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와, 이 미친 새끼들.”
샐러딘은 꽁꽁 묶인 두 손을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뱉었다.
탐욕의 냄새를 따라 정글을 헤매고 있던 그였다. 곧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희망에 반짝이고 있었건만.
“케셰트? 라템?”
하, 진짜.
샐러딘은 허무하게 웃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방심했기에 당했다는 구차한 변명은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그 인간에게 패배했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 샐러딘은 조금의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붙잡힐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가 자신을 생포하려 한 게 아니었다면,
‘그 힘에 깔려 죽었겠지.’
꿀꺽.
샐러딘은 긴장이 섞인 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네놈을 붙잡아서 아포칼리타로 가는 길을 열려 했는데…….
그는 널브러진 샐러딘의 머리채를 잡으며 말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생겼군.
중요한 것, 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샐러딘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카리나를 뜻한다는 걸 깨달았다.
케셰트의 옆에 데이펜의 수장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을 이용해 카리나를 꾀려고 하는 것이다.
으득.
샐러딘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3차 각성만 마친다면 이런 인간들 따위야 얼마든지 죽일 수 있을 텐데.
최근 들어 너무 안일해졌다. 더욱 훈련에 매진하며 살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후회한다 한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었다.
자신은 인간에게 패배했고, 붙잡혀 이곳으로 끌려왔다. 어딘지도 모르는 음습하고 더러운 곳에.
‘카리나가 구하러 올까?’
샐러딘은 입술을 말았다.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포칼리타는 본디 독자적인 개체였으니까. 절대 다른 형제의 도움을 받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그가 카리나와 가까이 지냈다 해도…….
‘날 버릴 수 있어.’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왔지만, 이는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내가 여기 어떻게든 나간다.”
샐러딘은 이를 꽉 깨물며 몸을 일으켰다.
손을 포박하고 있는 수갑은 데이펜의 힘이 담긴 것.
데이펜의 힘은 곧 대지. 대지를 태울 수 있는 것은 지옥의 불길.
“멍청한 자식들.”
샐러딘은 가슴에서부터 온 힘을 이끌며 두 손에 집중했다. 그의 가슴, 어깨, 팔, 모두가 뜨겁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손에 불꽃이 피어오르기만 해도 이 수갑은 두 동강이 나리라.
그렇게 생각했는데.
푸시식, 소리가 나더니 들끓었던 몸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엥?”
샐러딘은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그러며 다시 힘을 모아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야이씨, 이거 마력 제어구였냐!”
샐러딘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외침을 들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미친놈들. 신의 파편은 어디서 구해 와 가지곤.”
마력 제어구. 특히나 샐러딘 같은 아포칼리타의 힘을 막을 정도의 뛰어난 제어구는 쉬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태초의 주신이 흘리고 간 눈물로 만들어야만 제대로 제어할 수 있었다.
“남아 있는 게 얼마 없을 텐데, 그만큼 절박한 건가.”
샐러딘은 호기롭게 외쳤던 게 무색해질 정도로 어깨를 시무룩하게 떨어뜨리며 다시 주저앉았다.
“카리나가 구하러 오길 바라자.”
하아아.
샐러딘은 두 다리를 그러모으며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바깥에서 폭발음이 들려온 건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 * *
쾅!
피에톤은, 눈앞에 드리워진 압도적인 힘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카리나 아포칼리타가 강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녀의 전투를 본 적은 없던 그였다.
그간 카리나의 힘을 막연하게 상상만 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괴물…….’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카리나는 피에톤이 상상했던 것의 두 배. 아니, 세 배는 더 강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날개를 펴고 허공에 떠 있는 카리나는 무심하게 손을 휘둘렀다.
콰과광!
그녀의 손이 지나가는 곳마다 폭발이 이어졌다. 데이펜의 성전은 와르르 무너졌다.
하늘을 가득 메울 만큼 새까만 연기가 솟구쳤다. 하지만 폭발은 멈추지 않았다.
‘이런 힘을 가지고 있는데도 자일 아포칼리타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그는 얼마나 강한 것이란 말인가.
피에톤은 주먹을 바르쥐었다.
콰광!
폭발이 이어졌다.
피에톤의 도움을 받아 허공에 떠 있는 르네거는 미간을 깊게 좁히고 있었다. 그의 팔을 감싸고 있는 히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화가 많이 난 것처럼 보이는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까지 버려 두고 갈 정도면 정말 단단히 각오하고 있다는 것인데.]
버린 게 아니라 맡긴 거지만. 르네거는 어쨌든 히론의 말에 동의했다.
