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케셰트를 살려 줘. 죽이지 마. 부탁이야.”
페넬로피는 간절히 애원했다.
“케셰트는 라템의 수장이야. 이 사람이 죽어 버리면 라템은 혼란스러워질 게 분명해. 죽이면 안 돼. 절대.”
바닥에 처박힌 무릎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카리나는 무심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페넬로피의 얼굴에는 간절함, 그리고 수치심이 혼합돼 뒤엉켜 있었다.
그 사실이 퍽 불편했다.
전생에서,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해 응원하고 공감했던 주인공은 페넬로피였다. 전생의 카리나는 페넬로피의 행복만을 바랐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끼어들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페넬로피가 이렇게도 좌절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사실이 못내 꺼림칙했다.
자신이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나쁜 짓을 한 악인이 된 것만 같아 마음이 복잡해졌다.
카리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럼 네가 죽을래?”
페넬로피의 두 눈이 혼탁해졌다. 카리나의 말뜻을 더듬어 보는 듯싶었다.
“저 라템의 수장 대신 네가 죽는다면 그렇게 해 줄 수 있어. 어떻게 할래?”
카리나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페넬로피의 두 손이 반발하듯 쥐어졌다.
“너는…… 너는 대체……!”
그녀는 눈을 질끈 내려 감으며 숨을 들이켰다. 고개를 떨어뜨린다. 구겨진 얼굴에는 온갖 종류의 시름이 응집돼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잔인해?”
목소리가 달달 떨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보였으나, 페넬로피는 울지 않았다. 울 수 없었으니까.
“내 일에 끼어들어서 모든 걸 망쳐 놓은 것으로도 모자라, 이젠 목숨까지 빼앗아가겠다고?”
페넬로피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합당했다.
그녀는 원작의 주인공이었다. 모든 남자들의 사랑을 쟁취하고 끝끝내 악을 무너뜨리고 평화를 되찾는 주인공.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그녀의 첫사랑인 르네거는 카리나 아포칼리타 곁에 있다.
그녀를 사랑하던 남자들은 카리나에게 당해 만신창이가 되어 있다.
끝끝내 악을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그 악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이를 모두 다 알고 있는 카리나로서, 그리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만든 장본인인 카리나로서,
일정 부분 페넬로피에게 죄책감이 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카리나는 페넬로피를 수차례 봐주었다.
그녀의 목숨을 구해 줬고, 살려 주기까지 했다.
이런 호의를 무시한 건 페넬로피였다. 그러니,
‘나도 잘못이 없어.’
없어야 돼.
카리나는 그렇게 읊조렸다.
페넬로피는 카리나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말에 조금의 안타까움이라도 느껴 주길 바랐건만,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 하하.
페넬로피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눈을 부릅떴다.
치켜뜬 두 눈에는 새빨간 핏발이 돋아 있다.
“그래. 너는 아포칼리타지. 인간을 학살하는 아포칼리타.”
낮은 조소가 스며들었다.
쨍그랑!
페넬로피는 케셰트의 검을 내던지며 외쳤다.
“그럼 그렇게 해. 나도 죽이고, 케셰트도 죽이고, 모두 다 죽여!”
마지막 발악.
……이라고 카리나는 생각했다.
속이 좋지 않았다. 메스꺼운 감각이 위장을 뒤덮었다. 잠시 다리에 힘이 풀리니 르네거가 곧장 그녀를 지탱해 주었다.
얼핏 쳐다본 르네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페넬로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르네거가 변했다.
페넬로피도 변했다.
모든 것이 변했다.
……나 때문에.
카리나는 긴 숨을 내뱉었다.
아버지가 부활하고, 자일이 힘을 얻고, 3대 가문의 수장들이 차례로 힘들어지는 일은 어쩌면 나 때문일 수도 있었다.
내가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 잘못이 있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나는 나의 생존을 위해 열렬히 싸운 것뿐이니까.
질타받을 이유는 없었다. 없어야만 했다. 카리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페넬로피.”
카리나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페넬로피를 바라보았다.
“분명한 악을 눈앞에서 봤는데도, 너는 여전히 나를 악한 존재로 취급하는구나.”
페넬로피는 순간 멍해졌다.
분명한 악.
내리꽂히던 번개의 주인을 말하는 것일 테다.
카리나는 그 힘과 대적을 하는 것일 테지. 아포칼리타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그렇다면 진정한 악은 무엇인가? 아포칼리타인가? 아니면 아포칼리타이나 그들을 멸망시키려 하는 카리나? 그것이 아니라면,
‘카리나를 붙들고 방해하는 나?’
페넬로피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씹어 삼켰다.
이제껏 당연히 카리나 아포칼리타가 주적이라 생각했다.
그녀가 아무리 아포칼리타를 멸망시키려 한다 해도 태생은 숨길 수 없는 거라고.
