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으음.”
피에라는 들고 있던 서신을 툭 내려놓으며 미간을 좁혔다.
뻐근한 두통이 찾아온 듯, 몸을 기울이며 고개를 뒤로 젖힌다. 눈썹 뼈 부근을 지압하며 후우 한숨을 내뱉는다.
그녀가 읽고 있던 서신은 페넬로피 데이펜이 보낸 것이었다.
바로 데이펜의 성물을 카리나 아포칼리타에게 빼앗겼다는 것.
참으로 면 없는 일이지만 이를 밝히는 이유는 카리나 아포칼리타가 캄바이트의 지팡이도 노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절대 그녀의 술수에 넘어가지 말라고.
걱정과 불안과 분노가 모두 담겨 있는 글이었다.
피에라는 의자의 팔걸이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미약하게나마 손끝이 떨린다.
그녀에게도 서신에 담겨 있던 감정 모두가 전달됐기 때문이다.
“참…….”
이걸 어찌해야 할꼬.
피에라는 가늠할 수 없는 미래에 막막함을 느꼈다.
카리나 아포칼리타를 떠올린다.
그녀의 결심이 아포칼리타의 멸망이라는 것은 거짓처럼 들리지 않았었다. 그 뒤로 그녀가 보여 준 행보가 그러했으니 말이다.
캄바이트의 목표 역시도 아포칼리타의 멸망이었으니 카리나와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성물이라…….”
마탑의 가장 높은 곳에 보관한 지팡이는 피에라조차 보지 못한 지 수십 년이 다 되어 가는 터였다.
그만큼 캄바이트는 지팡이를 감히 손도 대지 못하는 성스러운 성물이라 여겼다.
한데 그것을 아포칼리타에게 넘긴다고?
피식.
피에라는 허탈한 웃음을 뱉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카리나 아포칼리타가 자신들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한들 그녀는 아포칼리타였다.
성물은 신의 선물. 신과 대적하는 아포칼리타에게 성물을 넘길 수도, 내어 줄 수도 없었다.
‘전쟁까지 불사해야 할 수도.’
피에라는 주먹을 바르쥐었다. 그녀의 살가죽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이때였다.
“수장님!”
마법사들이 자신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피에라는 의자에 묻었던 몸을 황급히 일으켜 문을 벌컥 열었다.
“무슨 일이오?”
“워프 게이트가 나타났습니다!”
“뭐?”
워프는 반드시 게이트 사용 허락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온 요청서는 없었다.
그렇다면.
“설마.”
피에라는 황급히 순간 이동을 했다.
자신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마력을 운용할 수 마법사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촤악!
탑 바깥으로 나온 그녀는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발견할 수 있었다.
어쩌면 저를 넘을 수 있는 마법사, 피에톤과,
“안녕?”
카리나 아포칼리타를.
“내 생각을 하고 있었나 봐?”
그녀는 르네거의 팔에 어깨를 기대며 싱긋 웃어 보였다.
* * *
“연락도 없이 이 무슨 일이오?”
접견실에 카리나와 단둘이 남게 된 피에라는 사붓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워프는 반드시 사용 허가서를 제출해야 하는 것. 그대가 아무리 우리의 동맹이라 한들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고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단단히 화가 난 듯 싶었다.
소파에 몸을 반쯤 뉘이고 있던 카리나는 그런 피에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
카리나는 손에 턱을 괸 채 피에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왜라니? 방금 이유를 말하지 않았소?”
“정말 내가 멋대로 워프를 해서 화가 난 거니?”
카리나의 뚜렷한 눈동자가 피에라의 얼굴을 향했다.
“아니면…….”
그녀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곱게 접혔다.
“저 책상 위에 있는 서신 때문이니?”
카리나는 손을 뻗었다. 책상에 올려져 있던 얇은 종이는 순식간에 그녀의 손아귀로 흘러들어 왔다.
“데이펜의 인장이네?”
그녀는 종이를 흔들거리며 말했다. 피에라는 황급히 뛰어가 종이를 낚아챘다.
“물건에 손을 대는 버릇이 있는 줄은 몰랐소만.”
“누가 대놓고 도발을 해서 말이지.”
카리나는 피식 웃으며 뉘였던 몸을 세웠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다리를 쭉 뻗는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니?”
어떻게.
