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그래서.”
아힌의 차가운 음성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페넬로피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르네거에게 데이펜의 반지를 줬다는 말이야?”
페넬로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힌은 튀어나오려는 분노의 말을 씹어 삼키며 요를 바르쥐었다.
아힌의 손은 붕대로 감싸져 있다. 손뿐이랴. 팔과 어깨, 그리고 얼굴 반쪽도 칭칭 감겨 있었다.
아포칼리타, 케투스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까닭이다.
이렇게까지 강한 아포칼리타와 개인으로 대적한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아힌은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서 하염없이 오갈 수밖에 없었다.
죽음의 공포를 처음 느낀 그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죽는다. 죽어 버린다. 더 이상 살아가지 못한다…….
그는 신실한 신관이고, 구원받는 죽음을 기대하며 살았었다.
하지만 막상 죽음을 맞닥뜨리게 되니.
‘……죽기 싫었던 마음이 더 컸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해야 했다. 아힌은 쫓아오는 죽음을 피하고자 급급했었다.
그렇기에 르네거가 떠올랐다. 그가 살아 돌아온 것에 대해 비난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그래서 르네거가 나타나 자신을 치료해 준 것일까.
“하…….”
아힌은 붕대가 감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의 긴 은발 머리가 분분하게 흩어졌다. 자줏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번뜩였다.
“아무리 르네거가 우리를 도와줬다고 해도, 상의조차 없이 그에게 성물을 넘긴 건 정말 믿을 수가 없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어투는 다정했지만 담긴 뜻은 차갑기 짝이 없다. 페넬로피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아힌은 그런 페넬로피를 지그시 응시했다. 변명이라도 해 보라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페넬로피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어찌 말을 하겠는가?
카리나 아포칼리타가 자신을 도와줬고,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 성물을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혀끝에 머무른 말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아포칼리타의 탑으로 간다 해서 빌려준 거야. 어쨌든 그들을 무너뜨리는 게 중요하니까.”
“하지만.”
아힌은 반발하듯 먼저 말을 뱉었지만, 이내 말을 잇지 못하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돌려받아.”
페넬로피는 다시금 주억였다.
“당연히 그럴 거야.”
그녀의 어두운 낯빛을 보며, 아힌은 재차 한숨을 뱉었다.
페넬로피는 수장으로서 할 일을 한 것뿐이다.
신을 모시고 아포칼리타를 대적하는 데이펜의 수장으로서, 몸이 다친 지금 함께할 수 없으니 그들에게 반지를 쥐여 준 것이라는 걸 당연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포칼리타를 척살해야 하니까.
……그렇지만.
페넬로피가 르네거와 함께하는 것이 싫었다. 그래. 르네거가 아포칼리타를 없애건 말건, 페넬로피가 그와 접촉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러한 감정을 가지는 자가 과연 신실한 신자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의문이 치달았지만, 아힌은 애써 무시했다. 더 깊게 생각하지 않고자 노력한다.
이때였다.
“이야기는 다 끝나셨습니까?”
열린 문 너머로, 금발의 미남자가 보였다.
순간 르네거가 돌아온 것처럼 보여, 페넬로피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러나 곧이어 그가 누구인지 인식한다.
케셰트 라템.
페넬로피의 두 눈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일이 다 끝나고 와 놓고 참 뻔뻔하시네요.”
그녀는 잔뜩 비꼬는 어투로 말했다. 하지만 케셰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라템의 대신전과 캄바이트의 마탑은 거리가 머니까요. 그렇게 급했다면 워프석을 전달 주시지 그랬습니까.”
그는 빈정거리며 대꾸했다.
하, 헛웃음을 뱉는 페넬로피의 옆에 몸을 앉힌다.
“그들이 아포칼리타의 탑으로 갔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케셰트는 미간을 좁혔다. 푸른 눈동자의 테두리가 얼핏 일그러졌다.
“하면 아포칼리타의 탑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다는 말인데…….”
“그들과 함께 움직이는 건 안 됩니다.”
아힌의 말이었다. 아차 싶기는 했지만 이미 뱉은 말.
아힌은 아무 표정도 내보이지 않으며 케셰트를 응시했다.
케셰트의 입술이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저 역시 싫습니다. 라템을 배신하고 아포칼리타와 손을 잡은 그와 어떻게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안 된다.’와 ‘싫다’의 간격은 머나 멀었지만 케셰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는 손등으로 턱을 괴며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탑으로 가는 방법을 알아야 할 텐데…….”
그의 일그러졌던 눈동자가 자리를 잡았다.
“그들 중 하나만 붙잡으면 방법이 나오겠군요.”
* * *
“르네거는?”
르네거에게 약을 먹여 주고 나온 카리나를 맞이한 건 피에톤이었다.
“다시 자고 있지. 아직 회복이 안 되었으니.”
“그렇군.”
피에톤은 신전의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새까만 벽돌과 초록색 머리카락이 꽤 이질적으로 보여, 카리나는 설핏 조소할 수밖에 없었다.
“급조한 것치고는 신전이 꽤 좋군.”
이런 카리나의 생각을 모르는 피에톤은, 신전의 내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들은 샐러딘이 열어 준 포탈을 통해 아포칼리타의 신전에 와 있었다. 진즉 결계를 쳐 둔 곳이라 안전하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내 실력이 워낙 출중하잖니.”
