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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99화 (99/135)

99화

“넌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강물에서 무언가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크고 검은 것. 흐물흐물한 것처럼 보이다가도 딱딱하게도 보이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르네거가 시야를 확보하기도 전에 그것들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챙!

르네거는 검을 휘둘렀다.

단칼에 몸이 베인 그것은 휘청거리다 쓰러졌다. 하지만 두 동강이 난 몸은 다시 일어났다. 베고 또 베어도 그것은 쓰러지지 않았다.

젠장.

르네거는 욕설을 읊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곳에 오는 동안 마신 검은 연기는 그의 사지를 온전하지 않게 만들었고, 드리워진 미지의 존재는 그의 정신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저것은 죽은 자들의 껍데기다.』

갑작스레 성검의 전음이 들려왔다.

르네거는 진동하는 성검을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죽어야 할 것이 살아 버렸으니 제대로 죽지도 못하는 것.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랜만에 전음을 보낸 성검은 진중한 어투로 말했다.

챙!

르네거는 다시 한번 그것을 베어 내며 뒤로 물러섰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르네거는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성검은 더욱 깊게 진동했다.

『저놈을 죽여야지.』

검의 끝은 허공에 떠 르네거를 내려다보고 있는 자일에게로 자연스레 올라갔다.

자일은 그런 르네거를 바라보며 피식 조소했다.

“할 수 있으면 해 보라.”

쿠구궁!

죽음의 강에 파도가 일었다.

해일처럼 밀려온 파도는 검은 거품을 만들며 몸집을 키웠다. 그리고 그것들을 더욱더 많이 내보내기 시작했다.

『힘을 쓰거라.』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르네거는 두 손으로 성검을 쥐었다.

르네거의 손에서부터 흘러나온 빛이 검신을 뒤덮었다. 분명 흘러나온 것은 하얀빛이건만, 검신은 새까맣기 짝이 없다.

검게 변한 검은 이를 날카롭게 드러내며 그것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쾅!

르네거는 그것들을 베어 내고 또 베어 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허청거렸지만, 그것들에 베여 살점이 뜯겨 나갔지만, 살이 문드러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러해도 멈추지 않았다.

자일에게 닿을 때까지.

르네거는 그것들의 사체를 밟으며 도약했다.

자일의 발끝에 간신히 닿는다. 하지만 그를 베어 낼 수는 없다.

“윽!”

떨어진 르네거는 간신히 몸을 구르며 충격을 피했다.

하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검을 더 세게 바르쥐었다.

챙!

몰려드는 그것들을 쉼 없이 베어 낸다.

베고, 또 베며.

나아가려 하지만 나아갈 수 없다.

그것들의 수가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자일은 마치 르네거가 발악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양 냉소적인 얼굴로 말했다.

“너는 이곳을 나갈 수 없다고.”

우웅.

잘려 나간 그것들이 한꺼번에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며 조금씩 움직인다. 한곳으로 몰려가 꾸덕꾸덕한 덩어리를 이룬다.

“너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죽음의 인도를 받지 못한 가긍한 혼이 될 테니 네 신에게는 결코 닿지 못할 것이다. 너는 억겁의 시간 동안 이곳에 갇혀 울부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원망하겠지. 나를, 그리고 카리나를.”

덩어리로 모여 집채보다 커진 그것은 르네거를 향해 아가리를 벌렸다.

콰과광!

땅이 갈라지며 흔들렸다. 르네거는 제대로 방어조차 하지 못한 채 나뒹굴었다.

컥, 르네거는 붉은 피를 토하며 몸을 웅크렸다. 흙바닥을 손으로 움켜쥐며 몸을 지탱한다.

자일은 그런 르네거를 내려다보며 크게 비소했다.

“염려하지 마라. 너와 함께 있던 이들 모두를 이곳으로 데려다줄 테니.”

쿵, 쿵!

그것은 르네거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왔다.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땅이 울려 몸이 들썩거렸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온몸을 지배했다.

『정신 차리거라, 이 무능한 놈아!』

성검의 날 선 비난에도 르네거는 제대로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는 재차 피를 토하며 까득 이를 깨물었다.

그러며 생각한다.

이곳에 온 이후, 지금까지 자일은 저것만을 이용해 자신을 공격해 왔다.

그렇다면.

