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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112화 (112/135)

112화

“어우, 거창하게도 싸우네.”

샐러딘은 검을 맞대고 있는 르네거와 케셰트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아까의 폭발에서, 무너진 성전의 잔해를 헤치고 도망친 샐러딘이었다.

물론 두 손이 포박돼 있기는 하지만 다른 이의 힘을 빌리면 되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카리나라든가…….

“후우.”

샐러딘은 한숨을 내뱉었다. 쯧, 혀를 차며 미간을 좁힌다.

성전에서 도망쳐 나왔을 때, 그는 당연히 카리나를 찾아 뛰어왔다. 그때의 카리나는 케셰트와 맞서고 있었다.

당연히 도와줄 일은 없지만, 그러해도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어 가까이 가려 했을 때.

-나는 샐러딘을 구하러 온 게 아니란다.

샐러딘은 듣게 되었다.

카리나의 차가운 음성을.

-샐러딘을 죽이려고?

-그렇게 하렴. 마음껏 해.

“하아아.”

알고 있다.

아포칼리타들은 서로를 위해 힘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만 해도 죽어 가는 형제들을 무시한 적이 많지 않은가.

하지만…….

‘카리나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자신이 카리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그녀는 자신을 아끼지 않는다는 걸.

‘조금 걱정해 주고 조금 챙겨 준 것만으로 기대를 가졌다니.’

샐러딘은 씁쓸한 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카리나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한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는 대가를 바라고 그녀를 사랑한 게 아니었으므로.

“아악!”

케셰트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보니 팔이 크게 다친 듯했다.

“팔이 아니라 목을 노렸어야지. 쯧.”

샐러딘은 웃음 섞인 핀잔을 뱉으며 발을 재촉했다.

르네거는 케셰트와 맞서고 있으니, 지금 그에게 가서 구속구를 풀어 달라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샐러딘이 선택할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

“야, 모지리.”

멍하니 서 전투를 보고 있는 피에톤뿐.

샐러딘은 그에게 가 어깨를 툭 건드렸다.

“나 이것 좀 풀어 줘라.”

그제야 정신을 차린 피에톤은 인상을 찌푸리며 샐러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손에 있는 구속구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해 줄 것 같나? 차라리 이 참에 널 죽이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아, 그러셔? 해 보든가. 날 죽이고도 네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어디 한번 보자.”

윽.

피에톤은 눈을 찡그렸다. 샐러딘의 협박이 나름 타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불어…….

‘난 더 이상 캄바이트가 아니니까.’

눈앞의 아포칼리타는 캄바이트의 숙적임이 맞지만, 자신은 캄바이트의 배신자였다.

그러니 샐러딘을 죽일 이유는 없다. 죽여서도 안 되고.

“내게 빚을 진 거다.”

“지랄.”

샐러딘은 픽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피에톤은 마뜩잖다는 표정을 하며 그의 손을 포박하고 있는 구속구에 손을 올렸다.

챙!

맑고 명료한 소리가 남과 동시에 구속구가 반쪽으로 쪼개졌다.

샐러딘은 홀가분해진 손을 돌리며 기분 좋게 웃었다.

“야, 그런데 너는 아무것도 안 하냐?”

그는 빈정거리는 어투로 말했다.

“다들 싸우고 있는데 넌 이렇게 서 있기만 하는 거냐고.”

“내가 할 일이 있나?”

피에톤은 곧장 대꾸했다.

“지금 끼어들었다간 내가 공격받을 것 같은데.”

“그건 그렇지. 넌 모지리니까.”

“지금 너와 내가 싸우는 것도 좋을 듯하다.”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놈은 닥치고 있어. 맛대가리도 없어 보여서 내가 봐주고 있는 거란 생각은 안 드냐?”

샐러딘은 키득거리며 피에톤을 자극했다.

피에톤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내가 캄바이트가 아니기 때문에 샐러딘을 죽이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캄바이트건 말건 상관없이 이놈을 죽여야 속이 풀리지 않을까.

피에톤은 주먹을 바르쥐었다.

이때였다.

“아, 이런.”

샐러딘은 재빠르게 결계를 쳤다. 새까만 형체의 결계가 그들을 둘러쌌다. 그러자마자 땅이 거세게 흔들렸다.

쿠구궁!

제대로 몸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로 거센 진동이었다.

이 진동은 카리나가 있는 쪽에서부터 흘러온 것.

케셰트와 샐러딘은 곧장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보게 되었다.

