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르네거의 검 끝은 뚜렷하다. 흔들림이 없다.
페넬로피를 만나고, 데이펜의 반지를 받은 그는 곧장 샐러딘을 찾았다.
샐러딘은 때마침 포탈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그들은 이곳으로 바로 넘어올 수 있었다.
탑에 있던 아포칼리타들과 마주쳤지만 샐러딘과 피에톤이 앞서 나서 준 덕분에 그는 홀로 카리나를 찾아 나설 수 있었다.
넓은 탑에서 카리나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르네거는 그녀를 반드시 찾는다는 확신이 있었다.
카리나와의 맹약이 이어져 있기 때문에.
그녀와는 몸도 정신도 이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기에.
“오늘은 도망칠 수 없을 겁니다.”
반드시 자일을 죽일 것이다.
카리나에게 망발을 했던 입을 찢어 주고 그녀의 몸을 붙잡았던 손목을 잘라 주고 그녀를 끌고 왔던 두 다리를 베어 버리리라.
지금껏 이렇게 끔찍한 생각을 해 본 적 없던 그였으나, 지금은 그 변화까지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르네거는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자일을 향해 으득 이를 갈았다.
금방이라도 맞부딪힐 것처럼 일촉 즉발의 상황이었다.
솜털만큼이라도 움직인다면 전투로 번지리라. 르네거는 눈가에 바싹 힘을 주었다.
이때, 그의 주변으로 초록색 결계가 쳐졌다. 카리나의 힘이었다.
카리나는 르네거와 잠시의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와 잠깐의 대화라도 해야 할 듯하여.
“어떻게 이렇게 일찍 올 수 있었니?”
하지만 르네거는 대답이 없다. 카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르네거.”
카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그녀의 손이 어깨에 닿았다.
아.
르네거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서 떨어졌다.
“……뭐니?”
카리나의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르네거는 어쩔 수 없었다.
이곳까지 오는 데에도 자꾸만 심장이 떨려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이 아니었던가.
자꾸만 야살스러운 감각이 올라와 몸이 달뜨지 않았던가.
방금 그녀를 안았던 것만으로도 이미 한계치에 다다른 르네거였다.
그는 카리나를 의도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결계를 풀고 뒤로 물러서 계십시오.”
결계 밖, 자일의 선뜩한 두 눈이 보였다. 입을 꾹 다물려 있다. 하지만 양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다.
결계가 풀리기만 한다면 곧장 맞부딪힐 터.
르네거 역시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물러서긴 뭘 물러서니. 너 혼자 상대하긴 벅찰 거야.”
“제가.”
르네거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이제껏 카리나에게 도움만 받았던 그였다. 그녀를 지키겠노라 말을 했으면서도 한 번도 힘이 되어 준 적 없던 그였다.
이번에도 도의를 지켜야겠다는 본성에 따라 페넬로피를 구해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니던가.
본능.
타인을 구해야 한다는 이타심에서 온 도덕적 본능.
그러한 도의는 인간으로서의 타당한 본성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도의를 지키건 말건 나라는 존재는 변함이 없다.
내가 선이건 악이건 나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나는 나일 뿐이기 때문에.
그러니 이제는.
“제가 하겠습니다.”
카리나를 지키는 것을 내 본능으로 삼으리라.
그의 푸른 눈동자에 싸늘한 이채가 스쳤다.
검을 쥔 손이 우웅 진동했다.
검은색의 검기가 검신을 가득 채웠다.
촤악!
그는 카리나의 결계를 너무도 손쉽게 찢고 앞서 나갔다.
* * *
“거기 서.”
카리나는 르네거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몸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경계선이 생긴 것처럼, 탁 몸이 걸렸기 때문이다.
“……결계?”
카리나는 손을 들어 허공을 더듬더듬 만져 보았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촉감으로 만져지는 분명한 경계가 있었다.
“하, 진짜.”
그녀는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몸에 무리가 갈 테지만, 당장에라도 힘을 써 이 결계를 찢어 버리고 싶었다.
지금의 르네거는 어딘가 이상했다.
그래. 또다시 변해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과거에는 새하얀 물에 먹물 한방울이 튄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불순물이 솟구쳐 휘저어진 느낌이었다.
뭐가 됐든 이상해.
그리고 기껍지 않았다.
‘찢어 버릴까.’
카리나는 손톱을 날카롭게 세웠다.
하지만 튀어나온 히론이 그녀의 팔을 가로막았다.
[그만하거라.]
히론은 그녀의 팔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이번만큼은 저놈에게 맡기자꾸나. 네 몸이 더 다치는 건 나도 싫으니.]
“르네거가 자일을 이기리란 확신이 없잖아.”
[저놈의 손을 보아라.]
손?
카리나는 히론의 말대로 르네거의 손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에는 익숙한 모양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저건…….
‘데이펜의 반지?’
카리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페넬로피가 준 것인가? 그렇다면 왜?
이상하리만큼 기분 나쁜 감정이 솟구쳤다. 가슴이 꽉 쥐어짜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카리나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 괜찮을 것이다. 단번에 이길 테지.]
“…….”
카리나는 입술을 사붓 깨물었다.
피 맛이 알싸하게 느껴졌다. 마치 자일이 곧 흩뿌릴 피처럼.
“그래도 불안하단 말이야. 이러다 지게 되면 그때는 걷잡을 수 없이 상황이 커지니까.”
