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르네거는 명멸하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눈을 올려 떴다.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한 시야는 그의 메스꺼운 속을 더 뒤틀리게 만들었다.
우욱.
그는 몸을 옆으로 돌리며 헛구역질을 했다.
눈을 떠 카리나와 대화를 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몸은 이 지경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위로의 말을 하고 입을 맞출 때까지만 하더라도 몸은 단순히 부상을 입은 정도,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한데 왜 갑자기.
우욱. 그는 다시 북받치는 통증을 느끼며 이를 깨물었다.
한 손으로 침대를 받치며 몸을 일으킨다.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풀썩 쓰러지기를 여러 번, 그는 겨우 허리를 세우고 헤더에 등을 기댔다.
[꼴이 말이 아니구나.]
히론의 음성이었다.
언제부터 있던 것인가, 싶어 르네거는 아주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제게로 기어 오고 있는 히론의 모습이 보였다.
[살아 있는 인간 주제에 죽음의 강에 다녀와 놓고선 몸이 멀쩡하리라 생각했느냐.]
쿨럭.
르네거는 피가 섞인 기침을 뱉으며 눈을 찡그렸다.
“하지만 아침까지만 해도 괜찮았습니다만.”
[본디 죽음이란 한 번에 오는 게 아니다. 스멀스멀 기어 오는 어둠처럼 얕게 밀려오지.]
침대까지 다가온 히론은 꼬리에 달고 있던 작은 주머니를 툭 던졌다.
[레피오스가 전달한 것이다. 이것을 먹으면 속이 그나마 나아질 게다.]
르네거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주머니를 열었다.
주머니 안에는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동그란 무언가가 잔뜩 들어 있었다.
르네거는 개중 하나를 들어 삼켜 냈다. 싸한 감각이 목구멍을 타고 몸 깊은 곳으로 흘러내려 갔다.
들끓던 속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르네거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가팔랐던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임시방편일 뿐이긴 하지만……. 어쨌든 꼬박꼬박 먹거라. 후에 레피오스에게 진찰을 받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걱정은 무슨. 이 신성한 신전에서 시체를 치우기 싫어 그런 것이다.]
고개를 휙 돌리며 대꾸하는 히론을 보며, 르네거는 피식 실소했다.
뱀은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 답게, 히론은 항상 저렇게 본마음과 다른 말을 내뱉곤 했다.
카리나가 닮은 것일까, 카리나를 닮은 것일까. 르네거는 막연한 생각을 하며 편안해진 몸에 힘을 풀었다.
[한데.]
다시금 르네거에게 시선을 집중한 히론이 말했다.
[어찌 살아왔느냐?]
말의 뜻을 짐작하기 힘들어, 르네거는 막연히 히론을 응시했다. 히론은 꼬리의 방울을 파르르 떨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죽음의 강에서 돌아왔냐는 말이다.]
그의 새까만 눈에는 불신과 의심이 가득했다. 마치 르네거가 거짓을 말할까 성을 내고 있는 것처럼.
르네거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정말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는 참이었다.
자일과의 전투가 끝난 후, 르네거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몸에 힘이 빠져 있었다.
그대로 널브러져 가파른 숨을 몰아쉬었던 것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제 손끝에 닿았던 죽음의 강물도. 성검의 뜻 모를 외침도.
하지만 기억은 딱 거기까지였다.
르네거는 눈을 감았고, 눈을 뜨니 아포칼리타의 탑에 와 있었다. 몸도 움직일 수 있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하여 카리나를 붙잡고, 그녀에게 파묻혔던 것이건만.
히론은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여전히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르네거를 주시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면 네 목덜미를 다 물어뜯어 버릴 테다.]
“제가 히론 님께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건 모르지. 배신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준 요행이니까.]
히론은 차갑게 대꾸했다. 그는 목을 빳빳하게 세우며 르네거와 더 가까이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자일은 확실히 죽였느냐?]
“…….”
르네거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말아 쥐었다.
자일은 죽었다.
자일을 죽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피부에 스며 있는 묘한 찝찝함은 죽은 후에도 부릅떠 있던 자일의 두 눈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히론의 눈꺼풀에 하얀 막이 드리워졌다. 그러나 곧 사라진다. 그는 의뭉스러움을 품었던 시선을 거두며 세웠던 목을 내렸다.
[물을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탑으로 올 때, 다른 아포칼리타들을 보았느냐?]
르네거는 잠시 침묵했다.
카리나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앞뒤 보지 않고 달려갔던 그였기에 주변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기억을 되짚을 수는 있었다.
아포칼리타가 있었나?
