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가자. 지금 당장.”
샐러딘의 말에, 르네거는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 가면 카리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포칼리타들이 있겠지. 더불어 자일이 있을 것이다.
자일 아포칼리타.
르네거는 부득 성검을 바르쥐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말이 없던 성검이었지만 르네거는 성검의 힘을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이길 수 있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르네거는 다짐을 씹어 삼키며 숨을 들이켰다.
한데, 이때였다.
그의 얼굴에 갑자기 열이 올라왔다. 손이 바들 떨렸다. 낯선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다리가 불현듯 후들거렸다.
르네거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쥐어 잡았다.
왜?
의문이 앞섰지만, 곧이어 해답이 따라왔다. 실은 이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카리나와의 첫 입맞춤을 했을 때에 느꼈던 것.
설마…….
-피를 섞지 않은 기간이 길어질수록 정신과 영혼의 교감이 멀어져. 짐승처럼 원초적인 욕구만을 탐하게 된다는 거지. 너나 나나, 모두 다.
벌써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인가.
르네거는 입을 꽉 다물며 숨을 들이켰다.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아니, 버텨야만 했다.
그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쓸어내리며 차분함을 되찾고자 노력했다.
“나도 간다.”
이때, 어느새 나타난 피에톤이 손을 흔들었다.
샐러딘은 눈을 찡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얘는 또 뭐야?”
피에톤의 얼굴에는 항상 드리워졌던 장난스러운 기운이 사라져 있었다.
샐러딘 아포칼리타를 맞닥뜨리고 있기 때문이리라. 샐러딘은 캄바이트의 숙적이나 다름없었으니.
하지만 지금의 피에톤은 캄바이트를 배신하였고, 더 이상 캄바이트가 아니었다.
또한 그러면서도 마음속의 앙금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 양립적인 감정 사이에서, 피에톤은 치솟는 짜증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얼굴은 사붓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 역시 카리나 아포칼리타와 맹세를 했다. 그러니 함께 가야지.”
“맹세? 뭔?”
“그건 네 알 바가 아니고.”
피에톤의 대꾸에, 샐러딘의 송곳니가 더욱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는 으드득 이를 갈며 핏대를 세웠다.
그는 손톱을 길게 뽑았다. 피에톤을 가리키며 눈을 부라린다.
“야. 나 지금 기분이 진짜 엿 같거든? 한 번만 더 까불면 진짜 죽여 버린다.”
하?
피에톤은 기가 차다는 양 헛웃음을 뱉었다.
“어디 한번 해 보든가.”
그 역시 손바닥에 초록색 빛을 머금었다.
대치하고 있는 그들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런 그들의 사이를 가로막은 건 르네거였다.
“그만들 하십시오.”
르네거는 제 몸을 가라앉히고 있는 데에도 온 신경이 쓰이는 중이었다. 한데 이런 때에 저들이 싸우다니.
그는 정말 짜증이 난다는 양 인상을 찌푸리며 피에톤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당신은 아까 제가 한 말을 잊었습니까? 캄바이트의 원한은 더 이상 가지면 안 된다고요.”
피에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르네거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피에라를 번갈아 바라본다. 눈을 돌린다.
“더불어 샐러딘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아, 알았어. 알았어. 겁나 뭐라고 하네.”
샐러딘은 짧아진 손톱으로 귀를 후비며 쯧 혀를 찼다. 발끝으로 땅을 비빈다.
“아포칼리타의 탑으로 가려면 포탈을 열어야 돼.”
“다른 세계라는 말인가?”
“너한테는 말 안 해 줄 거니까 말 걸지 말고. 꺼져.”
왈칵 하려던 피에톤은, 이내 르네거의 눈치를 한번 본 후 한숨을 뱉으며 뒤로 물러섰다.
언젠가 저거랑 한 번은 싸운다.
피에톤은 개인적인 앙금을 품으며 생각했다.
“뭐가 됐든 좋습니다. 빠르게 가는 게 우선이니.”
“그래, 그럼…….”
샐러딘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포탈을 열 만한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더불어 이 마법사들이 있는 곳에서 함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렇게 잠시의 머뭇거림이 흘러가는 때였다.
“르네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르네거는 자신도 모르게 쏟아 뱉던 숨을 들이켰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는 창백한 낯을 하고 있는 페넬로피가 서 있었다.
“잠깐만. 잠깐만 얘기 좀 해.”
그녀는 르네거의 소매를 잡았다.
과거였다면 그의 손을 꽉 움켜쥐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니.
페넬로피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데이펜의 성물, 반지를 쳐다본다.
다시 시선을 올린다. 굳어 있는 르네거의 얼굴을 직시한다.
“꼭 할 말이 있으니까.”
* * *
또각. 또각.
카리나는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가고 있었다.
지하실로 가는 길은 어둡고, 음습하고, 퀴퀴하기 짝이 없었다.
이는 아포칼리타의 탑에 만연한 공기이기도 했다.
어쩌면 형제들이 그렇게까지 미쳐 버린 건 이 탑 때문일 수도 있다고.
햇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 갇혀 있고, 살아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은 것만 바라보며 상쾌한 공기를 느끼지 못하고 축축한 공해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그래서 미쳐 버린 것일 수도 있다고.
환경은 사람을 지배하니까.
카리나는 새삼스러운 조소를 뱉으며 난간을 붙잡았다. 또각, 또각,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꼭 카오스 놈을 만나야 하는 것이냐?]
히론의 짜증 섞인 말이었다.
그는 카리나가 방 바깥으로 나오는 것도 싫어했다.
아포칼리타의 형제들을 만나게 되면 분명 이를 갈 것이 분명한데 그 꼴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싫은 것은 카오스를 만나는 것이었다.
