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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98화 (98/135)

98화

하아.

카리나는 마비로 인해 저리는 팔다리를 느끼며 휘청거렸다.

유리관에 몸을 대고 스르르 주저앉는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넘기고 싶었지만 손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자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히론이 미웠다. 카리나는 히론을 잔뜩 흘겨보았다.

[그렇게 보지 말거라. 다 너를 위한 일이니.]

히론은 그런 그녀의 뺨을 한 번 핥아 주며 말했다. 그리고 정면을 바라본다. 자일과 대치하고 있는 르네거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는다.

[데이펜의 힘이 여러모로 유용한 듯하구나.]

그의 말대로, 르네거는 자일에게 절대 밀리지 않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일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안심할 수 없었다.

아무리 르네거가 강해졌다 한들 자일이 저렇게 쉽게 당할 리가 없었기 때문에.

“……뭔가, 이상하잖아.”

카리나는 마비 독으로 인해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이며 말했다.

[무엇이 이상하다는 말이냐?]

“자일이…….”

봐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카리나는 말을 끝맺으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쾅!

자일의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졌기 때문이다.

르네거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가 무어라 말을 하고 있는 듯했으나 거리가 멀어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르네거는 자일의 가슴에 검을 꽂아 넣었다.

쿨럭!

자일은 피를 토하며 몸을 들썩였다.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자일의 가슴에 있던 마나핵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끝인가?

정말, 자일은 이렇게 끝이 나는 것인가?

자일의 고개가 카리나 쪽을 향해 돌려졌다.

피로 범벅이 된 얼굴에서 유일하게 또렷한 것은 바로 그의 눈이었다.

저 붉은 눈은 무엇을 품고 있는가.

무슨 계획과 생각을 함축하고 있는가.

정말 너는 죽는 것인가?

아니.

카리나는 떨리는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자일은 이렇게 죽을 이가 아니다. 절대.

그렇게 생각한 찰나였다.

[르네거! 조심하라!]

우웅.

낮은 진동이 울리더니 땅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일의 붉었던 피부가 검게 물들어 가는 게 보였다.

그가 흘렸던 피가 새까만 연기로 기화되는 것이 보였다.

“저게 무슨…….”

[젠장.]

히론은 아가리를 벌리며 큰 숨을 들이켰다. 그의 몸집이 부풀어지며 커졌다. 그는 빠르게 카리나의 온몸을 감싸 안았다.

콰앙! 쾅!

검은 폭발이 이어졌다. 거친 바람이 밀려와 카리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을 뜬 순간, 그녀는 밀려오는 막막함을 갈무리할 수 없게 되었다.

르네거와 자일이 사라져 있었으니까.

[쯧. 조심하라 하였는데도.]

히론의 안타까운 듯한 음성이 카리나의 귀를 내리 찔렀다.

* * *

“아, 끝이 없네.”

쾅!

샐러딘은 달려드는 마물들을 향해 지옥의 불길을 내뿜으며 말했다.

“대체 아포칼리타들은 이런 마물을 얼마나 만든 건가?”

피융!

피에톤은 마물들의 날개를 향해 마법을 쏘아 대며 물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 난 실험실에 가지도 않는데.”

샐러딘은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들은 탑의 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계단을 통해 끊임없이 마물들이 내려와 그들의 경로를 막았기 때문이다.

이상한 건 이렇게도 마물이 많은데 아포칼리타는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샐러딘과 피에톤은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무자비하게 들이닥치는 마물을 막아 내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므로.

“이렇게 처리하다간 끝이 안 날 것이다.”

“당연한 걸 그럴듯하게 말하고 있어. 짜증 나게.”

샐러딘의 사나운 대꾸에 피에톤은 인상을 찡그렸으나, 지금은 그와 대적할 때가 아니었다.

휘잉!

피에톤은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자세를 잡았다.

그의 손끝에서 초록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와 대적하고 있던 마물들 모두가 우수수 추락했다.

그리고 그는 곧장 낙하했다.

콰앙!

피에톤의 손이 바닥에 닿자마자 쩌저적 바닥이 갈라졌다. 균열이 일어난 틈에서 초록색 넝쿨이 솟구쳤다.

넝쿨은 샐러딘과 맞부딪히고 있던 마물들에게로 날아갔다.

휘익!

마물을 한 마리씩 움켜잡은 넝쿨은 그들을 꽉 조이며 몸을 키웠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으니, 네가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겠지?”

