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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106화 (106/135)

106화

“그게 무슨 말이야? 전쟁이라니?”

아포칼리타의 신전을 빠져나온 아힌은 페넬로피의 팔을 낚아채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파. 놔.”

페넬로피는 그런 아힌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신경질적인 어조로 대꾸한다.

“너도 들었을 거 아니야? 데이펜의 성물을 주지 않겠다고 하는걸.”

“그건 그렇지만.”

아힌은 잠시 입을 벌리다, 이내 다물었다.

르네거에게 전쟁 이야기를 한 것은 단순한 겁박일 뿐이었다.

어쨌든 카리나 아포칼리타는 다른 아포칼리타들과 대적하고 있으므로 이용할 수 있는 데까지 그녀를 이용한 후 마지막에 그녀를 버리고자 생각했었으니까.

그래서 단순한 치기로 내뱉은 말이었건만, 정말 카리나 아포칼리타와 전쟁을 일으키려 하다니. 이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침착해, 페넬로피. 지금은 감정적으로 움직일 때가 아니야.”

“감정적?”

페넬로피는 눈을 사납게 올려 떴다.

“내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해서 이러는 것 같아?”

그녀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아힌은 아차 싶어 황급히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충분히 이성적인 판단이라 생각합니다.”

케셰트의 말이었다. 아힌은 그제야 그를 올려다보았다.

평소에도 싸늘한 기운을 내비치던 케셰트였지만, 지금은 그 정도가 심했다.

그의 푸른 두 눈은 마치 거대한 해일을 품고 있는 성난 바다와 같아 보였다. 아힌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카리나 아포칼리타는 우리를 배신했으니 말입니다.”

배신, 이라 하기엔 그녀에게 믿음을 준 적은 없다만 어찌 되었든.

케셰트는 눈을 찡그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저를 죽이려 했고, 데이펜의 수장님을 협박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확실한 적이 된 것이지요.”

“그래. 그러니까 캄바이트에게도 알려야 해.”

페넬로피는 케셰트를 뒤따라 말했다.

“카리나가 성물을 빼앗으려 한다고.”

절대 카리나의 생각처럼 되게 두지 않을 거라고. 페넬로피는 그렇게 다짐했다.

* * *

“제정신인가.”

접견실 소파에 널브러지듯 몸을 눕힌 피에톤은 빈정거림이 가득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연합군과 공고히 손을 잡아도 모자랄 판에 척을 지다니. 제정신이 아니야, 제정신이.”

그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단순한 중얼거림처럼 들렸지만, 카리나는 그가 자신에게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맞은편에 앉아 그를 흘겨본다.

“그럼, 반지를 넘겨주란 말이니?”

“전쟁을 피하려면 그렇게 했어야지.”

피에톤은 튕기듯 몸을 일으키며 대꾸했다.

“하지만 말했잖니. 성물이 필요하다고.”

“그건.”

윽, 피에톤은 입술을 깨물었다.

3개의 성물을 모두 모은다면 거대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카리나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의 행동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는 했다.

그렇지만…….

못내 마음에 걸렸다. 무엇이 마음에 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찝찝함이 가슴 한구석을 간지럽혔다.

이는 어쩌면 완전한 배신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피에톤은 뜨거운 숨을 뱉으며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캄바이트의 성물도 필요한 것인가?”

“왜 당연한 걸 묻고 그럴까.”

“……그것도 빼앗을 생각인가?”

“그런 야만적인 방법은 별로라서.”

카리나는 으쓱 어깨를 올렸다.

“받을 거야. 캄바이트의 수장에게.”

하? 피에톤은 콧방귀를 꼈다.

“피에라가 퍽이나 주겠군.”

그가 알고 있는 피에라라면,

성물을 그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고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 보관하며 신처럼 모시고 있는 피에라라면,

카리나가 말을 꺼내는 즉시 전쟁을 일으키고도 남을 이였다.

그렇기에 보란 듯이 그녀를 비웃은 것이건만.

“글쎄.”

되레 카리나는 피에톤을 비웃었다. 그녀의 날 선 눈이 스치듯 그를 지나갔다.

“해 보지 않고서는 모르잖니.”

그러며 시선을 먼 곳에 둔다. 마치 더 이상 이 주제에 대해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후우.

피에톤은 들끓었던 숨을 가라앉히며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 카리나의 옆모습을 지그시 응시했다.

카리나 아포칼리타는, 알다가도 모를 이였다.

아포칼리타의 멸망에 대해 미친 듯이 몰두하고 있는 걸 보면 감정을 폭발시킬 줄 아는 것 같은데,

자신을 포함한 다른 이를 대할 때의 고저 없는 태도를 보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대체 무엇이 거짓된 모습일까.

‘……어쩌면 모든 게 진실일 수도.’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이라고. 피에톤은 그렇게 생각하며 카리나의 모습 전체를 훑었다.

