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114화 (114/135)

114화

처음 르네거를 만났을 때, 카리나는 예상한 것이 있었다.

그와 손을 잡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끌려다니게 될 거라고.

명확한 이유는 없었지만, 직감이 그러했다. 그래서 르네거의 도움을 계속해 거부했었던 것인데.

카리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마자 르네거의 얼굴이 보였다.

걱정을 만연하게 담고 있는 두 눈, 다정함을 품고 있는 입술.

그의 눈빛이 피부에 닿을 때면 안도감이 들었다. 그의 입술이 열릴 때면 편안함이 들었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르네거에게 많은 의지를 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힘든 상황에 부딪힐 때 르네거가 올 것을 기대했고, 그가 자신의 손을 잡아 주길 바랐다.

그는 때때로 실패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기어코 장애물을 넘고 달려와 카리나의 옆에 바로 섰다. 그녀를 지키기 위하여.

이는 드넓은 안정감을 주었으나, 그렇기에,

‘싫어.’

르네거는 나를 약하게 만든다. 내가 홀로 설 수 없게 만든다. 내가 기대를 하게 만들고 도망칠 품을 만든다.

‘이래서는 안 돼.’

어차피 이 세계의 결말은 함께 이룰 수 없는 것.

그녀 혼자 해야만 할 일이었다. 르네거의 일이 아니었다.

“카리나. 괜찮은 겁니까?”

그는 침묵하는 카리나가 걱정됐는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따가운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돌린다. 르네거의 입이 다시금 열릴 때였다.

수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얼마 가지 않아 피에톤과 샐러딘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거봐. 내 말 맞잖아. 여기 있을 거라 했지?”

샐러딘은 피에톤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피에톤은 잠시 고개를 들어 카리나를 바라보다, 이내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마도 케셰트의 팔을 자르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겠지.

예상한 일이었기에, 카리나는 별반 놀라지 않았다.

그것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건 샐러딘이었다.

평소의 샐러딘이었다면 카리나를 보자마자 히히 웃으며 달려왔을 테다.

하지만 지금의 샐러딘은 달랐다. 어딘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기도 하고.

카리나는 샐러딘에게 손을 뻗었다.

“역시, 탈출했구나.”

그 말에, 샐러딘은 숨을 흡 들이켰다. 카리나가 내민 손을 바라보지 않으며 중얼거린다.

“……어차피 내겐 관심도 없었으면서.”

[그게 무슨 말이냐?]

카리나의 대답보다 히론이 튀어나온 게 먼저였다.

히론은 샐러딘의 말에 꽤 화가 났는지 꼬리를 파르르 떨고 있었다.

[카리나가 왜 여기 있는 것 같으냐! 너 하나를 구하려고 온 것인데 어떻게 그런 철없는 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이냐!]

“그, 그건……!”

샐러딘은 흔들리는 눈으로 카리나와 히론을 번갈아 바라보다, 이내 빽 소리쳤다.

“날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말했잖아!”

[……뭐?]

“물론 아포칼리타들끼리는 안 그런다는 걸 알고 있는데, 그래서 이해는 하는데, 서운한 걸 어떡해! 아냐, 아냐. 이러다 며칠 지나면 괜찮아져. 그니까 지금은 날 가만히 뒀으면 좋겠어…….”

카리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짐작건대 케셰트와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었다. 카리나는 피식 실소를 뱉었다.

“엿듣는 취미는 나빠.”

그러며 들고 있던 케셰트의 성검을 샐러딘의 발치로 내던져 주었다.

“필요하면 써.”

샐러딘은 제 앞으로 던져진 검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카리나가 말한 ‘필요’가 무슨 뜻인지 알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카리나는 말을 덧붙였다.

“인간의 생명 수천 개가 묶여 있는 검이야.”

깜빡, 깜빡.

샐러딘의 눈이 수차례 깜빡였다.

아포칼리타 한 마리를 만들 때, 인간의 생명 수백 개가 들어간다. 그들이 각성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카리나의 3차 각성은 인간의 생명을 품고 있는 마나핵이 박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샐러딘은 그만큼의 마나핵이 없어 3차 각성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내 각성을 위해서 가져온 거야?”

샐러딘은 주춤 허리를 굽혀 검을 바르쥐었다.

검을 쥔 손바닥에서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이는 인간의 생명을 품고 있다는 방증.

샐러딘은 멍하니 카리나를 올려다보았다.

카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빙그레 웃을 뿐.

“어, 어…….”

샐러딘의 얼굴이 발개졌다. 방금 전까지 카리나를 비난하려 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챙!

그는 검을 내던지며 카리나에게로 달려들었다.

“사랑해, 카리나!”

카리나를 끌어안으려 할 때였다.

“안 됩니다.”

사이를 가로막은 르네거가 샐러딘을 밀쳐 냈다. 졸지에 물러서게 된 샐러딘은 눈을 부릅뜨며 르네거를 노려보았다.

“넌 나에게도 질투를 하냐?”

“예.”

“왜?”

“제가 더 카리나를 사랑하니까요.”

뭐 이런 미친놈이…….

샐러딘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무리 바둥거려도 카리나에게 닿지 못했다. 르네거의 힘이 더 셌기 때문이다.

