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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105화 (105/135)

105화

“아포칼리타 주제에 감히 신의 성물을 탐내는 것인가?”

케셰트는 금방이라도 카리나의 목을 베어 버릴 것처럼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카리나는 그런 케셰트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케셰트 라템.

원작의 메인 남자 주인공.

모든 서브 남자 주인공들이 다 거론된 후, 소설 중반부에나 등장한 그였지만 케셰트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았었다.

이는 그의 건방지지만 매력적인 성격 때문이기도 하였고, 작가가 온 힘을 다해 그의 외모를 최대한 아름답게 묘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한 묘사답게, 케셰트는 매우 잘생긴 미남자였다.

찬란한 백금발과 푸른 눈동자. 그를 보고 있자니 과거의 르네거가 떠올랐다.

‘르네거보다는 못하긴 하지만.’

카리나는 피식 웃으며 제 목에 닿아 있는 검을 내려다보았다.

익숙한 외양의 검이었다, 그것은.

“르네거의 성검과 똑같이 생겼네.”

카리나는 검의 날을 손가락으로 쭉 밀며 말했다.

“만들었니?”

케셰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매가 사붓 굳는 것이 보였다. 카리나는 더욱 크게 조소했다.

“라템도 참, 비열한 짓이란 짓은 다 한다니까.”

“그 입.”

케셰트는 검을 쥔 손에 바싹 힘을 주었다.

“다물어라.”

날카로운 검의 날이 카리나의 손가락 살을 파고들었다. 뚝, 뚝, 피가 흘렀다. 카리나는 떨어지는 핏방울을 무심히 지켜보다, 이내 검을 와락 움켜쥐었다.

“싫다면?”

손바닥 살이 갈라진다. 후두둑 피가 떨어졌다.

“왜, 날 죽일 거니?”

그녀의 피가 닿은 검신의 곳곳이 붉어지다, 이내 검어졌다. 어둠의 힘이 스멀스멀 기어 오는 것이 느껴졌다.

케셰트는 힘을 주어 검을 빼려 했지만, 당할 수 없었다. 그의 눈이 커진다.

“그럴 수는 있겠니?”

카리나는 툭, 손을 놓았다.

힘의 반동으로 밀려난 케셰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검과 카리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믿기지 않았다. 저가 이렇게 물러서게 된 것이.

세카이나의 신전에서 나고 자란 케셰트는 라템의 수장에게 선택을 받을 때에 뛸 듯이 기뻤다.

그러며 생각했다. 역시 나는 훌륭한 인간이야, 가만히 있어도 나의 진가를 알아주니…….

라템의 수장이었던 스벤이 제게 자리를 넘겨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성검의 주인이 되었고 라템의 수장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나만큼 뛰어난 이가 없기 때문이라고, 물 흐르듯 당연한 생각에 그는 거부감 없이 훅 빠져들었다.

한데, 한데…….

‘고작 아포칼리타 따위에게 밀려나다니.’

케셰트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두 다리를 곧추세운다.

이곳이 아포칼리타의 신전이기 때문에, 저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필시 이 간악한 아포칼리타가 술수를 쓴 것이라고, 케셰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신전 안에서는 너와 싸우지 못하겠지.”

케셰트는 부러 숨을 크게 들이켜며 말했다.

“하지만 이곳을 나가는 순간, 너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

카리나는 손에 흐르는 피를 채 갈무리하지 않은 채 그대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새빨간 피가 새하얀 얼굴에 후두둑 묻었다.

내가 원작에서 지키려 하는 건 오직 결말뿐이다. 아포칼리타의 멸망이 펼쳐지는 결말.

그 결말을 위해서, 주축이 되는 여주인공인 페넬로피를 살려 두는 것이고.

거꾸로 말하면 페넬로피‘만’ 살려 둬도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참 너희는 주제를 몰라.”

카리나의 붉은 눈가에 핏방울이 닿았다.

“이렇게 내가 멀쩡한 상태일 때 덤비면 뼈도 못 추린다는 걸 알면서도…….”

“케셰트!”

-파스슷!

카리나의 시선이 닿은 화병의 꽃이 딱딱한 돌로 변했다. 그곳은 케셰트가 서 있던 곳이었다.

“왜 이렇게 덤비는 걸까.”

카리나는 케셰트를 밀친 페넬로피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페넬로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가는 게 보였다. 더불어 케셰트까지도.

“선택권을 줄게.”

카리나는 돌로 변한 꽃 중 한 송이를 들어 올렸다.

“지금 내 말에 얌전히 복종하고 돌아가든지.”

뚝.

꽃의 모가지가 힘없이 꺾여 떨어졌다.

“이곳에서 죽든지.”

* * *

르네거는 테라스의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쿨럭.

피가 섞인 기침이 다시금 올라왔다. 하지만 아까처럼 격한 통증은 아니었기에, 그는 들끓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천천히 골랐다.

-인간이기를 포기할 생각은 없느냐?

히론의 말이 떠올랐다.

그에 르네거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숙였을 뿐, 히론의 시선을 회피했을 뿐.

어떤 답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물론 르네거는 카리나의 강함을 존경했고, 아포칼리타의 불멸을 동경했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가 아포칼리타가 되기를 바랐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무언가를 존경하고 동경한다는 건 자신이 그 존재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함에서 오는 것이었으니까.

