리라.
그는 인간이었으니까.
인간은 본디 욕망에 충실한 동물이었으므로.
“뭐, 어떻게든 되겠지.”
카리나는 싱긋 웃으며 히론을 쓰다듬던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젖혀 창틀에 정수리를 대었다.
반쪽짜리 하늘과, 반쪽짜리 탑이 그녀의 두 눈에 명확히 들어왔다.
처음 탑으로 소환되었을 때에는 다시는 이곳에 돌아올 줄 몰랐기에 분노밖에 남지 않았었다.
더불어 초조해졌었다.
이곳에 영원히 갇혀 버릴까 봐. 이러다 신마전쟁에 끌려가 버릴까 봐. 사랑하는 이들을 다시 만나지 못할까 봐.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어느 정도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돌아올 줄 몰랐으나 돌아오게 된 곳.
나는 반드시 이곳을 나가게 될 것이다.
영원히 갇힌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르네거가 있고, 샐러딘이 있었으니까.
반드시 탈출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입술을 할짝였다.
“아버지나 만나러 가 볼까?”
궁금증을 해결해 볼 수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