그녀의 불안함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히론은 단호했다.
[아포칼리타의 관은 말이다.]
그는 혀를 날름거리며 말을 이었다.
[죽음의 신이 내려 준 것이다.]
“나도 알아. 들었으니.”
[죽음의 신이 왜 고대 마물을 비호했겠느냐?]
뭐?
카리나의 고개가 반쯤 돌아갔다. 팔을 타고 있던 히론이 그녀의 목 부근으로 올라왔다.
[정말, 죽음의 신의 힘을 이용한 대가가 없다고 생각하느냐?]
히론의 낯빛은 어두워져 있었다. 잘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기에, 카리나는 미간을 좁히며 그를 응시했다.
그러나 히론은 더 말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쯧. 멍청한 것들.]
그러니 카리나의 목덜미를 깨물어 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윽.
카리나는 신음을 흘리며 목을 쥐어 잡았다. 그곳에서부터 알싸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비 독이었다.
“너 이게 무슨……!”
[이번만큼은 내 말을 들어라.]
“히론!”
더 말하고 싶었지만, 마비된 감각이 번져 몸을 잠식했다. 손끝이 떨렸다.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비가 풀리면 너부터 혼낼 거야.”
[어이고, 무서워라.]
히론은 흥 고개를 돌리며 앞을 주시했다.
[어쩔 수 없다.]
그의 얼굴은 어떠한 단호함이 가득 차 있었다.
[저 힘에 휘말리지 않아야 하니.]
그리고 불안함까지도.
카리나는 흐릿해지는 몸의 감각을 느끼며, 히론과 르네거를 주시했다.
* * *
“이상한 것을 가져왔군.”
르네거를 무심히 지켜보고 있던 자일의 말이었다.
그의 시선은 르네거의 손가락에 닿아 있다. 데이펜의 세계수가 새겨져 있는 반지. 분명 데이펜의 성물이리라.
아버지, 카오스 아포칼리타는 3개 가문의 성물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을 모아야 세계를 지배할 수 있노라고.
르네거 라템의 성검과,
페넬로피 데이펜의 반지.
저것을 한꺼번에 얻게 되면 어찌 될까?
자일은 희망적인 미래에 비식 비소했다.
챙!
자일은 황급히 날개로 몸을 막았다. 르네거가 갑작스레 달려온 탓이다.
그가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자일은 뒤로 물러서며 까득 손톱을 세웠다.
“덕분에 그때보다는 강할 겁니다.”
르네거는 승리감이 만연한 미소를 입에 걸고 있었다.
저 웃음이 자일은 퍽 불쾌했다.
마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자의 비웃음 같아서.
카리나도, 성물도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자의 우월한 웃음 같아서.
자일의 피부가 새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피의 남자라는 별칭은 그에게 딱 걸맞는 이름이었다.
전투를 할 때면 그의 새하얀 피부는 새빨갛게 변모했다.
그러한 현상은 품고 있던 피를 방출한 것으로써, 인간들은 그의 몸에 스치기만 해도 살이 녹아 쓰러져 버렸다.
그의 공격을 알고 있는 르네거였기에, 그 역시 몸에 결계를 둘렀다. 과거처럼 쉬이 당해 주진 않으리라.
챙!
르네거는 다시금 그에게 달려들었다.
자일은 곧장 날개를 펴 공중에 떠올랐지만, 르네거의 움직임이 보다 빨랐다.
그는 검기를 쏘아 자일의 왼쪽 날개를 꿰뚫었다.
크흑!
자일의 입가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르네거는 멈추지 않고 다시 달려들었다.
자일은 낙하한 몸을 반쯤 뒤로 굴렸다. 그리고 손톱을 세워 그의 검을 막아 냈다.
챙, 챙!
소름 끼칠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가 퍼졌다.
“데이펜의 반지 덕분인가?”
르네거와 맞대고 있는 자일이 질문했다.
르네거는 대답 대신 몸에 힘을 풀었다. 자일이 앞으로 튀어나오는 반동을 이용해 뒤로 물러선 후 그의 팔을 베어 냈다.
툭.
허무하리만큼 쉽게 잘려 버린 자일의 팔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르네거는 피식 조소하며 그의 팔을 발로 짓이겼다.
“반지가 없었어도 이겼을 듯합니다.”
그는 다시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그의 발을 노려 주리라.
팔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고 입을 잘라 주리라. 카리나를 속박하고 겁박했던 저자의 모든 것을.
르네거는 크게 도약했다.
콰앙!
그의 검이 바닥을 내리찍었다.
쿠웅.
소리가 나며 지하실의 모든 것이 와르르 부서졌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르네거가 만든 결계와 초록색 물이 차 있는 유리관뿐.
“쿨럭!”
자일은 피를 토하며 몸을 비틀었다. 르네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달려든 르네거는 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쾅!
자일의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부서진 석판이 그의 몸을 아프게 찔렀다.
쿨럭.
자일은 다시 한번 더 피를 토했다.
“정말…….”
그런 자일의 몸 위에 올라타 있는 르네거는 비죽 비소했다.
“쉽네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르네거의 검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리고.
“윽!”
르네거는 그대로 튕겨져 나왔다. 이게 대체 무슨. 그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두 다리를 곧추세웠다.
그리고 보게 되었다.
자일의 몸이, 새까맣게 물들고 있는 것을.
그가 흩뿌린 피에서 검은 연기가 올라오고 있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