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자일이, 새로이 살아났다.]
카리나는 눈을 길게 감았다 올려 떴다. 초록색 눈동자에 뜻 모를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침묵이 이어졌다. 굳게 닫혀 있는 입술은 조금의 틈도 내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던 히론은 걱정을 만연하게 띤 눈으로 그녀를 살펴보았다.
[왜 아무 말이 없느냐? 너무 충격을 받아 이러는 것이냐?]
“아니, 그건 아니고.”
카리나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구나, 싶어서.”
진심이었다.
딱히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렇구나, 자일이 살아났구나, 그렇게 됐구나. 이런 생각들뿐.
[쯧. 정신 차리거라. 이리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히론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자일 놈도 자일 놈이지만, 카오스의 냄새도 함께 났어. 그놈도 힘을 되찾은 듯하다.]
“아, 그래.”
카리나는 여전히 무덤덤한 태도로 대꾸했다. 히론의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네게도 예지 능력이 있었지.]
과거, 아포칼리타의 패배를 예측한 후부터 카리나에게 예지 능력이 있노라 판단을 내렸던 히론이었다.
카리나는 그런 히론의 생각을 구태여 정정해 주지 않았었고.
“그래서?”
그녀는 모르는 척을 하며 되물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느냐? 그래서 이렇게 담담한 것이고?]
카리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아버지가 되살아난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다.
그는 원작에서 가장 먼저 죽는 인물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일이 살아 있으리란 건……. 본능적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자일의 죽음은 곧 아포칼리타의 멸망이었던 원작이다.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그가 죽었다 하지만 아포칼리타는 멸망하지 않았다.
그래서 카리나는 어쩌면 자일이 살아 있을 수도 있으리란 생각을 했었다.
결과는 예측한 그대로.
‘후우.’
카리나는 사붓 미간을 좁혔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기억을 더듬는다.
원작에서, 자일은 페넬로피와 케셰트의 합공에 크게 다치게 된다. 죽기 직전까지 몰리게 된 그는 간신히 탑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형제들을 다 죽였지.’
그리고 마나핵을 뽑아 자신에게 집어넣었다. 더 강해지기 위하여.
“……그럼 말이야.”
카리나는 얼굴을 평평하게 펴며 히론을 응시했다.
“다른 형제들은?”
히론은 카리나를 흘겨보았다.
[역시 예지 능력을 썼구나.]
카리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히론은 그녀의 몸에서부터 바닥까지 내려온 후 고개를 빳빳하게 들며 몸을 일으켰다.
[다 죽었다.]
역시나.
카리나는 가느다란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렇구나.”
남아 있는 형제들을 한 명씩 떠올려 본다. 흐릿하게 떠오르는 그들의 얼굴들.
형제들을 혐오하기는 하지만, 그 탑을 증오하기는 하지만, 아포칼리타를 역겨워하기는 하지만,
“아쉽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었다.
무엇이 아쉬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감정은 아쉬움이 컸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두 손을 맞잡는다.
“이제 남은 아포칼리타는 나와 자일, 그리고 탑에 오지 않았던 형제들뿐이네.”
[탑에 오지 않은 놈들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히 다섯.
카리나는 원작을 상기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다섯의 형제를 놓친 자일은 그들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페넬로피와 케셰트에게 급습을 당해 최후의 전투를 벌인다.
승리의 여신은 페넬로피의 편.
페넬로피는 당당히 승리했고, 자일은 죽었다. 원작의 결말 부분의 내용이다.
‘이번에는 자일을 죽이는 게 페넬로피가 아니라 내가 되려나.’
카리나는 깔았던 눈을 들어 올리며 생각했다.
“그럼 자일은 남은 형제들을 찾으러 가겠구나.”
[그럴 수도 있겠지.]
“성물을 모을 시간은 벌 수 있겠네.”
카리나는 턱을 당기며 중얼거렸다. 히론의 눈이 새치름하니 길게 뽑혔다.
[돕지 않을 생각이냐?]
응?
카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를 도와?”
[숨어 있는 아포칼리타 놈들 말이다. 자일 놈이 찾아간다면 분명 죽을 텐데.]
“아.”
카리나는 짧게 탄식했다. 그리고 히론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내가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거라 생각하는 거야?”
히론은 침묵했다. 카리나는 그의 뱃속에 담긴 생각을 짐작했다.
“아멜과 제이슨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은데.”
그녀는 난간에 기댔던 몸을 떼어 내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히론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들의 죽음을 슬퍼한 건, 나와의 싸움에서 그들이 죽어 버렸기 때문이야.”
[…….]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니.”
음성은 무자비했고, 무자비했기에 무정했다.
히론은 씁쓸한 기색을 비치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렇게 실망할 건 뭐니.”
카리나는 비린 조소를 비치며 말했다.
“굳이 내가 그들의 목숨까지 책임져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죽은 형제들을 생각할 때에 드는 감정은 아쉬움, 그뿐.
죽을 형제들을 생각할 때에 드는 감정도 아쉬움, 그뿐.
이렇듯 얄팍한 감정뿐.
[하지만…….]
카리나는 말을 흐리는 히론을 지그시 응시했다.
“히론.”
그녀는 히론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의 차가운 얼굴이 그녀의 손바닥에 닿았다.
“내가 지킬 건 여기 있어.”
히론, 샐러딘, 그리고 르네거.
카리나가 지켜야 할 건 오직 이 셋뿐이었다.
“다른 건 신경 쓰지 않을 거야.”
그녀는 마치 스스로에게 암시를 하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
피에톤은 신전의 중앙 기둥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카리나가 따로 방을 마련해 주기는 했지만, 그곳에선 쉬이 잠을 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에톤이 아무리 캄바이트를 배신한 배신자라 한들, 그는 신을 믿는 신자였고 태양신의 아들이었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아포칼리타의 신전에 와 있는 게 어딘가 꺼림칙했다. 불편하기도 했고.
