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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111화 (111/135)

111화

챙!

케셰트는 르네거를 향해 거듭 달려들었다.

챙, 챙!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서로의 귓불을 날카로이 스쳤다.

챙!

검을 맞댄 그들은 힘겨루기를 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꼭 한번 너를 만나고 싶었지.”

케셰트는 검 너머에 있는 르네거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망친 라템의 배신자를 말이야.”

그는 으득 이를 갈았다.

케셰트가 르네거에게 느끼는 감정은 분노, 그 이상의 것이었다.

이는 르네거가 신을 배신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세카이나에 있던 그가 라템의 대신전으로 불려 온 후, 숱하게 들어 왔던 말은 ‘르네거의 대용품’이라는 말이었다.

그는 도망친 성검의 주인을 대신하는 대리자일 뿐이었다.

그가 쥐고 있는 검 역시도 사라진 성검을 대신하는 용품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케셰트는 끊임없이 비교당했다. 르네거는 그러하지 않았는데, 르네거는 더 훌륭했는데, 르네거는, 르네거는……!

결국 참지 못한 케셰트는 라템의 전 수장, 스벤의 가슴에 검을 꽂았다.

같은 신자를 죽였음에도, 그것도 라템을 이끄는 수장을 죽였음에도 케셰트는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저 기뻤다.

그리고 후련했다.

드디어 르네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으니.

하지만 그가 수장직을 물려받고 난 후에도 들려오는 건 다르지 않았다.

르네거가 수장이었다면, 그가 라템을 이끌었다면…….

그러한 힐난 속에서, 케셰트는 스스로가 미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벼려야만 했다.

그리고 종래에 낸 결론은 단 하나.

르네거 라템을 죽이자.

그놈을 죽여 버리고 나면 그를 그리워하는 이들은 사라지리라. 어쩌면 그를 이긴 나를 더 칭송하지 않을까?

케셰트는 언젠가 르네거 라템을 죽여 버리겠노라는 결심을 품고 살아왔다.

챙!

케셰트의 검이 르네거의 목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케셰트는 아쉽다는 표정을 하며 뒤로 크게 물러섰다.

“그래서, 어떤가? 아포칼리타의 개가 된 소감이?”

르네거의 자존심을 꺾기 위해 한 말이었다.

“꽤 좋습니다. 살 만하고요.”

하지만 르네거는 아무렇지 않았다. 숱하게 들어 온 말, 그리고 숱하게 신경 쓰지 않았던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당신은…….”

르네거는 크게 도약했다. 챙! 그의 검이 케셰트의 팔을 스쳐 지나갔다.

“나의 대용품이 된 소감이 어떻습니까?”

“닥쳐!”

케셰트는 검을 크게 휘둘렀다. 르네거는 비어 버린 옆구리 사이로 피하며 검을 그었다.

윽!

케셰트의 입가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머리카락 색은 본연의 것이 아니겠지요. 아니, 본연의 것이라 해도 저에 비해 한없이 떨어지는 것.”

르네거는 케셰트의 금빛 머리칼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와 비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르네거는 다시금 달려들었다. 챙! 챙! 케셰트는 무자비하게 들어오는 공격에 맥을 추릴 수가 없었다. 정신이 혼미했다.

“저는 아직 성검의 힘도 쓰지 않았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데도, 르네거는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있다.

그의 얼굴은 평온했으며, 그렇기에 잔인했다.

“아악!”

르네거는 케셰트의 팔을 꿰뚫었다.

“당신은 나를 이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너 이 새끼……!”

케셰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르네거에게 달려들고자 한 행위였지만, 르네거의 검이 더 빨랐다.

“윽!”

“라템의 신자를 죽이는 건 꽤나 마음 아픈 일입니다만.”

케셰트는 베인 허벅지를 감싸 안으며 나뒹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르네거의 시선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동정도, 연민도. 아니,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다. 그저,

“카리나가 원했으니, 그렇게 해야 하겠지요.”

카리나의 말을 따를 뿐.

르네거는 케셰트의 목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의 목을 향해 검이 내리꽂히려던 바로 그때였다.

쿠구궁!

땅이 진동했다.

이는 르네거조차 휘청거리게 만드는 진동이었기에, 르네거는 재빠르게 케셰트와 거리를 벌렸다.

