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무지.
황량한 바람만이 불어오는 곳. 삶의 흔적이라고는 조금이라도 찾아볼 수 없는 곳. 죽음의 기운이 만연한 곳.
세계와 세계의 끝 사이에 위치한 중간 지점.
그곳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을 법한 높디높은 절벽 끝에, 몸을 크게 부풀린 히론은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있다.
그에게는 불만족스러운 기운이 만연했다. 바싹 마른 혀를 날름거리며, 백태가 낀 눈을 한곳에 고정한다.
[포탈이 막히다니. 이런 일은 이제껏 한 번도 없었는데.]
히론은 자조적인 중얼거림을 뱉었다.
자일의 죽음과 카오스의 부활을 조사하기 위해 이곳까지 온 그였다.
하지만 아포칼리타의 탑으로 가는 포탈은 꽉 막혀 있었다.
억지로 힘을 써 열어 보려 해도 안에서 단단히 걸어 잠근 듯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리라. 히론의 눈이 쐐액 가늘어졌다.
“네 말이 맞다. 이제껏 포탈에 접근하지 못하는 경우는 없었는데 말이야.”
히론의 곁에 서 있던 레피오스의 말이다.
그는 지친 듯 한숨을 뱉으며 세웠던 몸을 굽혀 바위에 걸터앉았다.
“나이가 드니 움직이는 것도 힘들구나. 고작 한 번의 워프만 했는데도 이리 지치다니 말이야.”
[그러니 카리나와 같이 오자 했지 않나.]
“하하, 그러기엔 카리나가 날 별로 좋아하지 않을 듯해서.”
[그게 무슨 말이냐? 둘 사이에 다른 일이 있었느냐?]
히론의 질문에, 레피오스는 빙그레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람 좋은 미소가 그의 얼굴에 만연하다.
히론은 날름거리던 혀를 집어넣고 아가리를 크게 찢었다.
[네놈이 그렇게 웃을 때면 항상 무슨 일이 있었지. 이젠 놀랍지도 않구나.]
쐐액. 히론은 동공을 가느다랗게 찢으며 레피오스를 노려보았다.
[카리나에게 함부로 하지 말거라.]
“그럴 생각도 없단다.”
레피오스는 어깨를 으쓱 올린 후 두 팔을 뒤로 뻗었다.
팔에 몸을 지지하고 등을 기울인 후 턱을 들어 하늘 쪽을 바라본다. 바싹 마른하늘이 그를 반겼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구나.”
그의 중얼거림에, 히론 역시 동의하는 듯 주억였다.
[하면 무슨 일이겠는가?]
히로은 조금의 불안함이 섞인 눈으로 레피오스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품고 있는 불길함과는 다른 말을 해 주길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일이 살아났다거나.”
레피오스는 확신이 섞인 어투로 말했다.
히론은 송곳니를 날카롭게 뽑으며 꼬리를 파르르 흔들었다.
[하지만 그놈은 죽음의 강에서 죽었다. 아무리 아포칼리타의 관이 있다 해도 생명의 신의 영역이 아닌 곳에서 죽었으니 부활은 불가할 텐데.]
“부활이 아닐 수도 있을 게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필사적으로 부정하려던 히론은, 숨을 크게 들이켜며 레피오스를 직시했다.
“재생산일 수도 있지.”
[……재생산?]
“그래.”
레피오스는 뒤로 젖혔던 몸을 되돌렸다. 팔짱을 끼고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린다.
“모든 아포칼리타들이 모습을 감췄다 하지 않았나?”
[그래. 나도, 그 누구도 보지 못했으니.]
후우. 레피오스는 깊은숨을 내뱉었다.
백발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미간을 좁힌다.
“하면 그들을 모두 죽인 후 마나핵의 정수를 모아 자일을 새로 만든 것일 수도 있을 테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히론은 입을 크게 벌리며 그대로 몸을 굳혔다.
죽은 아포칼리타들에게서 마나핵을 뽑는 건, 익히 있어 온 일이다. 카리나 역시 당한 일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런 경우는 미달된 실험체들의 것을 모아 삽입하는 것이었다.