‘자일은 더 이상 공격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희망이 보였지만, 지금의 르네거는 자일에게 닿을 수조차 없는 정도로 망가진 몸이었다.

“윽!”

르네거는 그것의 발길질에 걷어차여 바닥을 뒹굴었다.

『르네거!』

성검은 재차 소리쳤지만, 르네거는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대로 끝날 수는 없다.

그의 손이 검신을 따라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때였다.

그의 손에 끼워져 있던 데이펜의 반지가 빨갛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빛은 곧 검신에 닿았고, 성검이 품고 있는 검은빛과 섞이기 시작했다.

휘이잉!

빛발은 회오리치듯 회전하며 서로의 색을 섞었다.

우우웅.

성검은 더욱 크게 공명했다. 그를 쥐고 있던 르네거의 손까지 함께 떨릴 정도로.

이게 무슨.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파앗!

검신 전체가 검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빛발 역시 검고 붉은 기운을 띠었다.

『데이펜의 힘이군.』

성검은 불쾌하다는 기색을 역력하게 드러내며 전음했다.

라템의 힘과 데이펜의 힘이 합쳐진 것인가?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이었나?

르네거는 당황스러웠지만, 지금은 깊게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빛을 받은 덕분인지 방금 전보다는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터.

르네거는 허리를 곧추세우며 검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이 정도면 저것을 한 번에 없애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쩌저적!

갈라지는 땅의 조각을 디딤 삼아 르네거는 그대로 도약했다.

피융!

검 끝에서 빛줄기가 쏟아져 날아갔다.

그것의 머리를 관통한 빛은 뒤편에 서 있던 자일의 몸을 꿰뚫었다.

“쿨럭!”

르네거의 예상이 맞은 듯, 자일은 이렇다 할 방어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그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일이 쓰러지니 그것 또한 움직이지 못했다.

하아.

르네거는 추락한 자일을 향해 다가갔다. 자일은 옆구리의 절반이 날아간 채 쓰러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손을 달싹거리는 것이, 그것을 움직이려 하는 듯싶었다.

르네거는 그의 손을 발로 짓이겼다.

“하…….”

자일은 헛웃음을 뱉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입꼬리를 찢어 올린다. 허탈한 실소가 벌려진 입 사이로 흘러나왔다.

“인간에게 진 것이 그렇게 비참합니까?”

자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먼 곳을 바라보며 재차 웃을 뿐.

“인정하십시오. 당신은 내게 졌노라고.”

르네거는 한 글자 한 글자씩 씹어 삼키며 말했다. 자일은 그때까지도 실소를 멈추지 않았다.

“내가 끝이라고 생각하는가?”

르네거는 두 눈을 질끈 감아 내렸다.

지긋지긋한 아포칼리타.

더럽고, 구차한.

“당신은 왜.”

르네거는 삼켰던 숨을 토해 내며 말했다.

“왜 이렇게 절박한 것입니까?”

자일의 떨리던 눈이 그제야 초점을 찾았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르네거를 바라보았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대체 무엇이라고, 왜 이렇게 절박한 것입니까? 형제를 죽이고 자신을 죽이면서까지 이뤄야 하는 일입니까?”

자일의 눈이 느리게 동요했다.

르네거의 말은 꼭 카리나가 하는 말 같았다.

그녀는 항상 말했다.

세계를 지배할 바에는 나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 더 좋다고. 그런 시답잖은 일 따위 내 알 바가 아니라고.

그를 들을 때에 나는 무슨 대답을 했던가.

“그것은.”

쿨럭!

자일은 다시 한번 피를 토했다. 새까만 피가 그의 입가를 완전히 적셨다.

“내가 아포칼리타이기 때문이다.”

르네거는 미간을 좁혔다.

그의 태도는 마치 신관들과 같았기 때문이다.

신을 믿는 신관이기 때문에 신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던질 수 있다고.

자신 역시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그런 과거가 있는 르네거로서, 자일을 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검을 세게 움켜쥐었다.

자일의 목 끝에 검을 겨눈다. 아슬아슬한 거리가 벌려졌다.

자일은 우두커니 르네거를 응시했다. 그의 모든 것이 새까맣게 변했으나, 새빨간 눈 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너는.”

그는 피에 섞여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녀를 사랑하는가?”