카리나는 괜찮은 것인가?

그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머리카락 전체가 뱀으로 변하고, 온몸에 비늘이 돋아 있는 카리나를.

* * *

[너, 너, 너……!]

히론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기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카리나의 3차 각성을 아예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 누구보다도 3차 각성을 싫어했던 그녀가 아니던가. 숱한 죽을 위기에서도 각성만큼은 피해 왔던 그녀였는데.

고작 이런 일로, 왜?

히론은 감히 카리나의 생각을 짐작할 수 없었다.

“음, 역시. 징그럽네.”

카리나는 완전히 회복된 오른팔에 돋아 있는 비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를 보니 처음 이 세계에 떨어져 갓난아기로 눈을 떴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에 내 모습을 보고 참 놀랐었는데.

지금은 신기하기만 할 뿐, 놀랍지는 않다.

이 몸에 적응해 버린 탓이다.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더냐? 왜?]

“갑자기는 아니고. 전부터 생각했던 거라.”

카리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자일을 상대해야 하는데 각성을 더 미룰 수가 없잖니.”

[그래서 3차 각성을 했다고?]

“그래.”

[거짓말하지 마라. 분명 네 심경의 변화가 있던 것일 텐데. 말하라. 무슨 생각이냐?]

보채는 말에, 카리나는 대답 대신 히론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심경의 변화.

있기는 했다.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녀는 인간이기를 무던히 원해 왔었다. 스스로 아포칼리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삶을 동경하고 또 질투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스스로를 아포칼리타라고 인정한 지금.

더 이상 인간이길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더 이상 인간 같은 껍데기에 사로잡혀 있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인간이 아니니까.

촤악!

카리나는 날개를 활짝 폈다. 그리고 저만치 물러가 버린 페넬로피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안녕?”

페넬로피와 마주 선 카리나는 비죽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페넬로피의 시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 힘이 풀린 듯 와락 주저앉았다. 떨리는 어깨가 명료했다.

“……괴, 괴물.”

뻐끔거리는 입에서 나온 말은 그야말로 진심이었다.

페넬로피는 진심으로 카리나를 괴물처럼 여기고 있었다.

뭉텅이로 뭉쳐진 머리카락마다 뱀의 머리가 달려 있는데,

얼굴부터 시작해 몸 전체가 비늘로 뒤덮여 있는데,

입을 열 때마다 새까만 독기가 흘러나오고 있는데,

저 모습을 어찌 괴물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페넬로피는 주저앉힌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시각적 공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의 아포칼리타는 처음 보는 거니?”

카리나는 그런 페넬로피가 귀엽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3차 각성은 선택받은 이들만 할 수 있는 거니까.”

그녀는 찢어진 두 눈을 번뜩였다. 정말 뱀처럼 변해 버린 두 눈동자는 페넬로피에게 정확히 꽂혀 있었다.

“이렇게 선택받은 존재의 손에 죽을 영광을 줄게.”

콰과광!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축이 흔들렸다. 쩌저적 갈라지는 땅을 따라 새까만 불길이 치솟았다.

페넬로피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빠르게 뛰었다. 카리나의 반대 방향으로. 그녀와 마주치지 않을 수 있는 곳으로.

“허억, 헉…….”

페넬로피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뱉으며 두 다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쿵!

새까만 힘이 페넬로피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꺄악!”

그녀는 그대로 흙바닥을 굴렀다. 허억, 헉, 숨을 몰아쉬며 어깨를 웅크린다.

떨어뜨린 시야에는 카리나의 긴 그림자가 담겨 있다.

으득.

페넬로피는 이를 꽉 깨물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자신은 이미 카리나에게 완전히 굴복당했으므로.

페넬로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전히 괴물 같은 모습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카리나를 응시한다.

“너는…….”

페넬로피는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날 죽일 거야?”

“그래.”

“하지만 이제껏 나를 죽이지 않았잖아.”

“배려였지. 하찮은.”

팔짱을 끼고 있던 카리나는 비스듬하게 허리를 숙였다. 널브러져 있는 페넬로피와 눈높이를 맞춘다.

“내가 베푼 배려를 무시한 건 너였단다, 페넬로피. 내가 너를 위해 줄 때 잠자코 꼬리를 말았어야지.”

페넬로피는 숨을 삼켰다.