새까만 머리카락, 새하얀 피부, 커다란 눈과 높은 코와 갸름한 턱을 지나 어깨와 팔, 그리고 손까지 내려간 그의 눈이 어느 한 지점에서 바싹 굳었다.

“너. 그 손…….”

바로 지혈되지 않고 여전히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그녀의 오른손이었다.

“묶기라도 해라. 그게 무슨 꼴인가.”

피에톤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로 던져 주었다.

카리나는 날아오는 손수건을 낚아채며 그를 향해 부드러운 눈인사를 했다.

“고마워. 깜빡하고 있었네.”

깜빡했다고?

저렇게 피가 나는데?

피에톤은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카리나의 얼굴은 정말 평온했다. 마치 통증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피에톤은 입술을 말며 코로 숨을 길게 내뱉었다. 눈을 찡그리며 그녀를 살펴본다.

“아프지 않나?”

카리나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아프지, 당연히.”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태도였다. 해서 피에톤은 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왜 검을 멋대로 잡았나.

만들어진 성검이라 한들 라템의 성력이 들어가 있어 고통이 상당했을 텐데 왜 네 피를 내어 주며 그들을 공격했나.

궁금증이 치달았다. 그리고 묘한 짜증스러움도 그의 마음을 일정 부분 채웠다.

그런 피에톤의 생각을 알아챈 것일까.

카리나는 그의 손수건으로 묻은 피를 닦으며 입을 열었다.

“이쪽이 편해.”

피를 닦고 지혈하는 손짓은 지극히도 자연스러웠다.

마치 몇 번이고 해 본 것처럼.

“아픈 건 참으면 되거든.”

그래서 그녀는 고통에 익숙해 보였다.

피에톤은 또다시 이는 짜증을 참을 수 없었다.

* * *

샐러딘은 지금쯤 어디까지 갔으려나.

난간에 기대 먼 바깥을 내다보고 있던 카리나는 자조적인 중얼거림을 뱉었다.

나태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 다른 죄악의 냄새를 더 잘 맡을 수 있다며 호기롭게 떠난 샐러딘이었기에, 맡은 일을 더 잘해 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빨리 움직여 주면 좋겠는데.

카리나는 생각하며 몸을 뒤로 젖혔다. 허공에 둥둥 뜬 채 새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아포칼리타의 탑을 나온 이후,

그러니까 자일의 죽음과 탑의 붕괴를 목격한 이후,

카리나는 어딘가 텅 비어 있다는 감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건 감정일 수도 있었고, 생각일 수도 있었고, 또한 자신이 짐작하기 어려운 무언가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카리나는 텅 빈 감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는 기꺼운 것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다소 날카로워진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터였다.

‘그래서 오늘 페넬로피와도 싸운 걸까.’

평소였다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텐데, 싶다가도 평소에도 무자비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실은, 성물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은 원작에서도 있었던 것이었다.

원작에서는 데이펜의 지팡이를 먼저 획득한 자일이 차례대로 라템과 데이펜을 공격했었지.

하지만 지금 자일은 죽었으니…….

‘내가 하면 되는 일이지.’

어찌 보면 라템이 성검은 카리나가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이제는 캄바이트의 지팡이만 남은 셈이었다.

-그것도 빼앗을 생각인가?

아니. 그럴 생각은 없다. 아직까지는.

피에라를 설득해 볼 생각이었다. 그녀는 적어도 말이 통할 상대처럼 보였으니.

하지만 설득이 안 된다면…….

또 죽이고, 죽이고, 죽여서.

모두 죽인 후에, 아포칼리타의 멸망을.

‘속이 안 좋네.’

카리나는 눕혔던 몸을 일으키며 눈을 찡그렸다.

더 이상 인간처럼 살겠다는 마음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만들어진 괴물이라는 것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죄책감과 도덕심이라는 인간의 학습된 사회성이 그녀를 속박했다.

이런 모순은 내가 인간인 채 아포칼리타로 태어나 버렸기 때문일 테다.

카리나는 자조적인 조소를 뱉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때였다.

방문이 열린 듯, 길쭉한 그림자가 그녀의 뒤편에서 비춰졌다. 카리나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히론?”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다름 아닌 히론이었다. 카리나는 여전히 난간에 몸을 기댄 채 히론을 쳐다보았다.

“내게 말도 없이 나갔던데.”

히론은 잠시 움찔거리다, 이내 조막만 한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일이 있었다.]

“한참 걸린다면서?”

[그럴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했지.]

으음.

카리나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히론에게로 손을 뻗는다.

“무슨 일인데?”

히론은 카리나의 손을 따라 올라왔다. 그녀의 팔을 감싸고 눈을 마주친다.

[카리나. 놀라지 말고 들어라.]

히론의 검은 눈은 착잡함으로 뒤덮여 있었다. 백태가 낀 듯 눈가가 새하얬다.

[자일이, 새로이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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