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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96화 (96/135)

96화

페넬로피는 르네거의 손아귀에 있는 데이펜의 반지를 가만히 응시했다.

깜빡, 깜빡.

찰나에 눈이 움직였으나 억겁으로 마음이 흘렀다.

르네거를 다시 만나면, 그럼에도 그가 변함이 없다면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검을 겨누리라 생각했었다.

카리나 아포칼리타를 만나면 이번에야말로 그녀의 마나핵을 모조리 부숴 주겠다고 결심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다짐과 결과는 일치하지 않는 법이다.

페넬로피는 케투스 아포칼리타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르네거에게 도움을 받았다.

꾸역꾸역 몸을 일으켜 케투스와 대적하러 갔으나 찰나의 실수로 카리나를 공격해 그녀를 곤경에 빠뜨렸다.

원래의 그녀였다면 카리나가 그런 꼴이 된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어차피 죽어야 했을 아포칼리타, 죽이겠다 결심했던 아포칼리타.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내 다짐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마음이 답답했다.

손끝에 머물렀던 머뭇거림이 죄책감으로 변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나는 이런 식으로 카리나를 이기고 싶지 않았다고. 정정당당하게 싸워 그녀를 굴복시키고 싶었던 것이라고.

이러한 마음은 어쩌면 카리나 아포칼리타가 피를 꾸역꾸역 토하면서도 자신을 위해 결계를 펼쳐 주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또한 어쩌면 그녀가 정말 진심을 다해 케투스를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뭐가 됐든, 페넬로피는 이러한 결과를 바라지 않았다.

그녀가 예측한 미래에는 자신이 카리나를 이기는 것 외에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걸 가지고 있으면 성물의 힘을 쓸 수 있을 거야.”

반드시 카리나 아포칼리타가 살아 돌아와야 한다고.

“잠깐 빌려주는 거야. 탑에서 나오면 내게 돌려줘야 해.”

페넬로피는 르네거의 당황하고 있는 눈을 애써 피하며 말했다.

그리고 황급히 몸을 돌렸다. 지척이며 나아간다.

“페넬로피.”

그런 페넬로피의 발목을 붙든 건 르네거의 목소리였다.

그는 그 자리에 우뚝 서 페넬로피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가만가만한 숨소리만이 그들의 사이를 오간다.

“너는.”

르네거는 한참의 침묵 끝에 말을 꺼냈다.

페넬로피는 질끈 눈을 감았다. 텅 비어 있는 손가락을 매만진다.

“너는 내가 죽었어야 했다고 말했지만.”

너는 왜.

“나는 네가 살길 원해.”

왜 이제 와 그런 말을 하냐고.

“어떻게든 살아남아. 뭐가 됐든.”

말하지 않아도 살아남을 거라고.

그녀는 굳게 다짐했다.

어떻게든 내가 승리해 너희를 굴복시킬 거라고.

지척거리던 걸음에 힘을 주어 앞서 걸어간다.

텅 비어 있는 그녀의 손가락은 더 이상 허전하지 않았다.

* * *

“우리가 이길 것이다, 카리나. 결코 패배할 수 없어.”

죽음의 신이 내려 준 성물.

아포칼리타의 관.

그것이 자일의 손아귀에 있었다.

카리나는 이마를 짚었다. 원작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었던가?

아니, 아포칼리타의 관은커녕 이와 비슷한 단어조차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왜?

내가 원작과 궤를 달리해 버린 탓에 원작에도 없는 이야기가 튀어나오고 있단 말인가.

머리가 멍했다. 정신이 자꾸만 흐려지는 것 같아 점멸하는 눈을 바로잡았다.

“……그래서.”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자일과의 대화였다. 그녀는 눈앞의 자일에게로 정신을 집중했다.

“그런 잡스러운 게 네 손에 있으니 내가 네 발에 입 맞추며 개처럼 기어야 한다는 말이니?”

잡스러운 것.

자일은 쥐고 있던 아포칼리타의 관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카리나는 항상 이러했다.

아포칼리타에 득이 되는 일이 있어도 기뻐하지 않았다. 아포칼리타의 승리가 눈앞에 있어도 환영하지 않았다.

세계의 정복은 곧 우리의 목표인 터인데, 그녀만큼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살고 있는 듯했다.

궁금했다.

그녀는 대체 무엇을 바라며 사는 것인가?

자일은 관을 으득 움켜쥐었다.

“너는 우리의 승리를 원하지 않나?”

카리나는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녀의 초록 눈동자에 삐뚜름한 빛이 스쳐 지나간다.

“내가 왜?”

그녀는 정말 의문을 품었다.

“내가 왜 아포칼리타의 승리를 바라야 하는데?”

승리를 바라야 하는 이유는 없었다.