그래. 알고 있다.

카리나 아포칼리타가 유독 자신에게 무르게 행동했던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도 더 건방지게 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봐주었다고 해서, 그것에 감사해할 이유는 없었다.

카리나는,

“……왜 너는, 내 모든 걸 가져가 놓고, 나까지 죽이려고 하는 거야?”

내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악한 존재였으니까.

페넬로피는 비칠비칠 몸을 일으켰다. 두 다리에 간신히 힘을 주어 일어난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너는 르네거를 가져갔잖아. 내 반지를 가져갔잖아. 너 때문에 내가……! 내가 얼마나!”

“르네거는 스스로 나를 선택한 거고, 반지는 아포칼리타의 멸망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내가 가져야 하는 거라고 말을 했을 텐데.”

카리나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죽기 살기로 덤벼든 건 너야, 페넬로피.”

그러니 이제 와 불쌍한 척하지 말라고.

그리 말하는 듯싶었다.

페넬로피는 두 주먹을 바르쥐었다.

“너는 악이잖아!”

누가 누굴 동정해.

누가 누굴 배려해!

“선이 악을 죽이는 건 당연한 거잖아. 내가 너를 죽이는 건 당연한 거야. 네가 나를 죽이는 건 당연한 게 아니고!”

하아, 하.

페넬로피는 거친 숨을 토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까드득 깨문 입술에서 피가 터져 뚝뚝 흘러나왔다.

“페넬로피.”

카리나는 설핏 다정한 음성으로 말을 시작했다.

“수천의 인간을 죽여 만든 가짜 성검을 들고 있는 케셰트 라템은 선이니?”

“……뭐?”

“인간의 피를 모아 정령왕을 소환하고 있는 데이펜은 정말 선이니?”

그러나 들려온 건 페넬로피의 신념을 난도질하는 것이었으니.

“인간을 죽여, 너희의 사욕을 채우는 것이 아니고?”

“닥쳐!”

쾅!

페넬로피는 힘을 폭발시켰다. 새빨간 불꽃이 그녀 주변에 가득하다.

불길은 카리나를 향해 날름거리며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애초에 너희 같은 것들만 없었다면 우리도 이러지 않았을 거야!”

페넬로피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아포칼리타라는 악이 없었다면 3대 가문은 평화롭게 살았을 거라고, 자신들 중 그 누구도 죽지 않았을 거라고.

그녀는 굳게 믿고 있었다.

“아니.”

그러나 카리나는 페넬로피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아포칼리타가 없었다면, 너희는 또 다른 악을 만들어 냈을 거야.”

카리나는 손을 휘저었다.

그녀의 손이 지나가자마자 페넬로피가 만들었던 불꽃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빈자리에 검은 기운이 솟아오른다.

“그래야만 너희가 살아가는 이유가 생길 테니.”

그녀는 내부의 결속을 위해서 외부의 악을 만드는 게 가장 수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카리나는 허청거리며 서 있는 페넬로피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이내 그녀와 마주하게 되었을 때.

“죽어, 페넬로피.”

카리나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눈으로 페넬로피를 바라보았다.

“이제 더 이상의 자비는 없어.”

그녀의 손끝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는 일전보다 배는 흉악한 것.

저것에 스치기만 해도 죽음에 이르게 되리라.

페넬로피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곧 찾아올 죽음을 견디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

아무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페넬로피는 천천히 눈을 들어 올렸다.

탁 트인 시야에는 자신을 무시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카리나가 있었다.

무엇을 보고 있는 거지?

페넬로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은 기이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새파란 하늘과 새하얀 구름은 여전한데,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게 무슨.

페넬로피의 눈이 가늘어지던 그때였다.

[피해라!]

콰앙!

쾅!

검은빛을 품고 있는 번개가 쏟아졌다. 수천 갈래의 번개는 모든 곳에 내리꽂혔다.

페넬로피는 카리나가 만든 결계 안에서 몸을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네가 만든 거야?”

페넬로피는 이를 딱딱 떨며 물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카리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볼 뿐.

번쩍!

또다시 번개가 쳤다.

콰과광!

대지가 움푹 파일 정도로 엄청난 힘이 쏟아졌다.

카리나는 두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아 내렸다.

이 힘은.

이 힘은 분명.

[……카오스로군.]

아버지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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