일부러 아포칼리타를 죽여 마나핵을 뽑은 적은 없었단 말이다.
그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던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남아 있는 아포칼리타만 해도 수백은 다 되는데.]
“그러니 더욱이 그렇게 한 것이지. 수백의 마나핵이 들어가면 그만큼 강해질 테니.”
하지만 레피오스는 단호했다. 이미 그렇게 결론을 내린 듯싶었다. 히론은 숨을 가파르게 몰아쉬었다.
[하지만……!]
“하지만이 아니다. 히론, 잘 생각해 보거라. 카오스가 어떤 이였는지.”
히론의 눈이 갈 길을 찾지 못하고 허공을 헤맸다.
카오스.
카오스 아포칼리타.
교활하고 괴교한 이.
그라면 제 자식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쯤은……. 할 수 있었다. 히론은 몸에 꽉 주었던 힘을 풀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하면…….]
그는 다소 힘이 빠진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제 어찌해야 하겠느냐?]
수백의 마나핵을 집어넣은 자일은 강할 것이다.
르네거는 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카리나조차도.
히론은 암담한 미래에 두 눈을 질끈 감아 내렸다.
[난 카리나가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아.]
레피오스는 그런 히론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다소 무심한 시선이 히론을 스쳐 지나갔다.
“그 해답은…….”
그는 다시금 먼 산을 내다보았다.
“이미 카리나가 알고 있을 것이다.”
흔들림이 없는 시선. 그 끝에는 그가 바라본 미래가 담겨 있을 터.
히론은 바삐 목소리를 높였다.
[너는 미래를 보았지?]
그는 차근거리는 어투로 말했다.
[어떤 미래가 펼쳐지느냐? 응?]
“왜, 알게 되면 바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레피오스는 그런 히론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
보이지 않는 옆얼굴, 너머 빗나간 비소가 슬그머니 엿보였다.
“결코 바꿀 수 없는 것이 바로 미래지. 이를 알고 있으면서도 왜 그런 멍청한 말을 하는 것인지.”
레피오스가 일찍이 보았던 미래.
-그래서, 카리나 너는 복수를 마친 후에 죽을 생각이니?
그것은 변함이 없었다.
“모든 것은 신의 뜻이란다, 히론.”
레피오스는 다소 허무한 시선을 내던지며 말했다.
“결코 바꿀 수 없어.”
* * *
촤악!
테라스의 난간에 발을 디딘 카리나는 펼쳤던 날개를 모으며 아래로 내려왔다.
탁.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몸이 기울었다. 르네거가 그녀를 끌어안은 탓이다.
“왜 이러니, 갑자기.”
“좋아서요.”
르네거는 카리나의 허리와 등을 감싸며 그녀를 제 품에 깊숙이 넣었다.
“제가 바라보니 바로 올라오셨잖습니까. 그러니 좋은 것이지요.”
“……히론을 찾으러 온 거야.”
카리나는 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가까이 붙은 그의 얼굴을 쭉 밀었다.
르네거는 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뒤로 물러섰다. 카리나를 방 안으로 안내한다.
“히론은?”
“긴 외출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급히 나가니 제게 말을 전달해 달라 하셨고요.”
“……긴 외출?”
그런 적은 이제껏 없었는데.
카리나는 의뭉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뭐, 어차피 나중에 다 물어보면 나올 테니까.”
카리나는 어깨를 으쓱 올리며 소파에 몸을 앉혔다.
푹신한 쿠션이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감싼다. 다리를 꼬며 몸을 한쪽으로 기울인다.
“지금은 쉬는 시간이잖니. 당분간 어려운 일은 생각하지 말자.”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묻고 싶은 것도 말하고 싶은 것도 수백 가지였지만 르네거는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카리나의 말에 동의할 뿐.
르네거는 빙그레 웃으며 카리나에게로 다가갔다.
힘이 들어간 걸음걸이가 돋보인다.