성물을 넘길 것이냐 아니냐를 묻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피에라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녀가 오기 전, 이미 결론을 내리지 않았던가?
성물은 결코 내어 줄 수 없다고.
피에라의 두 눈이 반짝였다. 이를 지켜보던 카리나의 입술이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내가 아포칼리타의 멸망을 바라는 건 개인적인 복수심이라 해도, 너희가 멸망을 바라는 건 신에 대한 충성 때문이 아니니?”
피에라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부정은 아니었다.
그들이 아포칼리타를 멸망시키려는 이유는 단 하나.
신을 위해서.
신에 대한 충성 때문이었다.
카리나는 그 지점을 정확하게 짚어 냈다.
“그런데 왜…….”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눈 깜짝할 새 피에라의 목전에 선다.
“왜 나를 돕지 않는 거지?”
카리나의 검은 동공이 세로로 길게 찢어졌다.
쌕, 쐐액.
뱀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피에라는 자신도 모르게 호흡을 멈췄다.
“내가 아포칼리타라서?”
피에라는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다행히도 카리나는 저를 끝까지 따라오지 않았다.
후우.
피에라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두 주먹을 바르쥐었다.
고작 마주 선 것만으로도 위압감에 짓눌렸다.
이런 그녀와 과연 전쟁을 할 수 있을까?
암담한 미래에 눈앞이 깜깜했지만, 그렇다고 해 물러설 수는 없었다. 자신은 캄바이트요, 신관이었으므로.
“……우리는.”
피에라는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카리나를 직시한다.
“신의 정의를 따르고 있소.”
“그래서?”
“신이 말하는 정의는 당신들이 아니란 말이오.”
그렇기에 너에게 신의 충성을 맡길 수 없다고.
피에라는 그리 말하는 것이었다.
카리나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느리게 깜빡이는 눈 속, 찢어졌던 동공은 어느새 원래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그럼 너는…….”
하지만 카리나의 말은 끝마쳐지지 못했다. 느닷없이 르네거가 뛰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카리나!”
그는 피에라를 본 체도 하지 않으며 카리나에게 다가왔다.
르네거의 얼굴은 완전하게 굳어 있었다. 뒤따라 들어오는 피에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지?
카리나는 르네거와 피에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왜 이러니, 갑자기? 분명 나가 있겠다고 하지 않았어?”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무슨 일인데?”
후우, 르네거는 심호흡을 했다. 간신히 침착함을 유지하며 한 글자씩 힘을 주어 말했다.
“샐러딘이 납치됐습니다.”
* * *
카리나와 피에라가 접견실로 들어간 후, 르네거와 피에톤은 마탑의 정원에 주저앉아 하릴없이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카리나와 함께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히론까지 남겨 두고 간 그녀였기에 더 조를 수도 없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 그러는 것일까.
설마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피에라를 그 자리에서 죽일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르네거는 미약한 초조함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곧장 피에톤과 시선이 마주쳤다. 다소 하얗게 질려 있는 그의 얼굴을 보니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카리나는 함부로 인간을 죽이지 않습니다.”
“……뭐래.”
피에톤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픽 중얼거렸다.
“갑자기 그런 말을 왜 하는지 모르겠거든? 피에라가 죽든 말든 뭔 상관이람.”
“전 딱히 캄바이트의 수장을 이야기한 것은 아닙니다만.”
“나도 카리나가 함께 있는 게 피에라니까 나온 말이거든?”
“그런 것치고는 매우 당황하시는군요.”
“야. 너 진짜……!”
탁!
르네거의 무릎을 베고 자고 있던 히론의 꼬리가 세게 움직였다.
그는 눈을 뜨지도 않은 채 쫙 아가리를 벌렸다.
[자고 있는 내 앞에서 싸우지 말거라. 콱 팔을 먹어 버리기 전에.]
르네거와 피에톤 모두 입을 다물었다.
잠시의 침묵이 지나갔다.
르네거는 히론을 보다 편하게 해 주기 위해 그에게 쏟아지는 햇볕을 가려 주었고, 피에톤은 고개를 들고 멍하니 마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몇 차례의 바람이 지난 후, 피에톤은 제 뺨을 스치는 까끌까끌한 모래 바람을 휘저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여길 나갈 때까지만 해도 다신 돌아올 줄 몰랐는데.”