뱀으로 뒤덮인 머리카락과, 비늘로 뒤덮인 피부를 하고 있는 카리나 아포칼리타를.

“……저게 무슨.”

피에톤은 입을 벌렸다.

그리고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말할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인 광경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으니까.

“각성을 했네.”

하지만 샐러딘은 무덤덤했다. 그는 부러 비죽비죽 웃으며 피에톤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봤어? 내 형제야. 최고지?”

“…….”

피에톤은 숨을 여러 번 내뱉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며 어지러운 머리를 가라앉히고자 노력한다.

“아포칼리타들은 다 저렇게 변할 수 있는 건가?”

“그럴 리가. 선택받은 아포칼리타만 가능한 거야.”

“…….”

피에톤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카리나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었다. 더 보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마음을 알아챈 것일까. 샐러딘은 피식 조소하며 피에톤을 흘겨보았다.

“괴물 같다고 생각하냐?”

피에톤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침묵의 뜻은 긍정이라는 걸 샐러딘은 잘 알고 있었다.

“맞지, 괴물.”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뱉으며 말했다.

“그래서 뭐?”

“…….”

“괴물이면, 뭐 다르냐?”

샐러딘은 카리나가 아포칼리타를 혐오하고, 더 나아가 인간을 동경했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3차 각성을 기피했다는 것도.

그렇기에 샐러딘은 카리나의 각성에 대해, 안쓰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각성의 시기가 끝나면 뱀으로 변한 머리카락은 조절을 해 숨길 수 있을 테지만, 비늘이 돋은 피부는 감출 수 없게 될 것이다.

카리나가 동경했던 인간의 모습과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선택을 한 것이겠지.

아포칼리타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샐러딘은 짧게 혀를 차며 머리를 헝클었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다면. 내가 자일을 이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카리나가 보다 편해질 수 있었을 텐데.’

샐러딘은 스스로의 나약함을 한탄하며 미간을 좁혔다.

“……괴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피에톤의 말이었다.

“신념을 지키고자 저렇게 변한 것이 아닌가? 자신의 아군을 지키고자 선택한 것이 아닌가?”

그는 다시금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페넬로피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그렇다면 괴물이 아니지.”

말을 마치며 피에톤은 씁쓸하게 웃었다.

“진짜 괴물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 더 많으니 말이야.”

샐러딘은 그를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그 말 카리나에게 해 주면 좋아할걸.”

그러며 그 역시 카리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데 이상하다.

한창 페넬로피를 몰아붙이고 있던 카리나가 아니었나. 한데 어느새 공격을 멈춘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이런 미친.”

샐러딘은 빠르게 결계를 강화했다. 새까만 결계는 우웅 소리를 내며 겹겹이 쌓였다.

그리고.

번쩍!

콰과광!

새까만 번개가 쏟아졌다.

번개는 엄청난 힘을 자랑하며 대지를 파괴했다.

결계가 흔들린다. 피에톤은 재빨리 결계를 강화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이건 누구의 힘이지?”

그러나 샐러딘은 대답해 줄 수 없었다.

그저 주저앉은 채 어깨를 달달 떨 뿐.

이 엄청난 힘은 분명.

이 더러운 힘은 분명.

“……아버지.”

그들의 창조주였으므로.

* * *

쿵! 쿠웅!

카리나가 만든 결계에 번개가 수없이 내리꽂혔다.

결계는 가차 없이 흔들렸으나, 그렇다고 해 구멍이 나거나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이 정도의 공격은 충분히 막을 수 있을 정도로 카리나가 강해진 덕분이었다.

카리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까만 어둠이 빛이 되어 갈래갈래로 쏟아진다.

이는 분명 아버지의 힘이었다. 그는 태초의 어둠을 다스릴 수 있는 자였고, 그 어둠을 이용해 스스로를 리치로 만든 이였으니까.

[부활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만, 이렇게 빠르게 힘을 회복한 줄은 몰랐다. 죽기 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은데.]

히론은 흔들리는 결계를 느끼며 말했다. 그의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내가 가서 죽여 주랴?]

“됐어.”

카리나는 단호히 대답했다.

“어차피 지금 더 공격을 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그녀의 말처럼, 한창 쏟아지던 번개는 차차 가라앉고 있었다. 흔들리던 결계도 차츰 제자리를 찾았다.

“경고를 하러 온 거겠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말이야.”

카리나는 새까매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회유하려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버지는 나를 꽤나 예뻐했으니까.

그녀는 허탈한 실소를 흘렸다.

