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콰앙!
카리나는 케셰트를 향해 일격을 날리며 쏜살같이 낙하했다.
케셰트가 서 있던 땅이 깊게 파였다. 지반을 지지하고 있던 흙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 공격을 간신히 피한 케셰트는 으득 이를 깨물었다.
그가 샐러딘 아포칼리타를 납치한 건 순전히 도박이었다.
아포칼리타의 개인적인 습성을 알고 있는 그로서, 카리나가 샐러딘을 구하러 올 것이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카리나가 나타나지 않으면 샐러딘을 단번에 죽이려 했는데.
‘이렇게 흥분해서 달려들 줄이야.’
케셰트의 입가에 번듯한 비소가 걸렸다. 그는 성검의 끝을 카리나에게 겨눴다.
“내 생각보다 그 개새끼를 예뻐했나 보군.”
움찔.
카리나의 눈가가 미약하게 떨렸다.
그 변화를 놓치지 않은 케셰트는 더욱더 크게 입을 찢었다.
“그래. 그럼 이렇게 해 볼까? 네가 움직일 때마다 그 개새끼의 팔다리를 하나씩 자르는 것이다. 그러다 더 자를 것이 없어지면 목을 잘라 버리는 거지. 어때, 괜찮은 생각 같지 않은가?”
그는 비열하고 무자비한 웃음을 얼굴에 걸었다.
우웅, 새하얀 성검이 낮게 공명한다.
“어디 한번 움직여 보아라. 내 말이 협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테니.”
그는 승리감에 도취돼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카리나가 샐러딘을 찾기 위해 이곳에 온 순간부터 그의 승리는 예견된 것이었으니.
인질이 있는 적이야말로 꺾기 쉬운 이가 아니겠는가.
“꿇어라, 아포칼리타.”
케셰트는 순백의 검기를 발광하며 비죽였다.
카리나는 그때까지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고민하고 있는 것인가?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다. 어차피 자신이 이길 테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쉬운 승리에 그는 꽤나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아.”
들려오는 한숨 소리는 그의 확신을 깨뜨려 주었다. 숨소리에 확실한 업신여김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무르긴 했나 봐.”
탁, 그녀는 지면에 발을 디뎠다.
“이런 하찮은 인간 새끼가 감히 나를 협박하고 말이야.”
카리나의 발을 기점으로 땅이 새까맣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우웅, 우웅.
근원을 알 수 없는 깊은 진동이 사방을 메웠다.
“우매한 인간아.”
카리나는 저 멀리 서 있는 케셰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샐러딘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란다.”
휘익!
그녀의 손끝에서 새까만 줄기가 솟구쳐 나왔다. 마치 채찍처럼 뽑혀 나온 그것은 케셰트에게로 곧장 날아갔다.
쾅!
채찍이 지나가는 자리가 족족 까맣게 물들었다. 새까만 어둠이 묻은 땅은 얼마 가지 않아 폭발을 일으키며 풀썩 내려앉았다.
케셰트는 제게로 달려든 채찍을 간신히 피했다. 하지만 폭발까지 피한 것은 아니었다.
“쿨럭!”
그는 폭발에 휘말린 왼 다리를 허청이며 몸을 굴렸다. 흐려진 시야를 휘젓는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나의 것에 손을 댄 너희를 벌주고자 온 것이지.”
언제 이렇게 가까이.
케셰트는 바로 눈앞에 서 있는 카리나를 바라보며 숨을 삼켰다.
압도적인 공포가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방금 전까지 느꼈던 승리감은 그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만큼, 카리나 아포칼리타는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고작 손짓 한 번에.
“샐러딘을 죽이려고?”
카리나는 그런 케셰트의 어깨에 발을 디뎠다. 그의 몸을 짓누른다.
“그렇게 하렴. 마음껏 해.”
으윽.
케셰트의 잇새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카리나는 더욱 세게 발에 힘을 주었다.
“그 대가로 너희는 결코 죽음을 맞이하지 못할 것이다. 혼돈에 갇혀, 몸이 잘리고 살이 갈리는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되겠지. 그렇다고 해 죽을 수도 없단다. 죽고 사는 것을 영원히 반복하게 만들어 주마.”
그녀의 발끝에서 새까만 어둠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둠은 곧 케셰트의 살을 물들였고, 그의 살갗은 마치 화상을 입은 것처럼 벗겨지기 시작했다.
“이 벌이 바로 아포칼리타를 함부로 건드린 대가란다.”
카리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사방으로 뻗어 나갔던 검은 채찍이 한꺼번에 돌아왔다. 그녀의 팔을 칭칭 감은 채찍은 케셰트를 목표로 두며 날름거리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케셰트는 어떠한 반항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저 태양에 짓눌려 버린 느낌이었다. 벗어날 수 없는, 감히 벗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는.