피에톤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샐러딘은 그런 그를 보며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짜증 나게.

과거였다면 인간과 같은 편에서 전투를 하지도 않았을 테고, 또한 이렇게 짜증이 나면 죽였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는 터.

샐러딘은 으득 이를 갈며 양팔을 벌렸다. 그의 손과 팔 전체가 새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콰과광!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순백의 불길이 넝쿨을 모조리 불태웠다.

넝쿨에 휘감겨 있던 마물들까지도 새까맣게 타 버렸다.

샐러딘은 손을 탈탈 털며 비식 입꼬리를 틀었다.

“내가 다 죽인 거다. 알지?”

피에톤은 대답하는 대신 샐러딘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런 등신 같은 놈에게 그간 마법사들이 당했다니.

수치다, 수치야.

그는 바닥을 짚었던 손을 되돌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르네거를 따라가 보는 게 좋을 듯하다.”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었거든?”

샐러딘은 휙 등을 돌리며 말했다.

하아아.

피에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정말 의아한 일이다.

이렇게까지 마물이 몰려온 것도, 마물이 모두 다 당했음에도 나타난 아포칼리타가 없다는 것도. 모두 다…….

이때였다.

“잠깐. 뭔가 이상한데.”

기감이 뛰어난 샐러딘이 먼저 반응했다. 뒤를 이어 피에톤 역시 그와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우웅, 웅, 하는 진동이 울려 퍼졌다.

피에톤에 의해 갈라졌던 바닥의 균열이 더욱 커졌다. 탑의 벽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쨍그랑!

창문이 와장창 깨졌다. 우뚝 서 있던 아포칼리타의 동상도 모두가 쓰러져 박살이 났다.

“젠장!”

샐러딘은 곧장 뒤를 돌았다.

“뛰어!”

그의 등 뒤로 새까만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저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본능은 경고했다. 저것에 닿으면 잠식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피에톤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샐러딘의 뒷목을 움켜잡고 빠르게 날아오른다.

콰과광!

그들이 간신히 빠져나옴과 동시에 어둠은 탑 전체를 에워쌌다.

탑의 형체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그저 새까만 어둠뿐.

“이게 대체 뭐…….”

피에톤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윽, 소리를 내며 코를 틀어 막는다.

퀴퀴하고 텁텁한, 깊고 더러운 냄새가 코를 우악스럽게 찔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샐러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옥의 문지기인 케르베로스의 피를 이어받은 그는, 이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것은.

죽음의 냄새이자 죽음의 어둠이었다.

* * *

“콜록…….”

르네거는 코로 들어오는 검은 연기를 간신히 막으며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들어오는 연기는 그의 목과 가슴을 꽉 옥죄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르네거는 재차 기침을 뱉으며 두 다리를 곧추세워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본다.

이곳은 탑이 아니었다. 음습한 지하실이 아니었다.

탁 트인 벌판과 그 가운데를 가로지는 검은 강이 있는 곳.

“이곳은…….”

공간 이동을 한 것인가?

그렇다면 카리나는?

르네거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 반동으로 다리가 사붓 허청거렸다.

“이곳은 어디일까.”

믿기지 않게도, 자일의 음성이었다.

분명 그의 가슴을 꿰뚫지 않았던가. 그의 마나핵을 박살 내지 않았던가.

르네거는 가빠지는 숨을 토하듯 뱉으며 눈을 들어 올렸다.

자일은 허공에 떠 있었다. 그의 붉은 날개가 호기롭게 펼쳐져 있다.

분명 날개를 잘라 냈을 텐데.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날개는 멀쩡한 상태였다.

르네거가 절단했던 그의 다리 역시도 회복되고 있었다. 부글거리는 검은 거품은 새하얀 다리를 만들어 냈다.

“네놈이 평생 가도 단 한 번밖에 올 수 없는 곳.”

쿵.

자일은 르네거의 앞에 착지했다.

“죽음의 강이다.”

자일의 뒤편, 펼쳐져 있는 검은색의 강물이 끓어오르는 듯 부풀고 있었다.

“질서는 산 자가 죽는 것이고 혼돈은 죽은 자가 사는 것이니.”

자일은 그 새빨간 입술을 비죽 비틀며 조소했다.

“아포칼리타는 곧 혼돈이라.”

그의 손안에 있는 왕관이 번뜩이며 빛을 쏘았다. 그리고 동시에.

“넌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강물에서 무언가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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