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르네거는 숨을 몰아쉬었다.
언제 기절을 한 것인가, 싶을 정도로 기억이 아득했다.
뜨거운 열이 온몸을 잠식하고 있다. 뼈가 부러진 듯 관절 마디마디가 욱신거리며 아팠다.
눈을 뜨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주어도 눈이 떠지지 않았다.
후우.
그는 야트막한 한숨을 뱉으며 몸에 힘을 풀었다. 푹신한 요의 촉감이 느껴졌다.
“왜 저렇게 안 일어나는 거야?”
샐러딘의 목소리였다. 기척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옆에 서 있는 듯 싶었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의 몸으로 죽음의 강에 다녀온 것이니. 살아 있는 것도 기적인 것을.]
히론의 냉소적인 대답이 들려왔다.
“야! 너 그렇게 재수 없는 말 할래? 기적이긴 뭘 기적이야!”
[멍청한 개 대가리 같으니라고. 히론 님이라 부르라 몇 번을 말했느냐?]
“지금 그게 중요해?”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 투닥거리고 있었다.
르네거는 실소를 뱉으려 했지만, 입술조차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다들.”
카리나의 음성. 르네거는 있는 힘을 다해 손을 달싹였다.
“나가. 시끄러우니까.”
보지 않아도 그녀의 표정을 짐작할 수 있다. 분명 귀찮다는 듯한 얼굴을 하며 손을 짓고 있겠지.
그녀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자부심이 들면서도, 그런 그녀를 보지 못한다는 것에 속상함이 앞섰다. 르네거는 더욱 몸에 힘을 주었다.
“아니, 왜 나한테 그래? 시비는 이 뱀 새끼가 먼저 걸었어!”
[내가 아무래도 오래 산 듯싶다. 저런 개새끼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말이야.]
“둘 다 나가라고 했어.”
그녀는 더욱 싸늘해진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에 샐러딘과 히론의 기척이 천천히 사라졌다.
아마도 시무룩하게 어깨를 떨어뜨리고 나갔겠지. 르네거는 속으로 실소했다.
털썩.
카리나가 침대에 걸터앉는 것이 느껴졌다.
“르네거.”
카리나는 르네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차가운 체온이 살에 닿으니 타는 듯했던 통증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아.
그녀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저가 다친 것이 싫은 것인가. 멀쩡히 돌아오지 못한 것에 실망한 것인가. 르네거는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너는 말이야.”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르네거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나눌 수 없다 말을 했지.”
아.
자일과 대적했을 때에 했던 말을 읊는 듯했다.
-스스로 인간이라 생각하면 인간인 것이고, 인간이 아니라 생각하면 인간이 아닌 것입니다.
자일의 말에 왈칵 화가 나 그녀를 끌어안고 한 말이었건만, 카리나가 이렇게 마음 깊이 담아 두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왜?”
그녀는 다소 축축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왜 그런 말을 했니?”
뺨에 닿은 그녀의 손이 사붓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인간을 죽이고, 그러면서도 죄책감을 갖지 않고, 이용하고, 괴롭히는데.”
“…….”
“어떻게 그걸 인간이라 할 수 있니?”
이 질문은 그녀가 그간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모조리 대변해 주는 말인 것처럼 느껴졌다.
인간이 아닌 것.
실험체.
그 극악한 명사 안에서 그녀는 얼마나 발버둥을 쳤을까.
인정하면서도 인정할 수 없는, 아득한 괴리감 속에서 얼마나 괴로웠을까.
르네거는 더욱더 몸에 힘을 주었다.
일어나야 했다. 그녀의 눈을 마주해야 했다. 대답을 해야만 했다.
“콜록…….”
다행히도 그는 눈을 뜰 수 있었다. 여러 번 잔기침을 뱉으며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깜빡, 깜빡.
초점을 맞추며 눈앞의 카리나를 바라본다.
그녀는 별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그저 가만히 르네거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
“깨어 있었습니다.”
“알고 있어.”
카리나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녀는 물 잔을 들어 르네거에게로 기울여 주었다.
“괜찮니?”
그의 상태는 꽤 좋지 않았다.
땀으로 범벅이 된 셔츠는 옷의 기능을 다한 지 오래였고, 낯빛은 파리해 여윈 느낌까지 주었다.
카리나는 미간을 좁혔다.
“저는 괜찮습니다.”
“곧 죽을 것처럼 아파하던데.”
“지금은 아니니 괜찮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카리나는 슬쩍 눈을 흘겼다.
아무래도 르네거가 아픔을 드러내지 않는 게 언짢은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의 감정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르네거는 그녀의 의도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목을 붙잡는다.
“제가…….”
콜록.
르네거는 다시 한번 기침을 뱉은 후, 표정을 정돈했다.
“과거에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물 잔을 내려놓은 카리나는, 그를 응시하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라템의 신관들은, 성정이 자애롭고 유순해 큰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요.”