그는 태생부터 인간이었고, 죽을 때도 인간인 채로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히론의 말에 즉답을 할 수 없던 것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것이었으므로.

‘하지만…….’

히론이 내밀어 준 손을 잡는다면, 지금보다 더 강해질 터였다. 그렇다면 카리나에게 더 도움이 될 수 있 겠지.

이리 생각을 하니 또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었다.

르네거는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답답함이 목 끝까지 치달았다. 쿨럭, 다시 한번 기침을 뱉는다.

이때, 그의 시선에 익숙한 누군가가 담겼다. 저자는 분명…….

“아힌.”

르네거는 곧장 난간을 짚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탁.

지면을 디딘 르네거는 아힌의 어깨를 휙 낚아챘다.

“아, 뭐야. 놀랐잖아.”

느닷없이 몸이 돌려진 아힌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르네거를 흘겨보았다. 르네거는 그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눈을 올려 떴다.

“왜 당신이 이곳에 있는 겁니까?”

케셰트는 으쓱 눈썹을 올렸다.

“페넬로피가 왔다는 말을 듣지 못했나?”

“그러니 그녀와 함께 있는 줄로 알았습니다만.”

“나는 잠깐 산책.”

“아포칼리타의 신전에서요.”

하, 르네거는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비소했다.

“무슨 꿍꿍이입니까?”

“꿍꿍이라니.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처럼 보이나 봐?”

“예.”

“이런.”

아힌은 눈을 찡그리며 르네거의 손을 뿌리쳤다. 어깨를 탈탈 털며 쩝 입맛을 다신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만난 건 데이펜의 황무지에서였다.

케투스 아포칼리타에게 당해 쓰러져 있던 아힌을 르네거가 구해 주었었지.

그 기억을 떠올린 르네거는 아힌의 몸을 살펴보았다.

아주 작은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그 특유의 메마르고 깨끗한 피부는 변함이 없었다.

‘정령의 힘을 이용한 것인가.’

르네거는 그의 몸에 두었던 시선을 거두며 다시금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돌아가십시오.”

“나는 조금 더 둘러보고 싶은데.”

“제가 접견실까지 함께 가겠습니다.”

“이거, 원. 더 꽉 막혀졌네.”

아힌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눈을 찡그렸다.

하지만 이렇다 할 적의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르네거가 올 것을 알았다는 것처럼.

그는 바람을 이용하는 자였으니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생각이기는 하였다. 르네거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이런 르네거의 생각을 알아챈 것일까.

아힌은 차가운 바람을 손가락 사이사이에 걸며 르네거를 올려다보았다.

“데이펜의 반지.”

“…….”

“돌려줄 생각은 있냐?”

르네거의 입술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의 푸른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어떨 것 같습니까?”

“그럴 줄 알았다.”

젠장.

아힌은 욕을 읊조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돌려주지 않는다면 전쟁이라는 건 알고 있지?”

“얼마든지요.”

르네거는 단호히 대꾸했다. 아힌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너희가 이긴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말투인데.”

“그러지 않겠습니까?”

“재수 없는 새끼. 그 콧대도 꺾일 날이 올 거다.”

“저를 먼저 이겨 본 후에 그런 말을 하십시오. 그럼 인정하겠습니다.”

아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반박하지는 못한다.

르네거의 말대로, 아힌은 르네거에게 패배했을 뿐 아니라 그에게 도움을 받은 입장이었으므로.

아힌의 눈이 사방으로 굴러갔다. 입안에 맴도는 말 중 할 말을 고르는 듯싶었다.

“네가 반지를 돌려주지 않으면.”

아힌은 그 특유의 비열한 비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페넬로피가 곤란해진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겠지? 너 같은 배신자에게 페넬로피가 독단적으로 성물을 준 것이니 말이야.”

르네거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무정한 빛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연합군의 궁극적 목표는 아포칼리타의 멸망이 아닙니까?”

그는 차분한 반론을 이었다.

“그러니 반지는 카리나에게 있는 것이 더 유용할 겁니다. 저희의 목표도 아포칼리타의 멸망이니까요.”

“아, 진짜.”

아힌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뱉으며 눈을 치켜떴다.

“아포칼리타고 나발이고 너 때문에 페넬로피가 곤란해질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거라고. 이러다 수장직에서 까지 물러나게 될 수도 있어.”

“그건.”

아힌의 말이 맞았다.

이번 일은 페넬로피가 데이펜 일족 전체에게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제가 상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신을 배신한 신자.

카리나를 제외한, 그녀의 목표를 제외한 무엇에도 신경을 쓸 수 없었다. 그래야만 했다.

“아힌!”

이때, 페넬로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힌은 재빨리 뒤를 돌았고, 르네거는 아힌의 뒤편에 서 있는 페넬로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굳은 얼굴이 보인다.

바싹 메마른 표정은 방금 전 자신의 말을 들은 것처럼 느껴졌다.

페넬로피는 르네거에게 조금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아힌의 손목을 붙잡았다.

“돌아가자.”

그리고 르네거에게 들릴 만큼,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전쟁을 준비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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