……아니. 그 어떤 존재도 보지 못했다.
르네거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마물밖에 없었습니다.”
[……역시 그러한가.]
히론은 많은 뜻이 내포된 중얼거림을 뱉으며 혀를 찼다.
[나는 당분간 이곳에 없을 것이다. 카리나에게는 말하지 않았으니 카리나가 묻는다면 네가 대답하라.]
“어디를 가십니까?”
[네 알 바가 아니다.]
그는 냉정히 대꾸한 후 왔던 길을 되돌아 나아갔다.
르네거는 그를 붙잡으려 했다. 물을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왜 죽음의 강에서 돌아온 것을 예민하게 반응한 것인지, 왜 자일의 죽음을 되물은 것인지, 왜 아포칼리타의 존재를 언급한 것인지, 왜 카리나에게 말하지 않고 신전을 떠나는 것인지.
묻고 싶은 게 잔뜩이었지만 르네거는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우욱.
르네거는 검은 피를 왈칵 쏟아 냈다. 이게 무슨, 제대로 된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왈칵왈칵 쏟아지는 피는 새하얀 이불을 새까맣게 물들였다.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르네거는 몸을 웅크리며 더듬더듬 손을 뻗었다. 레피오스의 주머니를 열어 여러 개의 약을 한꺼번에 삼킨다.
[쯧. 인간의 몸은 나약하기 짝이 없구나.]
약이 넘어가는 목구멍이 싸하게 아파 왔다. 이는 아까 전 느꼈던 시원한 감각은 아니었다.
무언가가 갉아지는 것 같은, 그리고 무언가가 떨어지는 것 같은.
르네거는 으득 이를 깨물며 고통을 감내했다.
[너.]
몸을 완전하게 세운 히론은 르네거를 향해 혀를 내밀었다.
[인간이기를 포기할 생각은 없느냐?]
* * *
이쪽 대륙은 벌써 가을인가.
카리나는 손을 감싸는 쾌청한 바람을 느끼며 생각했다.
푸르렀던 나뭇잎들은 끝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바삭거리는 느낌이 절로 전달돼 왔다.
이 세계는 딱히 계절을 지칭하는 말이 없었다. 그저 더우면 더운 날이고, 추우면 추운 날일 뿐.
그래서 카리나는 전생의 기억대로 계절을 부르곤 했다.
그러니 이제 겨울이 올 것이다. 만물이 잠에 드는 죽음에도 가까운 계절이.
카리나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드높은 하늘이 그녀를 반겼다.
눈부시지 않은 새파란 하늘. 구름 한 점 없는 상쾌한 하늘.
이 역시도 전생에서 보았던 하늘과 엇비슷해 보여, 카리나는 낮게 조소했다.
“여기 있었네.”
카리나는 고개를 더 뒤로 젖혔다. 거꾸로 서 있는 샐러딘의 모습이 보였다.
“한참 찾았잖아. 방에도 없고 말이야.”
그는 바삐 걸어온 듯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몸은 좀 어때? 워프를 갑자기 해서 무리가 갔을 텐데.”
아포칼리타의 탑에서 나올 때 그녀가 열었던 포탈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본디 탑에서 바깥으로 나올 때 이용하는 포탈이 따로 있다.
탑이 위치한 세계의 끝에서 나올 때에는 어마어마한 힘이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오기는 어려워라. 아포칼리타의 탑이 딱 그 말에 어울리는 곳이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주저하지 않고 포탈을 열었다.
쓰러져 있는 르네거 때문이기도 하였고, 그 역겨운 탑을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여전히 샐러딘을 거꾸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 정도는 괜찮다고 했잖니.”
“항상 그렇게 말하면서 안 괜찮잖아.”
피, 샐러딘은 입을 비죽 내밀며 말했다. 그러곤 카리나의 옆에 몸을 앉혔다.
“아버지를 제대로 죽이지 않고 온 게 마음에 걸려.”
아.
카리나는 그제야 젖혔던 고개를 되돌렸다.
흐트러졌던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모아 어깨 앞으로 내린다.
창백한 얼굴과 새까만 머리카락은 이질적이었으나, 그렇기에 서로 조화를 이뤘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반쯤 벌렸다.
“일부러 그런 거야.”
그녀는 긴 치맛자락을 걷어 다리를 꼬았다. 몸을 반쯤 기울인다.
“아포칼리타의 관을 뺏어야 하니까.”
“그건 자일이 가지고 있잖아?”
“자일이 죽었으니 아버지에게 넘어갔겠지.”
“그건 추측일 뿐이야.”
“글쎄.”