“기억해.”
아마 시엘이 죽었던 때일 테다.
그래서 시엘 같은 인간을 처음 본다고, 그래서 나쁜 인간은 죽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할 수 있다고.
어쩌면 그때부터 르네거의 변심과 타락이 예견된 것이 아니었을까. 카리나는 그렇게 자조했다.
“그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지금은 아닙니다.”
사경을 헤매다 온 이라고는 느낄 수 없을 만큼, 그의 두 눈은 뚜렷했으며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그들은 아포칼리타의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어린아이를 죽였고, 무자비하게 학살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신과 대적하는 이에게 관용이 없는 자는 결코 선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하지만.”
르네거는 숨을 한 번 들이켰다. 카리나의 손목을 잡았던 손을 들어 깍지를 낀다.
마치 이번에는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그렇게도 단단한 힘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역시 인간입니다. 그런 잔인한 짓을 자행하면서도, 인간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그 말은 카리나의 본심을 꿰뚫었다.
인간을 죽이는 내가 인간이 맞니.
그들을 죽이고서도 죄책감을 갖지 않은 내가 인간이 맞니.
그 질문에, 르네거는 그러하다 대답하고 있었다.
카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눈가가 떨려 왔다.
“선과 악의 판별은 인간이 하는 것이고, 인간이냐 아니냐의 판별 역시 인간이 하는 것입니다.”
르네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카리나는 그에 따라 느리게 시선을 올렸다.
그의 강인한 턱과 꽉 다물린 입과 높은 코와 깊은 눈을 바라본다.
“당신이 스스로를 인간이라 생각한다면.”
그는 카리나의 손등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그게 맞습니다.”
그의 입술이 닿은 곳에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부드럽고 말캉한 느낌이 손등을 타고 올라왔다.
르네거는 그녀의 손목과 팔, 그리고 어깨까지 올라와 카리나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의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 달뜬 체온이 다가왔다. 촉촉하고 붉어진 눈가가 도드라졌다.
르네거의 손이 뒷목을 감쌌다. 마디가 굵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뒷머리를 헤집었다.
숨이 얽혔다. 체온이 섞였다. 차마 내뱉지 못한 서로의 마음이 입안에서 오고 갔다.
카리나는 천천히 눈을 감아 내렸다. 혀끝에 맺혔던 말을 그에게 내 주지 않으며 삼킨다.
- 당신이 스스로를 인간이라 생각한다면 그게 맞습니다.
글쎄.
난 정말 나를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나쁜 짓을 하는 인간을 보며 인간 같지 않다 여기면서도 그들을 인간이라 보는데,
왜 나는 내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못할까.
그래.
이건 내가 인간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 자신에 대한 도덕적 잣대가 높은 것이라고.
……어쩌면.
난 평생 인간이 될 수 없을지도 몰라.
카리나는 서글픈 마음을 앉히며 르네거의 뒷목을 그러당겼다.
* * *
아포칼리타의 탑이 있던 자리는 황폐하기 그지없다.
또다시 무너져 버린 탑.
일전보다 고도가 높았던 탑은 무너지며 더욱 큰 폭발을 일으켰고, 결과로 지면은 산산조각 갈라져 쉬이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마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은 마치 주인을 잃은 것처럼,
아비를 잃은 것처럼,
그렇게도 서글픈 음성으로 끊임없이 울부짖고 있었다.
이때.
켜켜이 쌓인 잔해가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그리고 곧장 초록색 액체가 분수처럼 폭발해 튀어나왔다.
우우웅.
마물들은 더 크게 울부짖었다.
쾅!
탑의 잔해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하늘까지 튀었던 초록색 액체는 증발한 지 오래였다.
새까만 기운을 두르고 있는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 한 점이 없는데도, 검은 로브가 가뿐하게 흩날렸다.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새하얀 뼈가 덜컹거리며 움직였다.
카오스.
카오스 아포칼리타.
마물들은 그의 등장에 환호하며 발을 굴렀다.
쿵, 쿵, 쿵.
어둠이 찾아온다. 조금의 빛도 없는 칠흑의 어둠이 세계의 끝을 가득 메웠다.
카오스는 오랜만에 맞이하는 바깥의 공기가 만족스럽다는 듯, 크게 웃으며 몸을 곧게 폈다.
잔해의 바깥으로 나온 그는 품에 안은 것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뼈, 라고 부르기에는 무른 것.
살점, 이라 부르기에는 새까만 것.
무엇이라 명시할 수 없는 것이 그의 품에서부터 데구루루 굴러 나왔다.
카오스는 그것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뼈만 남은 손으로 그것을 움켜잡는다.
회색빛의 연기가 그의 손에서부터 흘러나와 구를 뒤덮었다.
“아들아.”
텅 비어 있는 그의 안광이 반짝 빛을 냈다.
“눈을 뜨거라.”
번쩍.
자일의 붉은 눈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