히론에게 있어서 카오스는 복수에 미쳐 있는 놈, 그리고 도망쳐 죽음을 피한 겁쟁이였으니까.
“저를 죽인 딸을 얼마나 보고 싶어 하겠니. 그 앞에서 한껏 웃어 줘야지 않겠어?”
카리나는 피식 실소하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말끝을 흐렸다.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미간을 좁힌다.
“어떻게 살아났는지 알아야 하거든.”
자일은 부활의 힘을 손에 넣었다고 했다.
하지만 원작에서는 그러한 힘이 서술되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근원을 알아야 했다. 아포칼리타의 멸망으로 가는 길에 새로운 변수가 생기게 둘 수 없었으니까.
또각.
계단 끝에 다다른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후우, 숨을 들이켠다.
끼이익.
지하실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이곳은 아버지가 실험을 하던 장소로써, 곳곳에 실험의 흔적들이 남겨져 있었다.
검게 변색된 핏자국부터 시작해 썩어 문드러진 무언가도 나뒹굴고 있었다.
역한 냄새.
카리나는 히론의 몸으로 코를 틀어 막으며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이내.
“어머.”
우두커니 앉아 있던 자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카리나는 픽 조소했다.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나 봐? 쥐새끼처럼 날 감시했나 보네.”
그는 여전한 얼굴로 카리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여전히 무정하지만, 또한 여전히 절박해 보이는.
카리나는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뒤편에 우뚝 솟아 있는 유리관을 바라보았다.
녹색 물이 가득 차 있는 유리관 안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아버지.
나를 창조한 창조주이자 내 손으로 멸망시킨 존재.
카오스 아포칼리타.
카리나는 유리관에 슬며시 손을 대었다.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는 조금 더 가까이 유리관에 다가갔다.
“음. 이걸 살아 있다 말해도 되니?”
다행히도, 아버지는 몸의 반쪽이 없는 상태였다.
이 정도라면 움직이기는커녕 눈을 뜨기도 힘드리라. 카리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곧 살아날 것이다.”
자일은 반발하듯 대답했다. 카리나는 그를 힐끗 바라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다만.”
그녀는 다시 유리관을 응시했다.
“오랜만이에요, 아버지.”
한쪽 얼굴만 남아 있는 카오스를 바라본다.
“제가 아버지를 죽였을 때보다는 살이 붙어 있네요. 더 인간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그녀는 보란 듯이 조소하며 말했다.
이 소리가 아버지에게 닿을지는 몰랐다. 하지만 카리나는 닿기를 바랐다.
자신이 그에게 품고 있는 분노를 그가 알기를 바랐다.
……만약 그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때에도 내 손으로.’
카리나는 유리관에 대었던 손을 되돌렸다. 한기가 머물고 있는 손을 맞잡는다.
“어떻게 한 거니?”
그녀는 자일을 향해 바로 서며 말했다.
자일은 예상한 질문이라는 듯, 평온한 표정을 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붉은 머리카락이 새하얀 뺨에 얽히듯 붙어 있다. 마치 조각조각 금이 난 것처럼 보였다.
“태초에 신들은 인간들에게 성물을 내려 주었지.”
데이펜의 반지, 라템의 검, 캄바이트의 지팡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카리나는 그를 떠올리며 주억였다.
하지만 그 뒤로 나오는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우리의 것도 있다.”
자일은 몸을 일으켰다. 카리나와 한 뼘 정도의 거리로 다가온다.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본다.
“고대 마물을 가긍히 여긴 죽음의 신이 선물해 준 것이지.”
그는 손을 뻗었다. 그의 손바닥에 순식간에 새까만 구가 맺혔다.
파앗-!
그 기운은 순식간에 퍼져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새까만 색의 왕관이었다.
카리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는 것.
이것을 모를 리 없었으니까.
“부활의 힘은 그 무엇보다도 완전하리니.”
이것은 대지의 여신과 죽음의 신의 힘이 합쳐져 있는 것.
삶과 죽음. 그 끝은 부활뿐이리니.
“우리가 이길 것이다, 카리나.”
죽음의 신이 내려 준 성물.
아포칼리타의 관.
그것이 자일의 손아귀에 있었다.
“결코 패배할 수 없어.”
* *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한적한 곳으로 온 르네거는 페넬로피를 향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어떤 온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무정하기만 할 뿐이다.
이를 다시금 느낀 페넬로피는 자그맣게 실소했다.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한다.
“아포칼리타의 탑으로 간다고 들었어.”
그녀는 축축한 얼굴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들과 전쟁을 하려는 생각이야?”
“카리나가 원하고 있으니.”
르네거는 단호히 대꾸했다. 그에 페넬로피는 다시금 조소했다.
역시나, 눈앞의 남자는 더 이상 과거의 르네거가 아니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페넬로피는 자꾸만 속이 쓰렸다.
그녀는 애써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표정을 정돈했다.
“위험할 거야.”
“아포칼리타와 싸우는 것은 언제나 위험해.”
“……그래. 그렇지.”
페넬로피는 후우, 숨을 내뱉었다. 천천히 눈을 내리깐다. 르네거의 쭉 뻗어 있는 손을 바라본다.
“그러니까.”
그녀는 르네거의 손을 잡아당겼다.
“이걸 줄게.”
그리고 르네거의 손바닥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그의 손을 곱게 접어 준다.
이게 무슨.
르네거는 손을 되돌렸다. 천천히 손가락을 펴 본다. 그리고,
“데이펜의 반지야.”
전쟁의 여신이 내려 준 성물.
데이펜의 반지.
그것이 르네거의 손아귀에 있었다.
“꼭 이기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