그는 자조적인 조소를 뱉었다.
“아포칼리타와 함께 다닐 줄도 몰랐지.”
“미래는 계획과 같을 수 없는 법이니까요.”
“그런 것치고는 너무 어긋나서.”
킥킥.
피에톤은 비소를 뱉으며 다시 고개를 되돌렸다. 르네거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그 개 같은 아포칼리타는 어디에 갔어? 얼마 전부터 안 보이던데.”
샐러딘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포칼리타의 사도를 찾으러 갔습니다.”
“듣던 중 다행이네. 여기 함께 왔으면 또 싸움이 났었을 거야.”
르네거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피에톤의 어깨에 있을 새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는 당신의 새는 어디 있습니까?”
“아. 정탐을 보냈지. 이제 곧 돌아올 때가 됐는데.”
피에톤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손가락 두 개를 입술에 대며 휘파람을 불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차분한 하늘 너머, 새하얀 새가 모습을 드러냈다.
“왔네.”
코버는 마탑 주변을 한 바퀴 크게 돈 후, 빠르게 낙하해 피에톤에게로 다가왔다. 퍼덕거리는 날갯짓이 어딘가 조급해 보였다.
“뭐야, 무슨 일 있어?”
피에톤은 고개를 갸웃하며 코버에게 팔을 내밀었다.
그의 팔에 다리를 얹은 코버는 황급히 지지배배 말을 뱉었다.
“……뭐?”
피에톤의 눈이 커졌다.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인지라, 코버는 더욱더 목청을 높이며 제가 보고 듣고 온 것을 말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너무나 충격적인 말에, 피에톤은 쩍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채 하지 못했다.
그는 머리를 크게 헝클었다. 그리고 르네거의 팔을 이끌었다.
“야, 일어나. 카리나에게 가야 돼.”
피에톤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르네거 역시 심상찮음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히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입니까?”
[그래. 무슨 일이냐?]
후우.
피에톤은 한숨을 뱉으며 입술을 짓씹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것이 일어났다. 그러니 사실이었다. 그러니 움직여야 했고.
“개놈이 납치됐어.”
* * *
“…….”
접견실 안은 조용하다.
샐러딘의 소식을 전한 후, 줄곧 침묵하고 있는 카리나 때문이었다.
모두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초조한 기운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
보다 못한 히론이 크게 입을 벌리려 할 때였다.
“그래서.”
한참의 침묵 끝에 나온 말이었다.
“샐러딘이 누구에게 끌려갔다고?”
그녀의 눈이 피에톤에게로 닿았다. 피에톤은 마치 제가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푹 떨어뜨리며 대답했다.
“……얼마 전에 우릴 찾아왔던 놈. 그놈.”
“검을 차고 있던 인간?”
“맞아.”
“아, 케셰트 라템.”
피식.
카리나는 조소했다.
“라템에서 그 아이를 데리고 간 것이로구나.”
그녀는 부러 정확한 발음과 목소리로 말했다. 피에라의 몸이 조금이나마 움찔거렸다.
라템에서 샐러딘 아포칼리타를 납치한 이유는 단 하나. 성물을 되찾기 위해서일 테다.
하지만 이미 카리나 아포칼리타는 캄바이트와 동맹을 맺고 있는 바. 이는 아포칼리타뿐 아니라 자신들도 나서야 하는 일임이 맞았다.
‘……하지만.’
성물을 되찾으려는 라템과 대적할 수 있을까? 아포칼리타의 편을 들 수 있을까?
피에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카리나는 그런 피에라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무심하고 싸늘한 시선이 그녀에게로 닿았다.
카리나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피에라가 그들을 돕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니.
“이게 너희가 말하는 정의니?”
이렇듯 진실을 후벼 파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피에라는 입술을 말았다. 아무 답도 하지 않는다.
“그런 거라면 참 알량하구나.”
카리나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탁, 손을 튕겼다.
쿠구궁!
땅이 흔들렸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엄청난 진동이었으나 카리나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고고하게 아래를 내려다볼 뿐.
그녀는 갈라진 땅 틈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와이번 언데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와이번이 퍼덕거리며 날아올랐다.
“내가 돌아올 때, 내 마음에 드는 답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피에라.”
카리나는 와이번이 내미는 손에 발을 얹으며 말했다.
“난 널 죽일 거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