하지만 카리나는 자신을 몇 번이고 봐주었다. 죽일 수 있음에도 죽이지 않았고, 죽을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 주었다.
그렇다면,
‘진정한 악은 무엇인가.’
알 수 없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고개를 내민 의문은 그녀의 가슴에 갇혀 있던 죄책감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페넬로피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방금 전까지 악바리처럼 달려들던 기색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저 성찰하고, 되짚을 뿐.
그런 페넬로피를 지그시 지켜보던 카리나는, 천천히 르네거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케셰트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나는 네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단다, 페넬로피.”
“…….”
“널 응원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는 뜻이야.”
진심이었다.
과거형일 뿐.
하지만 이를 모르는 페넬로피는 더 혼란스러운 기색을 비쳤다.
그녀의 시선이 카리나의 면면을 훑었다. 카리나의 의중을 짐작하려 하는 듯싶었다.
카리나는 그런 시선을 무시한 채 나뒹굴고 있는 케셰트의 성검을 바르쥐었다.
그리고.
“아악!”
케셰트의 오른팔을 잘라 냈다.
정신을 차리고 있었던 듯, 케셰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하지만 카리나에게는 어떠한 종류의 자비도 없다. 그녀는 잘려 나간 케셰트의 팔을 발로 짓이겼다.
“목숨 부지하고 싶다면, 성전에 처박혀서 쥐 죽은 듯 살아.”
그녀는 페넬로피를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페넬로피는 알고 있었다.
저 말이,
“다음에 만나면 팔이 아니라 목을 가져갈 테니까.”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걸.
“마지막 자비야.”
그리고 카리나는 악이 아니라는 걸.
악한 존재일 수 없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다.
* * *
카리나와 르네거, 히론은 피에톤이 있을 숲으로 위치를 옮겼다.
그러나 움직이지는 않는다. 기척을 느낀 피에톤이 찾아오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서로 간의 오가는 말은 없다.
이는 카리나의 기나긴 침묵 때문이었다.
히론은 카리나를 걱정스레 올려다보았고, 르네거는 바싹 마른 입술을 꾹 말았다.
-분명한 악을 눈앞에서 봤는데도, 너는 여전히 나를 악한 존재로 취급하는구나.
그 말을 하는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다. 마치 상처받은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것처럼.
르네거는 알고 있다.
아포칼리타와 인간이라는 간극에서, 카리나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그리고 이렇게 변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심을 했을지.
“카리나.”
그는 카리나의 팔을 붙잡았다. 카리나는 놀랍지 않다는 듯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괜찮으십니까?”
그녀의 커다란 눈이 여러 번 깜빡였다.
“다친 곳은 없어.”
“그게 아니라.”
르네거는 카리나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갔다.
“괜찮냐는 말입니다.”
인간의 모습을 버린 게 괜찮냐는 말일까, 제게 매달리는 인간의 팔을 잘라 버린 게 괜찮냐는 말일까, 아니면 페넬로피와의 대화가 괜찮냐는 말일까.
뭐가 됐든, 카리나는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괜찮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
괜찮다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으니까. 그녀는 평생 괜찮게 살아온 적이 없었으니까.
“……다쳤습니다.”
르네거는 그런 카리나의 손을 낚아챘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작은 상처가 나 있는 손등에 입을 맞췄다. 따뜻한 기운이 퍼져 들어왔다. 따끔거렸던 상처가 치료되는 게 느껴졌다.
“넌.”
카리나는 그런 르네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무렇지 않니?”
그가 입을 맞춘 것은 징그러운 비늘이다. 그가 잡고 있는 것은 파랗게 변색된 손이다.
거울을 볼 수 없어 지금의 모습이 어떨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내 모습은 인간과 거리가 멀다는 것.
그렇기에 르네거에게 되물은 것이었다.
이런 괴물의 손을 잡는 게 아무렇지 않니, 입을 맞추는 게 괜찮은 거니, 너는 나를 괴물로 생각하지 않는 거니…….
카리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르네거의 눈이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카리나.”
그는 카리나의 손을 더 간절하게 붙잡았다.
“처음 맹약을 맺었을 때에 당신에게 했던 말이 있습니다.”
“…….”
“당신의 존재는 이제 제 숙명이 되었노라고.”
그는 카리나의 머리칼을 모아 귀 뒤로 넘겨 주며 말했다.
“무엇이 됐든 당신은 당신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의 곁에 있을 거고요.”
음성에는 힘이 있었고, 진심이 묻어났다.
그렇기에 카리나는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치닫는 감정에 입안이 썼다. 텁텁한 기운이 혀끝을 맴돌았다.
르네거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항상, 언제나,
나를 인정해 줄 존재가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나를 구해 줄 존재가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나를 지켜 줄 존재가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때때로 나를 약하게 만들어.’
그래서 더더욱.
‘싫어.’
카리나는 두 눈을 내려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