카리나는 그를 스쳐 지나가며 대꾸했다.
피에톤은 그런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러니까 내 복수를 해 줘야지.”
카리나는 무심히 그를 돌아보았다. 짐작하기 힘든 이채가 그녀의 두 눈을 스쳐 지나간다.
“또 그 얘기니?”
카리나는 제단 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등 뒤에 손을 대고, 한쪽 다리를 꼬며 피에톤을 비스듬하게 바라본다.
“말했잖아. 아포칼리타와의 전쟁이 끝나면 해 주겠다고.”
“그게 언제가 되겠나?”
“글쎄. 잘 모르겠는걸.”
“카리나 아포칼리타!”
피에톤은 왈칵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인내심이 바닥을 보인 탓이다.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라는 말인가!”
그는 격분한 상태로 말을 이었다.
“전쟁을 하다 그들이 죽어 버리면? 제대로 복수조차 못 하고 죽어 버리면? 그럼 어떻게 할 건데!”
그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발발 떨리고 있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는 것으로 보아 피가 제대로 돌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발악과도 같은 분노에도 불구하고, 카리나는 무심한 시선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런데…….”
카리나는 눈을 느리게 올려 뜨며 말했다.
“헬리아스는 왜 죽었니?”
피에톤의 몸이 우뚝 멈췄다. 그는 사색이 된 얼굴로 카리나를 응시했다.
“그걸 네가 알아야 하나?”
“궁금해서.”
카리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손에 턱을 괴었다.
흥미로움이 가득한 비소를 입가에 건다.
“너도 말하고 싶을 거 아니야.”
꿀꺽.
피에톤은 마른침을 삼켰다.
저 아포칼리타는 뱀과 섞인 실험체라는 사실이 지극히도 잘 어울리는 이였다.
간악한 혀를 가졌고, 매혹적인 눈을 가졌다.
그녀와 대화할 때면 속절없이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헬리아스는 마법을 쓰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툭 말이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피에톤은 잠시 인상을 썼다.
하지만 말을 꺼내자마자 마음이 평안해진 것이 느껴져, 그는 봇물이 터진 양 말을 잇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마력이 약한 줄 알았지. 라이트닝 같은 작은 마법은 할 수 있었으니 말이야. 하지만 그건 그녀의 생명을 깎아 내며 만들었던 마법이었다. 그래서 나는 헬리아스에게 다시는 마법을 쓰지 않는다는 맹세를 하게 만들었다.”
맹세라 하면 죽음의 강을 걸고 하는 맹세일 테지.
카리나는 잠자코 경청했다.
“다른 마법사들이 욕을 해도 괜찮았다. 헬리아스가 살아 있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죽지 않는 게 다행이었으니까.”
그는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아마도 헬리아스를 떠올리는 듯 싶었다.
“하지만 내가 아포칼리타와의 전쟁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그러나 그의 웃음은 곧장 사라졌다. 열패감과 비슷한 좌절감이 그의 얼굴을 뒤덮었다.
“헬리아스는 자살했다.”
그는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유서에 써 있더군.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는 나는 살아갈 가치가 없다며 말이야.”
고개를 떨어뜨린다. 바들바들 떨리는 어깨는 그가 느꼈던 슬픔을 아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왜 그녀가 그런 선택을 했겠나?”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핏발이 선 두 눈이 보였다.
“그녀를 괴롭히고, 핍박하고, 벼랑 끝까지 몰고 간 마법사들의 잘못이 아니겠는가?”
카리나는 침묵했다.
아니, 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녀를 가장 괴롭게 만든 건 마법을 쓰지 못하게 만든 너일 수도 있다고.
네가 보호했던 그녀는 네 보호를 견디지 못해 삶을 끊었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피에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을 죽여 다오.”
저렇게도 분노하고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죽이지 못하니 남을 죽이고자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라고.
“마지막까지 고통에 몸부림치게 해 다오. 살려 달라 빌어도 살 수 없는, 지옥과도 같은 임종을 맞이할 수 있게 해 다오.”
이는 나와 닮지 않았나.
형제들이 나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부정해 아포칼리타 전체에 복수의 화살을 겨누는 나와, 똑 닮지 않았나.
“그렇게만 해 준다면 너의 힘이 되어 줄 테니.”
카리나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신전의 천장을 바라본다.
그녀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천장에는 아포칼리타의 문양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악마를 그린 듯한 형상.
그 악마들은 그녀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단다.
네 혼란에 모두를 끌어들이면 안 되는 것이야.
네가 원래 하던 것처럼 인간들을 죽여. 사지를 자르고 목을 자르고 도려내 버려. 그래야 승리할 수 있을 테니까.
네가 인간답게 살고 안 살고는 또 뭐 어떠니.
너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렴.
“…….”
카리나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리고 설핏 실소를 내보였다.
“그래.”
카리나는 점점이 고개를 내렸다.
정면으로 마주한 그녀의 얼굴은 일전보다 더 무자비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해 줄게.”
목소리조차도, 더 싸늘해진 것 같다고.
피에톤은 떨리는 주먹을 펴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