-넌 아직 배신자가 못 되나 보구나.
카리나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아직 배신자가 되지 못했기에 아포칼리타의 신전에 있는 것이 기껍지 않고 성물을 빼앗는 것이 불안할 수 있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런 건…….
‘버려야 하는 감정이다.’
신이나 캄바이트나 그 누구도 나의 누이를 지키지 못했다. 더불어 나의 누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캄바이트 그 자체가 아니던가.
나의 누이.
제대로 살아 보지도 못하고 죽어 버린, 한없이 가긍하고 안타까운 나의 누이.
그녀를 생각한다면, 그리고 또한 동정한다면 단단한 결심을 하는 것이 옳았다.
마음을 비워야 했다. 비우고 그들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저주해야 했다.
‘일어나자.’
그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올려 떴다. 그리고 숨을 들이켜며 몸을 일으켰다.
이때였다.
“일어났나 보네.”
가까운 곳에서 카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 살펴보니 카리나와 르네거가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멀쩡한 방을 두고 왜 이런 데에 있니.”
“당신의 호의를 무시한 듯합니다. 신전 밖으로 내보내도 좋겠군요.”
카리나와 르네거가 한꺼번에 말했다. 피에톤은 정신을 다잡으며 황급히 손을 저었다.
“그런 거 아니다.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나와 있던 거다.”
“정말?”
카리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고, 르네거는 피에톤을 주시하며 피식 비웃었다.
“아포칼리타의 신전의 좋은 방에서 잠에 들 수 없어 나와 있던 것은 아닙니까?”
“어머, 그럴 수도 있겠네. 너는 아직 완전히 배신하지 않은 배신자니까. 말이 좀 이상하지만.”
피에톤은 미간을 깊게 좁혔다.
“그런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는 카리나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이미 네 손을 잡았다. 이것만으로도 내가 배신자라는 건 확인되지 않는가?”
그의 음성은 단호했다. 그러나 더 단호한 건 그의 손을 뿌리치는 르네거의 행동이었다.
“손을 잡는 건 관용어일 뿐, 실제로 잡는 게 아닙니다.”
르네거는 노후하는 짐승처럼 으득 이를 갈며 말했다.
미친놈, 저거.
피에톤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거뒀다.
“왜 나를 찾아왔나?”
르네거를 귀엽다는 듯 쳐다보고 있던 카리나는 그제야 피에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워프 게이트 좀 열래?”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한 어투였다. 그래서 피에톤은 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미쳤군.”
그는 후우, 숨을 뱉으며 손바닥으로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가 무슨 부르면 나오는 마법 주머니라도 가지고 있는 줄 아는가? 워프 게이트를 열려면 워프석이 반드시 있어야……!”
촤르륵!
카리나는 아포칼리타의 탑에서 히론이 삼켜 두었던 워프석 여러 개를 피에톤의 앞에 내던졌다.
“있으니, 열 수 있지?”
이 귀한 것을!
피에톤은 황급히 주저앉아 워프석을 쓸어 담았다.
“어디로 갈 생각인가?”
워프석을 모두 다 그러안은 피에톤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캄바이트의 탑으로 갈 겁니다.”
르네거의 답이었다. 피에톤은 쓰게 웃으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성물을 가지러 갈 생각인가?”
직설적인 질문에, 카리나는 으쓱 어깨를 올리며 대꾸했다.
“그들이 준다면 내가 가지게 되겠지.”
“그렇지 않는다면?”
“글쎄.”
카리나는 픽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데이펜의 반지를 쳐다보았다.
라템의 성검, 데이펜의 반지.
두 개를 가지고 있는 그녀로서, 지팡이는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니,
“훔치러 가는 길이 될 수도 있겠지.”
어떻게든 그것을 손에 넣어야 했다.
* * *
샐러딘은 정글을 헤매고 있는 중이었다.
나태의 힘을 얻은 샐러딘은 다른 사도들의 기운을 보다 잘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탐욕의 냄새가 나는 이곳까지 온 것인데.
“에이씨, 어디 땅굴 파서 숨었나.”
퉤.
샐러딘은 침을 뱉으며 얼굴을 구겼다.
카리나에게 모든 사도를 모으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겠다고 엄포하고 떠나지 않았던가.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어떻게든 더 찾아봐야지. 샐러딘은 하얀 귀를 쫑긋거리며 기감을 기민하게 세웠다.
정글은 울창하기 짝이 없었다.
한 치 앞도 잘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넝쿨이 빽빽했다.
이럴 때 날개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빨리 3차 각성을 해야 할 텐데. 샐러딘은 카리나가 들으면 질색할 생각을 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때.
촤악!
샐러딘은 빠르게 도약했다. 커다란 나뭇가지 위에 몸을 앉힌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건 없다. 그렇다면 대체.
‘분명 인적이 느껴졌는데.’
샐러딘은 눈을 가늘게 뜨며 더욱 신경을 곧추세웠다.
“샐러딘 아포칼리타.”
낯선 목소리였다. 샐러딘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가 있는 나무의 윗 단계 나뭇가지에 서 있는 한 인간 남자가 보였다. 샐러딘은 하, 소리를 내며 눈을 들어 올렸다.
“넌 뭐야?”
샐러딘은 손톱을 길게 뽑았다. 그의 입술 사이로 뾰족한 송곳니가 튀어나왔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리라.
저 인간이 자신을 적대하고 있다는 것을.
샐러딘의 짐작은 맞았다.
남자는 허리에 매고 있던 검을 스릉 뽑아 들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찾았군.”
남자, 케셰트의 입가가 비스듬하게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