카리나는 그런 케셰트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케셰트 라템.
원작의 남자 주인공.
원작의 케셰트는 페넬로피와 힘을 합쳐 자일을 쓰러뜨린다. 이는 그가 결코 약하지 않다는 뜻이었지만, 눈앞의 케셰트는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약했다.
‘성검 때문인가.’
카리나는 케셰트가 들고 있는 성검을 바라보았다.
인간 수천을 죽여 생명력을 모아 만든 성검.
인간의 생명력을 이용한다는 건 바다신의 성검과 같았지만, 그 힘은 차원이 달랐다.
‘역시 신의 힘은 비교할 수 없다는 거겠지.’
카리나는 르네거가 자신의 편에 선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손에 두른 채찍을 날카롭게 세웠다.
이렇게 약한 인간이라면 어차피 도움도 되지 않는다.
더불어 이미 원작은 어긋날 대로 어긋났기에.
‘상관없어.’
그녀의 손이 무자비하게 움직일 바로 그때였다.
“카리나!”
쾅!
붉은 화살이 카리나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챙!
카리나는 또다시 날아오는 화살을 쳐 내며 몸을 뒤로 비켰다.
그녀의 힘에서 벗어난 케셰트는 그제야 기침을 뱉으며 몸을 웅크렸다.
“아, 이런.”
카리나는 이마를 짚었다. 제게로 달려오고 있는 페넬로피가 보였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인간 두 명쯤은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카리나였지만, 상대가 페넬로피일 경우에는 달랐다.
페넬로피의 힘은 카리나에게 극독과 같았기 때문이다.
방금도 스친 어깨가 화끈거리고 있지 않은가. 회복도 되지 않고 있다.
저 힘에 한 번도 맞지 않고 싸워야 한다는 말인데.
‘이걸 어쩐다.’
카리나는 사붓 눈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이때였다.
“케셰트는 제가 맡겠습니다.”
기다렸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리나는 그쪽을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올렸다.
“꽤 늦었어. 알고 있어?”
“……피에톤을 찾을 수 없어 지상으로 내려오는 게 힘이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르네거는 짧은 변명을 한 후, 카리나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등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그의 힘이 스며들어 간다. 차츰차츰 뻗어 들어오는 힘에, 카리나는 입술을 둥그렇게 말았다.
“성검과 성검의 대결이겠네.”
“가짜는 진짜를 이길 수 없습니다.”
르네거는 대답한 후 손가락을 파득 깨물었다.
살갗이 터져 뚝뚝 흘러나오는 피를 카리나의 어깨에 흘린다. 새하얀 빛이 그녀의 상처를 감싸 안았다.
“괜찮으십니까?”
“덕분에.”
카리나는 꽤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나름 난감한 상황을 맞닥뜨려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르네거가 등장한 것이 아닌가.
르네거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제가 난감할 때가 되면 항상 나타나 손을 잡아 주었지.
‘자신을 희생하며 말이야.’
그의 맹목적인 사랑이 이제는 꽤 기꺼워졌다.
카리나는 뒤에 서 있는 르네거의 턱 아래를 긁어 주며 생각했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본다.
페넬로피는 금방이라도 제게 달려들 듯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케셰트 역시 검을 겨누고 있었고.
씨익.
카리나의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르네거.”
“네, 말씀하십시오.”
“가짜 성검의 주인 말이야.”
그녀는 케셰트를 가리켰다.
“목만 가지고 와.”
피식. 르네거 역시 실소를 뱉었다.
그는 카리나의 어깨에 나른히 입을 맞추며, 푸른 눈을 번뜩 올려 떴다.
“분부대로.”
* * *
휘이잉.
메마른 바람이 카리나와 페넬로피 사이를 휩쓸며 지나갔다.
페넬로피의 양손에는 붉은 힘이 가득 담겨 있다. 카리나가 움직이는 즉시 달려들겠다는 뜻이었다.
그에 비해 카리나는 아무 방비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무심하게 페넬로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할 셈이냐?]
카리나의 몸을 감싸고 있는 히론의 말이다. 그는 불안함을 지우지 못한다는 듯 커다란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카리나는 그런 히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글쎄. 어떻게 할까.”
그녀의 눈꺼풀이 느리게 감겼다. 느리게 떠졌다.
“나도 좀 위험할 것 같기는 한데.”
페넬로피의 힘에 두 번이나 당했던 그녀가 아니던가.
저 힘에 조금이라도 스친다면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우리라.