하지만 인위적인 걸음처럼 보여, 카리나는 미간을 얕게 좁혔다.
“몸은 좀 어떠니?”
“좋아졌습니다.”
“거짓말.”
그녀는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피 냄새가 나는데.”
르네거는 눈가에 사붓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찰나.
본래의 웃음을 되찾으며 고개를 내젓는다.
“그럴 리가요.”
그는 싱긋 웃으며 몸을 옆으로 빗겨 섰다.
그의 뒤편으로 새하얀 침구가 보였다.
조금의 핏자국도 보이지 않는 깨끗한 침구였다.
착각인가.
카리나는 콧잔등을 한 번 찌푸렸다.
“아프면 말해야 돼. 바보처럼 참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는 얌전히 대답했다. 그리고 카리나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를 올려다보며 푸른 눈을 반짝인다.
“왜 옆에 안 앉고?”
카리나는 비어 있는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좋습니다. 당신을 이렇게 보는 게 좋으니까요.”
“……별 걸 다 좋다 하네.”
카리나는 턱을 괴며 고개를 돌렸다. 그에 르네거는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다소 붉어진 귓불이 보였기 때문이다.
르네거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카리나의 뺨과 귀를 한꺼번에 감쌌다.
“당신과 떨어져 있을 때…….”
부드럽게 내려오는 손은 따뜻하고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카리나는 마치 갸릉거리는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눈을 내려 감으며 그의 손길을 느꼈다.
“힘들었습니다.”
힘들다.
그 말에 담긴 뜻은 오직 한 개뿐이라.
카리나는 감았던 눈을 서서히 올려 떴다. 르네거의 꽉 다물린 입과 뚜렷한 두 눈을 바라본다.
씨익.
카리나의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마음이? 아니면 몸이?”
그녀는 꼬았던 다리를 펴 르네거의 가슴을 쿡 찔렀다. 르네거는 그녀의 가느다란 발목을 붙잡았다.
“알고 계셨군요.”
“모를 리가.”
르네거의 손이 발목을 따라 좋아리, 허벅지까지 올라왔다.
그의 몸이 천천히 일으켜진다.
반쯤 눕게 된 카리나의 위로 올라온 르네거는, 그녀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낮게 웃었다.
카리나 역시 그와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손을 뻗어 르네거의 양 뺨을 감싼다.
“그래서, 어땠어?”
그녀는 야살스러운 뱀처럼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날 안고 싶었니?”
르네거의 두꺼운 목젖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의 촉촉한 입술이 반쯤 열렸다. 뜨거운 숨이 흘러나온다.
“그렇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글쎄.”
카리나는 르네거의 목을 그러안았다. 그의 몸이 카리나에게로 풀썩 파묻혔다.
“네 성력이 내게 먹히겠지.”
르네거의 몸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다행히도 카리나가 눈치챌 정도는 아니라, 르네거는 여전하게 웃으며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내려왔다. 뺨, 입술, 턱, 그리고 목, 어깨.
뜨겁게 닿는 숨은 카리나의 손끝을 달싹 움직이게 만들었다.
“아직은 안 되겠군요.”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곧장 카리나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벌려진 입술 너머로 서로의 힘과, 숨이 뒤엉켰다.
마치 오늘 처음 카리나를 탐하는 것처럼 격렬해진 르네거의 태도는 카리나의 가슴을 더 간지럽게 만들었다.
흐읏.
카리나의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르네거는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 그녀의 뒷머리를 손가락으로 움켜쥐었다. 다리를 더듬는 손은 뜨겁기 짝이 없었다.
이때였다.
“아. 이런.”
벌컥 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창 하는 중에 미안한데.”
르네거와 카리나는 동시에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뺨을 붉게 물들인 채 고개를 돌리고 있는 피에톤이 서 있었다.
그는 머리를 헝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무래도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기에 기별도 없이. 르네거는 왈칵 짜증이 나 그를 깊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피에톤이 찾아온 이유는 명백했다.
“데이펜의 수장이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