후후. 카리나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아포칼리타의 관은 죽음의 신이 넘겨준 것이라고 했어. 우리를 위해서.”
그녀는 꼬아 올린 다리의 허벅지에 팔꿈치를 댔다. 손에 턱을 괴고 샐러딘을 비스듬하게 바라본다.
“죽음의 신이 준 선물이 죽음의 강에 버려져 있을 리 없잖니. 당연히 아버지에게로 돌아갔겠지.”
“그래서 아버지를 살려 뒀다고?”
“그래.”
샐러딘의 눈이 가늘어졌다.
“카리나.”
그는 코로 숨을 크게 들이켰다.
가슴이 크게 부풀다, 이내 한꺼번에 쪼그라들었다. 숨과 섞여 시름이 흘러나온다.
자신이 생각했을 때, 카리나의 행동은 어딘가 이상했다.
바로 옆에 아버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손 한 번 까딱하면 그를 죽였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곳을 빠져나오기에 급급했다.
저가 해결하겠다는 말에도 저를 끌고 나왔던 그녀였다.
당시에는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대체 왜?
“솔직히 말해.”
부푼 의구심은 곧이어 하나의 답을 내리게 만들었다.
“아버지를 또 죽일 수 없었던 건 아니고?”
연민.
그 때문이라고.
샐러딘의 명료한 두 눈이 카리나를 직시했다. 카리나는 눈을 길게 감았다가 올려 떴다.
“참…….”
그녀는 샐러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뺨을 감싼다.
“우리 샐러딘이 많이 컸네.”
읏. 뺨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샐러딘은 몸을 뒤로 젖히며 손등으로 뺨을 닦았다. 붉은 피가 묻어났다.
“그렇게 믿고 싶다면, 그러렴.”
카리나의 얼굴은 피처럼 비릿한 비소가 번져 있었다.
“세상은 언제나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우매한 존재들에 의해 돌아가기 마련이니.”
그녀는 분명 웃고 있는데, 풍겨지는 기운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저 웃음에 살점이 에일 것만 같았다.
샐러딘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아니라면 됐어. 말싸움 하려 온 건 아니니까. 깜빡한 게 있어서 그걸 말하려 온 거야.”
화제가 돌려지자 카리나는 그제야 얼굴에 드리웠던 한기를 흘려보냈다.
둥그렇게 입술을 말아 올리며 다리를 반대로 꼬아 올린다.
“좋은 소식이었으면 좋겠는데.”
“나태의 사도를 찾았어.”
“좋은 소식이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서쪽 사막 끝에 처박혀 있더라고. 오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쳐서…….”
샐러딘은 슬쩍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죽이고 힘만 가져왔어.”
인간을 죽이는 걸 싫어하는 카리나였으니까, 또 혼날 것이라 생각했다.
샐러딘은 주눅 든 채 어깨를 떨어뜨렸다.
하지만.
“잘했어.”
들려 온 말은 카리나가 지금껏 보여 줬던 행동들과 전혀 상반되는 것이었다.
샐러딘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놀란 기색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리나는 무감각한 태도를 유지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잖니. 우리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비식 조소했다.
새하얀 두 손을 내려다본다.
고르곤의 피를 넣어 초록색 핏줄이 돋아 있는 손을.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올렸다. 샐러딘을 바라본다.
“더 모아 올 수 있니?”
샐러딘은 천천히 눈을 굴렸다. 텁텁한 입안은 좀처럼 축축해지지 않았다.
“사도를? 아니면…… 사도의 힘을?”
카리나는 어깨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느리게 깜빡이는 두 눈 속, 담겨 있는 뜻은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다.
“네 마음대로 하렴.”
“……하지만.”
“이제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그녀는 무심히 대답했다.
그래. 이제는 정말 아무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나의 목표는 아포칼리타를 멸망시키는 것.
이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가? 얼마나 많은 슬픔과 설움을 겪었던가?
더 이상은.
이제 더 이상은.
멍하니 입을 벌리는 샐러딘을 뒤로 하고, 카리나는 다시 고개를 뒤로 젖혔다.
새맑고 푸른 하늘, 피어오르고 있는 새하얀 구름들. 그 너머로 보이는,
테라스에 서 있는 르네거의 모습.
그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흩날린다. 새하얀 피부가 햇볕을 받아 찬란하게 빛난다. 푸르른 두 눈은 하늘을 품어 드높기만 하다.
르네거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며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이곳으로 와, 내 손을 잡아.
내가 인간이었다면 대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가 그의 방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안겠지.
하지만.
나는 날개를 펴고 그에게 갈 것이다.
이제 인정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