메두사의 힘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지금, 카리나는 꽤나 수세에 몰려 있었다.
하지만.
“죽여야 하나.”
그녀는 믿을 구석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패배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전에도 죽여서는 안 된다 하지 않았느냐?]
“그건 그렇지만.”
카리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처음 페넬로피를 죽이지 않으려 한 것은, 원작의 흐름 때문이었다. 자일을 죽인 인물은 페넬로피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이미 원작과는 다른 전개가 펼쳐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포칼리타를 멸망시키는 건 자신이 되리라 다짐을 한 지금.
페넬로피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계속 마음에 걸리는 건…….’
책을 읽으며 페넬로피를 응원했던 내 자신이 떠오르기 때문이겠지.
카리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뭐, 이제 와 연민을 느끼는 것도 우스운 일이니까.”
그런 기억은 이제 지워 버려야 할 때였다.
이 세계에서 산 지도 어언 이십여 년.
십여 년의 기억뿐인 전생을 붙들고 있기에는 내가 이곳에서 살아온 날이 더 많았다.
그래. 내가 아포칼리타로서 살아온 나날들이 더 깊고 길었다.
그러므로.
“싸워 봐야지.”
카리나의 녹색 눈동자가 발광하듯 빛이 났다. 곧이어 그녀의 온몸이 검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쿵, 쿠웅!
그녀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대지가 새까맣게 변해 갔다.
쩌저적!
지면에 균열이 생겼다. 땅을 찢어 버리는 것처럼 깊은 균열은 굵은 진동을 만들어 냈다.
촤악!
페넬로피는 제게 닿는 검은 기운을 뿌리치며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갈라진 땅 사이로 새하얀 뼈가 불쑥 튀어나왔다.
하나, 둘…… 수백 개.
수백 개의 언데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지를 빼곡히 채운 그들은 페넬로피를 향해 아가리를 벌리며 포효했다.
“일단 내 언데드와 놀아 볼래?”
휘잉!
카리나는 허공에 몸을 띄웠다. 손을 들어 올린다.
마치 마리오네트 인형을 조종하는 것처럼 그녀는 유려하게 손을 움직이며 언데드를 조종했다.
하지만.
“이깟 수에 내가 당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
페넬로피는 만만치 않은 인간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술식을 읊었다. 피처럼 붉은 선의 마법진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화르륵!
불길이 치솟았다. 정령왕의 불꽃은 감히 뼈다귀 따위가 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콰과광!
소환했던 것이 무색해지게, 불길에 휩싸인 언데드들이 와르르 쓰러졌다. 까만 연기로 기화되는 것들도 있었다. 언데드의 계약까지 파괴된 것이리라.
“아, 이런.”
카리나는 미간을 좁혔다.
정령왕의 힘은 분명 원작의 후반부에서 얻은 것일 텐데.
벌써 그렇게 진행이 된 건가.
카리나는 짧게 혀를 찼다. 그때였다.
피융!
그녀를 향해 수백 개의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카리나는 황급히 날개를 펼쳤으나, 수백 개의 화살을 모두 다 따돌리는 것은 무리였다.
[카리나!]
히론의 애가 탄 외침이 귀를 때렸다. 하지만 카리나는 흥분하지 않았다. 사라져 버린 오른팔을 가만히 내려다볼 뿐.
“카리나 아포칼리타.”
페넬로피는 눈을 사납게 번뜩이며 이를 갈았다.
“난 오늘 너를 죽일 거야.”
자신감에 차 있는 목소리였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카리나의 언데드를 모두 쓰러뜨렸고, 더 나아가 그녀의 오른팔까지 잘라 버렸으니.
페넬로피는 케셰트와는 결이 다른 승리감을 느끼며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탁.
땅으로 내려온 카리나는 펼쳤던 날개를 접었다.
페넬로피는 곧장 자세를 잡으며 양손에 힘을 머금었다.
아무리 카리나가 한쪽 팔을 잃었다 한들 그녀가 쉬이 무너지리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생각은 맞았다.
카리나의 괴기한 기운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녀는 올곧은 걸음으로 천천히 페넬로피를 향해 다가갔다.
“이걸 어쩐다.”
페넬로피와 세 걸음 정도의 거리만 남긴 카리나는, 오른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거칠게 뽑았다.
반지를 빼자마자 그녀의 검은 머리칼이 위로 솟구치며 나부끼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의 끝에서 검은빛이 발광했다.
반지는 카리나 본연의 힘을 억제해 주고 있던 것.
그것을 빼낸 행위는,
“나도 오늘 널 죽일 건데.”
그녀가 3차 각성을 한다는 의미였다.
카리나의 피부가 비늘로 뒤덮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