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데이펜의 수장이 왔어.”
페넬로피가?
카리나는 르네거의 가슴을 밀치며 몸을 일으켰다.
르네거의 아쉽다는 듯한 손길이 살에 닿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카리나는 들어 올려졌던 치마를 내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자신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는 피에톤에게로 다가간다.
“페넬로피는 혼자 왔니?”
“……아니. 뭔 이상한 남자 둘과 왔다.”
피에톤은 힐끗 카리나를 쳐다보다, 이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더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인상을 찌푸린다.
“치마 좀 제대로 정리하라. 그게 무슨…….”
그는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카리나에게 던졌다. 하지만 그걸 받아 든 건 카리나가 아닌 르네거였다.
르네거는 피에톤을 지그시 주시했다. 싸늘한 시선이 그의 얼굴을 낱낱이 훑었다.
마치 피에톤을 감시하듯 적나라한 시선을 보이던 르네거는, 이내 표정을 정돈하며 카리나를 향해 생긋 웃음을 내비쳤다.
“한 명은 아힌 데이펜일 테고, 다른 한 명은 누군지 모르겠군요.”
그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카리나의 어깨를 감싸 주었다. 그녀의 구겨진 치마와 옷자락을 정리해 준다.
“그러게. 네게 반지를 돌려받으러 왔나.”
피에톤과 르네거 사이의 묘한 기류를 감지하지 못한 카리나는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돌려줘야 합니까?”
카리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너무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르네거가 보였다.
“돌려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하지 않았니?”
“그건 그렇지만.”
르네거는 말을 흐렸다. 그에 끼어 든 건 피에톤이었다.
“그래. 그건 데이펜의 성물이야. 힘을 빌려준 것이나 다름없으니 돌려줘야지.”
피에톤은 마치 선악을 판별하는 재판관과 비슷한 태도를 보이며 말했다. 르네거는 사붓 눈을 찡그렸다. 카리나를 바라본다.
“성검과 반지가 합쳐지니 엄청난 힘이 생겼었습니다.”
르네거는 죽음의 강에서 발현됐던 힘을 떠올리며 말했다. 카리나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그를 응시했다.
“그래서?”
“그러니, 당신께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카리나는 눈을 길게 감았다가 올려 떴다.
피식 갈라지는 실소가 그녀의 입가에 머문다. 방금 전까지 서로의 숨이 묻었던 입술이 매끄럽게 올라갔다.
“어쩜 이렇게 내 마음을 딱 아는지.”
그녀는 손등으로 르네거의 뺨을 쓰다듬었다. 힐끗 피에톤을 쳐다본다.
“넌 아직 배신자가 못 되나 보구나.”
피에톤은 왈칵하며 어깨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어떤 말도 하지 못한다. 변명조차 뱉지 못한다.
어쩌면 그녀의 말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피에톤은 르네거가 던지는 자신의 재킷을 받아 들며 머리를 헝클었다.
“르네거의 말이 맞아. 성물은 하나 보다 두 개가, 두 개보다 세 개가 될 때 더 강해지지.”
카리나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아포칼리타의 목표도 성물을 모으는 것이었고 말이야.”
아버지, 카오스 아포칼리타는 3개 가문의 성물을 모두 모으고자 하였다.
신의 선물을 모두 모으면 신에 비견하는 힘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카리나 역시도…….
“너도 성물을 모을 계획을 가지고 있나?”
피에톤의 질문이었다. 카리나는 느리게 눈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래?”
그녀는 씨익 입술을 비틀었다.
“캄바이트의 탑에 들어가 지팡이를 훔쳐 올래?”
피에톤의 얼굴이 바싹 굳었다. 경직된 눈에 초점이 사라진다.
그 행동에서 비춰지는 마음을 대강은 알 것 같아, 카리나는 짧게 혀를 찼다.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고, 르네거는 여기 있고. 피에톤, 너는 나와 함께 가.”
“저는 왜 남아야 합니까?”
르네거는 카리나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카리나는 슬그머니 발을 뒤로 뺐다.
“페넬로피가 있잖아.”
그녀는 르네거의 따가운 시선을 모른 척하며 중얼거렸다.