그녀. 라는 말이 카리나를 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르네거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르네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일은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꺽꺽 소리를 내며 가슴을 부풀린다.

정녕 우스워 저리 웃는 것만 같아, 르네거는 더 불쾌해질 수밖에 없었다.

“인간아.”

자일은 르네거의 검을 움켜쥐었다. 갈라진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너희는 혼돈을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

르네거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자일의 목이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했다.

“영원히.”

그 말이 끝이었다.

르네거는 자일의 목을 꿰뚫은 성검을 까득 비틀었다.

들썩이던 자일의 몸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는다.

“저는.”

르네거는 자일의 부릅떠진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질서 같은 것은 필요 없습니다.”

* * *

하아.

카리나는 유리관에 기댔던 몸을 떼어 냈다.

시간이 지난바, 히론이 주사했던 마비 독이 어느 정도 희석됐기 때문이다.

카리나는 제 몸을 감싸고 있는 히론을 세게 밀쳐 냈다.

“그래서, 르네거가 죽음의 강으로 불려 갔다고?”

[그래.]

“넌 알고 있었고?”

[……그래.]

카리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거칠고 뜨거운 숨이 그녀의 얼굴을 부풀렸다.

그녀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들끓는 속을 가라앉히는 듯했다.

카리나는 다시금 눈을 올려 떴다. 히론의 두 눈을 바라본다.

“르네거가 죽을 수도 있어.”

[그렇다면 그놈의 운명이다.]

“히론.”

[물론 그놈을 아끼긴 하다만, 너와 비교할 수는 없다. 네가 전투에 참여했다면 너 역시 그곳에 불려 갔을 터.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더불어 죽음의 저편에서 죽은 것이라면 네 맹약과도 상관이 없을 터.]

저를 맹목적으로 아끼는 히론이었기에 이런 선택을 한 것이리라.

그렇기에 카리나는 마음이 따끔거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가슴이 무거워지고 축축해지는 것 또한 막을 수 없었다.

“찾아야 돼.”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찾으러 가야 한다고.”

아직 다리에 마비가 풀리지 않아 휘청거리긴 했지만, 이 정도는 움직일 수 있었다. 그녀는 유리관에 손을 대며 허리를 폈다.

[카리나야. 아포칼리타는 저승으로 갈 수 없어. 가면 안 되고.]

히론은 그런 카리나의 다리를 붙들었다.

카리나는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터뜨리기에 이르렀다.

“그럼 르네거는?”

그녀는 히론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말했다.

“살아 있는 인간 주제에 죽음의 강에 끌려갔는데,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

히론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역시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카리나의 어깨가 가파르게 들썩였다.

“말했잖아.”

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눈가를 채 갈무리하지 못했다.

“르네거가 죽는 걸 볼 수 없어.”

이때였다.

휙!

카리나의 몸이 뒤로 당겨졌다. 한쪽 뺨을 감싸는 촉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익숙한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뜨거운 숨이 순식간에 밀려들어 왔다.

르네거.

카리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눈을 올려 떴다. 하지만 르네거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카리나의 허리를 잡아당기며 제 몸과 더 깊숙이 밀착했다.

하아.

벌려진 입술 사이로 르네거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쉬는 것은 그 잠시뿐이었다.

그는 카리나의 뒷머리를 움켜쥐었다. 허리를 감쌌던 손을 위로 올려 등을 더듬는다.

가느다랗지만 마디가 굵은 손가락은 그녀의 옷 위를 더듬으며 위로 나아갔다.

목덜미에 닿는 순간 너무도 차가워 움찔 어깨가 말렸으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부드러운 힘이 입술을 통해 넘어왔다. 안을 헤집는 느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격하고 뜨거웠다.

읏.

카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터뜨렸다. 르네거가 그녀의 입술을 깨물었기 때문이다.

서서히 눈을 올려 뜬다.

르네거의 깊고 커다란 눈매가,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는 카리나의 아랫입술을 할짝이며 말했다.

“전 죽지 않는다고.”

그리고 다시금 그녀를 끌어당겼다.

더, 더, 깊게. 만나지 못했던 시간 만큼, 그것보다 더해야 한다는 것처럼.

그들은 서로를 옥죄며 그러당겼다.

그렇기에 보지 못했다.

유리관 속에 있는 카오스의 몸이 꿈틀거리는 것을.

9장. 질서와 혼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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