“내가 이곳에 충성하길 바랐다면 나의 소중한 것들을 앗아 가지 말았어야지.”

세상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 그건 바로 형제들이었다.

그러나 형제들은 죽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포칼리타들은 검은 용암으로 끌려가는 형제들을 보며 낄낄 웃었다.

아포칼리타들은 그 형제들의 마나핵을 척추에 박으며 엉엉 울던 내게 부럽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때부터, 카리나는 아포칼리타에 대한 모든 기대를 내던졌다.

어쩌면 아포칼리타에게도 감정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을 탓하며 그들을 냉소적으로 내려다보게 되었다.

“내가 이곳에 순응하길 바랐다면 내게 그런 일들을 시키지 말았어야지.”

그들은 10살이 채 되지 않은 카리나의 앞에 다 죽어 가는 인간을 끌고 와 직접 목을 자르라며 칼을 쥐여 주었고, 해부한 마물의 배에 머리를 쑤셔 넣기도 했었다.

아포칼리타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이라 말했다.

“그렇게 끔찍한 짓을 저질러 놓고.”

그녀는 잠시 숨을 멈췄다. 온갖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지배했다.

아포칼리타라면 응당 겪어야 하는 것.

형제의 죽음, 그들의 힘을 빼앗는 것, 살육…….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카리나는 말끝을 흐렸다.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안다. 알고 있다.

그들이 내게 자행한 행동들은, 나를 아포칼리타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과 똑같은 존재라고 판단했기에, 내가 괴로워할 것이라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아포칼리타라면 당연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일이었으니까.

아포칼리타라면 모든 감정이 무에 가까운 존재들이었으니까.

그래.

모든 죄는 내가 인간인 채 아포칼리타로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카리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소리라도 내지르고 싶은데 목구멍이 턱턱 막혀 와 그럴 수가 없었다.

눈물이라도 와락 흘리고 싶은데 눈물샘이 굳어 버린 듯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나는 슬픔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존재인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인간인 채로 아포칼리타로 태어났다 하나, 슬픔에 겨워 울지도 못하는 나는 인간이 맞기는 한 것인가.

“카리나.”

자일은 그런 카리나의 정신을 깨웠다.

카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선이 점점이 따라 올라간다. 자일의 얼굴이 보였다.

장발의 붉은 머리, 새빨간 눈, 새하얀 피부, 또한 새빨간 날개.

아포칼리타.

“너는 아포칼리타이다.”

그는 자신과 카리나가 다른 존재가 아님을 드러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인정해라.”

그러며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맹렬한 확신을 품고 있는 붉은 눈은 그녀를 격하게 탐하고 있었다.

“너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카리나는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부정하고 싶었다.

나는 너와 다르다고. 나는 사랑도 느끼고 슬픔도 느끼고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라고.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인간을 죽이고 스스로 살고자 했다는 변명을 하며 죄책감을 갖지 않는 게,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이던가?

혼란이 찾아왔다.

스스로의 도덕적 잣대가 높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그만큼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무슨 인간이냐는 반발도 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카리나의 입이 멍하니 벌려졌다.

이때였다.

쾅!

갑자기 땅이 흔들렸다. 지하실 전체가 뒤흔들리며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카리나! 조심하거라!]

그간 계속 말을 않고 있던 히론의 외침이었다. 카리나는 그의 말에 동의했지만, 제대로 몸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휙!

갑자기, 그녀의 몸이 뒤로 젖혀졌다.

자일에게 붙잡혔던 손목은 힘없이 빠져나왔다.

툭, 그녀의 등 뒤로 단단한 가슴의 감촉이 느껴졌다. 카리나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대체 어느 누가.”

르네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나눌 수 있습니까?”

그는 마치 노후하는 짐승처럼 이를 바득 갈고 있었다. 굳은 눈매는 사나웠고, 비틀린 입매는 섬뜩했다.

“스스로 인간이라 생각하면 인간인 것이요, 인간이 아니라 생각하면 인간이 아닌 것입니다.”

그는 한 글자씩 힘을 주어 가며 말했다.

카리나는 마치 그가 자신에게 말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카리나는 인간입니다. 저와 같은.”

카리나가 듣고 싶어 했던 말을 해 주었으므로.

카리나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는 르네거의 손에 바싹 힘이 들어갔다.

그는 가파르고 뜨거운 숨을 뱉으며 그녀의 옆머리에 뺨을 대었다.

“과연,”

자일은 별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여전한 비소를 머금은 채 르네거를 바로 응시했다.

“카리나의 충견이군.”

르네거의 눈매가 사붓 떨렸다.

그는 카리나를 뒤로 숨기며 검을 뽑아 들었다. 검 끝으로 자일의 가슴 정중앙을 겨눴다.

“오늘은 도망칠 수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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