“둘이 만나는 건 딱히 내키지 않아서.”
아. 르네거의 입매가 둥그렇게 올라갔다.
그녀가 저와 페넬로피 사이를 불편해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기뻤다.
그 감정이 설사 질투가 아니라 한들, 다른 이유가 있다 한들 그녀가 제 행동을 제약하고 저를 다루려 하는 것이 기꺼웠다.
르네거는 여전한 웃음을 머금으며 제 뺨에 닿아 있는 카리나의 손을 잡아 손가락 끝에 입을 맞췄다.
“다녀오십시오.”
* * *
“늦네.”
짜증 나게.
페넬로피는 소파의 벨벳 결을 신경질적으로 만지며 중얼거렸다.
실은 오래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피에톤 캄바이트를 보낸 지 불과 십여 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짜증이 나는 이유는 기다림 때문이 아니라, 이곳 아포칼리타 신전에 자신이 와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데이펜의 수장이다. 신을 모시고 그를 섬기는 신관이란 말이
한데 신과 대적하는 아포칼리타의 본거지에 와 있다니.
-지금 당장 카리나 아포칼리타를 찾아가서 찾아와야 해.
이 모든 건 아힌의 비난과 차근거림 때문이었다. 페넬로피는 입술을 자근 씹었다.
그녀는 소파에 집중하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접견실의 곳곳을 살펴보았다.
부드러운 카펫과 따뜻한 벽난로, 푹신한 소파와 향긋한 향기까지.
죽음과 가장 밀접한 아포칼리타의 공간이라 하기엔 거리가 있는 곳이었으나, 이질적이게도 아포칼리타의 공간이 맞았다. 페넬로피는 미간을 깊게 좁혔다.
데이펜의 성전은 앉는 곳이 없다. 신의 앞에서 몸을 편히 할 수 없다는 교리 때문이다.
라템의 신전 역시 딱딱한 의자뿐이다. 캄바이트의 탑은 어떠한가? 그곳은 위로 솟구친 나선 계단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이곳은 다르다.
편안한 의자와 따뜻한 온기와 안온한 향기가 가득하다. 이는 전혀 기껍지 않았다.
‘아포칼리타의 신자들은 놀고먹기를 좋아한다 하였지.’
그렇듯 쾌락에 물든 신자들은 이 아포칼리타의 신전과 닮아 있었다.
이는 모두 아포칼리타의 간악한 묘수 때문이리라.
페넬로피는 그렇게 판단했다.
“왜 혼자 있는 걸까?”
이제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넬로피는 튕기듯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온 카리나는 자신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피에톤이 그녀의 옆에 서 있었지만 페넬로피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페넬로피는 카리나의 면면을 살폈다.
카리나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건 자신이 그녀의 가슴을 꿰뚫었을 때였다. 그에 피를 토하며 몸을 바르르 떨던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저를 지키려 했던.
‘……그만 생각하자.’
페넬로피는 자꾸만 고개를 들려는 죄책감을 외면했다. 죄악감을 외면하는 대가로 발생한 날 선 말이 입 안에 들어찼다.
“꽤 멀쩡해 보이네. 저번에는 다 뒈져 가더니.”
이죽거리며 내뱉는 말에 카리나는 다소 커진 눈으로 페넬로피를 응시했다.
그러다 푸흡 웃음을 터뜨린다. 페넬로피의 맞은편에 몸을 앉히며 고개를 까딱인다.
“다 뒈져 가도 뒈지는 건 아니라서 말이야.”
카리나는 다리를 꼬며 손에 깍지를 꼈다.
“분명 둘이 더 있다고 하지 않았니?”
그녀는 페넬로피에게 눈을 고정하며 말했다. 페넬로피는 그녀의 시선을 그대로 맞받아치며 대답했다.
“나머지는 잠깐 나갔어.”
“내 신전에서 내 허락 없이 외출이라…….”
카리나의 초록색 눈이 날카롭게 변모했다.
뱀의 것처럼 얇아진 동공은 그냥 보기에도 퍽 괴이했다. 페넬로피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네 신전이라니. 네가 믿는 신을 위한 신전이겠지.”
“내가 신을 믿는다고 생각해?”
카리나는 피식 실소를 뱉었다.