본래의 카리나라면 이렇게 큰 폭발을 일으키며 상대를 압박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름의 정당한 방법으로 상대와 제대로 전투를 벌이는 게 카리나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르네거는 다 무너져 버린 데이펜의 성전을 내려다보았다. 저 아래에 깔려 있을 인간들을 생각해 본다.
저들은 스스로가 죽을 것을 예상도 하지 못한 채 죽어 갔겠지.
르네거는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죄 없는 인간을 죽이는 것을 싫어하던 카리나였다.
정확히 그렇다고 말을 한 적은 없지만, 르네거는 그렇게 추측했었다. 그녀가 인간을 죽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그녀의 힘에는 자비가 없었다.
손끝이 가리키는 곳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스러졌다. 죽음의 기운이 지천에 가득했다.
샐러딘의 납치에 이성을 잃은 탓이리라.
르네거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서라. 지금 가서 무얼 한다고.]
“하지만.”
르네거는 튀어 나가려던 몸을 멈추고 히론을 바라보았다.
[왜, 인간을 죽이는 게 싫은 것이냐?]
히론은 잔뜩 빈정거렸다.
[아포칼리타는 그리 쉽게 죽이면서, 인간은 죽일 수 없다라……. 넌 역시 라템의 개인가 보구나.]
르네거의 미간이 좁혀졌다. 왈칵 감정이 올라온 듯, 그는 목소리를 높여 대꾸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다만 지금의 카리나는 온전한 판단을 할 수 없다 생각이 들기에.”
[그렇다 한들 카리나다.]
히론은 단호히 말허리를 끊었다.
[무슨 생각을 하건, 무슨 모습을 하건 카리나란 말이다.]
히론은 검은 눈을 싸늘하게 빛내며 말했다.
[지금의 카리나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겠지?]
히론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인간을 죽이건 죽이지 않건, 그녀가 폭주를 하건 폭주를 하지 않건 카리나다. 그 존재 자체는 변하지 않는 것.
하지만.
“카리나의 모든 모습을 사랑하고 있습니다만, 그러해도 지금의 저 모습은 아닙니다.”
르네거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히론은 아가리를 크게 벌리며 되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카리나가 후회할 것 같습니다.”
쾅!
들려오는 무자비한 폭음은 카리나가 이성을 잃었다는 증거다.
그녀가 후에 이성을 되찾고, 자신의 손으로 죽인 인간의 수가 백이 넘어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드러내지 않겠지만, 분명 슬퍼할 것이다.’
그렇기에 르네거는 카리나를 말리려 한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읽은 듯 히론의 날카로웠던 눈이 사붓 부드러워졌다.
[건방진 놈. 많이 컸군.]
“칭찬 감사합니다.”
르네거는 곧장 몸을 돌렸다.
그리고 보게 되었다.
이제야 데이펜의 성전에서 나와, 검을 겨눈 채 비죽 웃고 있는 케셰트를.
[가라.]
그는 튕기듯 달려 나갔다.
* * *
쾅! 쾅!
카리나는 그 어떠한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지금뿐이 아니다.
이곳까지 날아오는 동안, 그녀는 그 어떠한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케셰트가 샐러딘을 납치한 이유는 단 하나, 데이펜의 반지 때문이었다.
샐러딘은 자신 때문에 피해를 입은 것이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가 다친다면, 카리나는 심장이 찢길 것 같았다.
그가 죽는다면, 카리나는 또한 삶의 의지를 상실할 것 같았다.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샐러딘은 그녀의 마음에 크게 들어앉아 있었다.
그래. 마치 가족처럼.
그렇기에 카리나는 이성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수십의 인간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도, 수십의 인간들이 발버둥 치고 있는 걸 보아도, 그녀는 이성을 되찾을 수 없었다.
콰과광!
카리나의 손끝에서 새까만 힘이 뽑아져 나왔다. 그는 곧장 성전으로 날아갔고, 그곳은 와르르 무너졌다. 그 안에 있는 인간들까지도 와르르 죽어 버렸다.
사라져 버리는 생명을 짐작하자면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 생명은 내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내게 중요한 건 오직 샐러딘, 그뿐이었으니까.
카리나는 양팔을 벌렸다.
이렇게까지 인간들을 학살하고 있음에도 케셰트와 페넬로피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오도록 만들어야지.
카리나의 눈에 본성전이 담겼다. 그녀는 저곳을 삼켜 버리겠다는 듯 힘을 방출하며 몸을 떨었다.
이때였다.
피융!
“그대의 힘은 충분히 보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새파란 기운이 카리나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카리나는 한 바퀴 공중제비를 돌며 자세를 잡았다.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곳에 서 있는 이는,
“그러니 이제 나와 싸울 때가 아니겠나?”
케셰트.
콰앙!
카리나는 그를 향해 일격을 날리며 쏜살같이 낙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