그래. 카오스는 자신을 어여뻐했다. 아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런 그를 죽였다. 아무 망설임도 없이.

그렇기에 아버지가 힘을 되찾으면 자신을 가장 먼저 죽이려 들 줄 알았는데.

‘괜한 자비를 베푸는구나.’

카리나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뱀으로 변했던 머리카락이 차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폭발시켰던 힘을 갈무리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 것이냐?]

히론의 질문이었다. 카리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무엇을?”

[카오스를 어떻게 할 거냔 말이다.]

히론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먼젓번 아포칼리타의 탑에서도 그를 죽이지 않고 돌아오지 않았더냐.]

“……그때는.”

카리나는 미간을 좁혔다.

“지쳐서 그랬어. 그리고 그 상황에서 아버지가 깨어난다면 상대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었고.”

[거짓말인 것을 알고 있다.]

히론은 카리나의 말허리를 자르며 말했다.

그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자신이 보았을 때 카리나는 카오스를 죽이지 못한 게 아니라 않은 것이었다.

이유는 짐작하기 어려우나, 카리나의 그런 머뭇거림은 쉬이 사라질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렇기에.

[카오스 놈은 내가 죽일 거다. 저 썩을 놈을 내 손으로 죽여야 응어리가 풀릴 것 같으니.]

“……마음대로 해. 다음에 만나면.”

카리나는 희미한 대답을 하며 원래대로 돌아온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러며 주저앉아 있는 페넬로피를 내려다본다.

“봤니?”

페넬로피는 그제야 벌렸던 입을 다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카리나와 눈을 마주친다.

“너희가 상대하려는 아포칼리타가 저 정도란다.”

“…….”

“너는 할 수 있겠니?”

페넬로피는 땅을 짚고 있는 손을 바르쥐었다. 손등의 퍼런 핏줄이 솟아오른다. 몸이 바르르 떨렸다.

할 수 있나.

할 수 없다.

감히, 나는 할 수 없어.

페넬로피의 눈이 길을 찾지 못하고 정처 없이 흔들렸다.

“카리나!”

이때, 결계의 색이 뒤바뀌었다. 뛰어온 르네거가 결계를 덧대었기 때문이다.

“괜찮은 겁니까? 다친 곳은 없습니까?”

결계 안으로 들어온 르네거는 둘러메고 있던 케셰트를 내팽개치며 카리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며 그녀의 몸 곳곳을 살핀다.

분명 뱀의 흔적이 남아 있는 머리카락을 보았을 텐데,

분명 징그러운 비늘이 돋아 있는 피부를 보았을 텐데,

“하아. 다행입니다.”

그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저 카리나의 안위만을 걱정할 뿐.

카리나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새하얀 얼굴에는 시름이 담겨 있었다. 붉은 입술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고, 푸른 눈에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일전과 다를 게 없다.

내 모습은 변했는데도.

카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실소를 뱉었다.

카리나는 알게 모르게 걱정한 모양이었다.

혹 자신의 변한 모습을 보고 르네거가 겁을 먹을까 봐.

하지만 르네거는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그 마음이 퍽 소중해, 카리나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휘감았다.

르네거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차분한 숨을 내뱉었다. 이제야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결계는 거둬도 돼. 이제 공격은 멎은 것 같으니.”

“그래도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무리가 되는 일이 아니니 일단 둘러 놓겠습니다.”

르네거는 단호히 말했다. 그 어투에서 자신을 끔찍이 걱정하고 있는 게 느껴져, 카리나는 재차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녀는 르네거의 뺨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쟤는 왜 데리고 온 거니?”

카리나는 쓰러져 있는 케셰트를 바라보았다.

아. 르네거는 재빨리 대답했다.

“죽이려 하는 찰나에 번개가 쏟아져서요. 다른 이에게 죽임을 당하는 건 원치 않아 일단 데리고 왔습니다.”

“잘했네.”

만약 아버지의 힘에 의해 케셰트가 죽었다면 꽤 불쾌했을 테다.

카리나는 빙그레 웃으며 케셰트를 향해 발을 틀었다. 우웅, 그녀의 손 끝에서 검은 칼날이 뽑혀 나왔다.

그녀는 케셰트를 죽일 생각이었다.

감히 샐러딘을 납치한,

감히 나의 것들을 모욕한,

케셰트를 살려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리나!”

어느새 뛰어온 페넬로피가 카리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케셰트를 살려 줘.”

페넬로피는 간절히 애원했다.

“죽이지 마. 부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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