“난 나를 가장 믿으니, 나의 신전이라 하는 게 맞지 않겠어?”
그녀는 꼬은 다리를 쭉 펴며 말했다. 페넬로피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건방져.”
“이제 안 것처럼 말하네.”
카리나는 대단하지도 않다는 양 가벼이 대꾸하며 몸을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손에 턱을 괴며 페넬로피를 삐뚜름하게 바라본다.
“그래서, 왜 왔니?”
왜 왔냐고? 페넬로피는 헛웃음을 뱉었다.
“반지를 돌려받으러 왔지. 당연한 걸 묻고 그래?”
페넬로피는 짧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말했다. 자줏빛 눈동자에 담긴 사나운 이채가 카리나의 하얀 피부를 따갑게 찌른다.
“으음.”
하지만 카리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페넬로피는 사자 앞에서 꼬리를 세우는 개처럼 보였으니까.
“싫다면?”
카리나는 부러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야살스럽게 웃었다.
“이미 나는 반지의 힘을 다 알아 버렸는데, 그대로 돌려줄 거라 생각했어?”
“야!”
페넬로피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곧장 카리나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바닥 안에 붉은 기운이 가득 맺혔다.
하지만.
“그만.”
촤악!
페넬로피의 손에 초록색 액체가 잔뜩 쏟아졌다. 피에톤의 힘이었다.
“내가 있단 걸 잊지 마라.”
피에톤은 페넬로피를 직시하며 말했다.
그의 손끝에는 쏟아진 물과 비슷한 색의 힘이 맺혀 있다. 페넬로피는 인상을 찌푸렸다.
“소개할게. 내 든든한 경호원. 르네거까지 둘이나 돼.”
카리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페넬로피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너와 장난하기 위해 온 거 아니야.”
“나도 장난을 치는 게 아니란다.”
카리나는 손으로 턱과 뺨을 감싸며 페넬로피를 무심히 올려다보았다.
“진심이야. 네 반지를 돌려주지 않는다는 건.”
그녀의 손가락에 껴 있는 데이펜의 반지는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페넬로피는 욕지거리를 읊조리며 이마를 짚었다.
“정말 나와 싸우자는 거구나.”
“언제는 안 싸웠다고.”
카리나는 태연히 대꾸했다.
“먼젓번에도 날 죽이려 달려들었잖니.”
“그건!”
페넬로피는 격양된 어투로 소리 질렀다.
“실수였다고 했잖아.”
“그래?”
카리나는 눈썹을 좁히며 입을 비틀어 올렸다.
“그래. 그렇게 믿어 줄게.”
-그렇게 믿고 있어.
카리나의 말과 르네거의 말이 겹쳐져 들려왔다. 페넬로피는 머리를 헝클며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연합군과 동맹을 맺는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데이펜의 성물을 가져간다고?”
“동맹은 언제나 깨질 수 있는 거란다. 왜 이렇게도 어리석은 말을 하는 건지.”
카리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서 있는 페넬로피의 앞으로 다가간다.
반지를 끼고 있는 손을 활짝 펼친다. 데이펜의 반지가 페넬로피의 목전에서 반짝였다.
“가져갈 수 있으면 그렇게 해 볼래?”
페넬로피는 황급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카리나의 움직임이 먼저였다.
“안 되겠지만.”
쿵!
카리나는 페넬로피의 뒷목을 붙잡고 바닥을 향해 짓눌렀다.
“아악!”
페넬로피는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혔다. 어찌나 힘이 센지 온몸이 욱신거렸다. 페넬로피는 엉거주춤 팔을 디디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너 정말……!”
페넬로피의 양손에 새빨간 힘이 맺혔다. 자줏빛 눈동자는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해 보여, 피에톤 역시 힘을 방출했다.
이때였다.
“아포칼리타 주제에.”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카리나의 목덜미에 싸늘한 감촉이 다가왔다.
카리나는 비스듬하게 고개를 돌렸다. 제 목에 닿아 있는 새하얀 검과, 그 검을 들고 있는 이를 바라본다.
그는 바로,
“감히 신의 성물을 탐내는 것인가?”
케셰트 라템.
이 세계의 남주인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