“야! 카리나와 나는 가족이야! 너는 가족에게도 질투를……!”

말하던 샐러딘은, 아차 하며 입을 막았다.

아포칼리타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없다. 그저 자신을 창조해 준 아버지만이 존재할 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괴물인데 어찌 가족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더불어 카리나는 아포칼리타라는 집단에 속하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기에, 자신의 말을 더더욱 싫어할 가능성이 컸다.

샐러딘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곧 들려올 호통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카리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지그시 샐러딘을 바라보았다.

샐러딘이 했던 말처럼, 아포칼리타들끼리는 서로를 구하고자 하지 않는다. 서로를 위하거나, 사랑하지 않으니.

하지만 카리나는 이미 샐러딘을 두 번이나 구했다.

아멜과 제이슨에게서, 그리고 지금.

이러한 행동의 원인은 단 하나.

“그래. 가족이 맞지.”

샐러딘을 내가 지켜야 할 가족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카리나는 그렇게 말하며 작게 웃었다.

이제야 샐러딘에 대해 정확한 정의가 내려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족이기 때문에 그를 구하러 왔고, 가족이기 때문에 그가 다치는 것이 싫다. 가족이기 때문에, 너를 지키고 싶다.

전제를 붙여 놓으니 그간 카리나가 해 왔던 일이 명료하게 정의가 됐다.

카리나는 르네거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잠시 머뭇거리던 르네거는, 이내 피식 웃으며 샐러딘을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샐러딘은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올려 떴다.

“가족…….”

그는 입을 뻐끔거렸다.

혼이 나기는커녕 인정을 받았다.

그간 꿈꾸던 가족으로.

샐러딘은 벅차오르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카리나에게 달려들었다.

“누나! 사랑해!”

카리나는 저를 끌어안는 샐러딘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 주었다.

그렇기에 그들을 지켜보던 히론의 얼굴이 착잡해진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 * *

“후우.”

한참 동안 마법구를 지켜보고 있던 피에라는, 이내 고개를 뒤로 젖히며 기나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가 지켜보고 있던 마법구는 데이펜의 성전을 비춰 주고 있었다.

카리나가 성전을 무너뜨리고, 케셰트와 대적하고, 괴물처럼 변해 페넬로피를 수세에 몰아넣고, 케셰트의 팔을 자르는 모습을 모두 다 보았단 말이다.

그 광경만으로도 끔찍했건만.

‘번개라.’

더 끔찍한 건 그들에게 쏟아지던 번개였다.

직접 마주하지 않았지만, 피에라는 느낄 수 있었다.

그 힘은 아포칼리타의 것이라는 걸.

엄청난 힘이었고, 그렇기에 두려웠다.

‘캄바이트의 마법사 모두가 달려들어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발치에나 닿을까.

꿀꺽.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자신들은 아포칼리타의 멸망을 감히 논할 수 없다. 그 힘에 대적할 수 있는 건 오직,

‘카리나 아포칼리타뿐.’

그녀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피에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창가로 다가가 활짝 창문을 열었다. 곧 들어올 누군가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휘잉!

바람이 거칠게 밀려왔다.

회오리처럼 한곳을 빙빙 돌던 바람은 이내 공 모양의 새하얀 빛을 만들어 냈다.

워프 게이트.

피에라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얼마 가지 않아, 게이트를 통해 카리나와 르네거, 그리고 피에톤이 모습을 드러냈다.

샐러딘과 히론은 케셰트의 성검에 있는 힘을 추출해 오겠다고 빠진 상태였다.

“기다리고 있었나 보네?”

카리나는 우뚝 서 있는 피에라를 향해 말했다. 피에라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올 것을 알고 있었으니.”

“마법구로 지켜봤구나?”

카리나는 피식 웃었다.

“훔쳐보는 건 나빠.”

그러며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소파의 등받이를 손으로 쓸며, 나긋하게 눈을 들어 올린다.

피에라는 카리나의 몸에 돋아 있는 비늘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징그럽게 여겨지진 않았다. 되레 대단해 보였다.

스스로를 포기하고 힘을 얻은 것만큼 용기 있는 일이 어디 있을까. 그리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팡이를 주겠소.”

카리나의 초록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잘 생각했네. 주지 않으려 했다면 너도 죽여 버렸을 텐데.”

움찔.

피에라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만만찮은 기운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마른침을 삼킨 피에라는, 이내 그들을 안내했다.

“따라오시오.”

카리나를 필두로 르네거와 피에톤이 천천히 따라갔다.

르네거는 혹여 다른 상황이 발생할까 사방을 살피는 중이었고,

피에톤은 여전히 침묵한 채 눈을 굴리고 있었다.

그들은 한참 동안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나선형 계단을 오르는 중, 카리나는 잠시 사색에 빠졌다.

캄바이트의 지팡이까지 얻게 되면 총 3개의 성물을 모으는 것이다.

원작에서는 딱 여기까지였지.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힘을 발휘했었다.

여기에 아포칼리타의 관까지 합치게 되면…….

‘그럼, 내가 원하는 결말을 얻을 수 있어.’

카리나는 확실한 미래를 그리며 생각을 읊조렸다.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탁.

피에라의 걸음이 멈춘 곳은 마탑의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작은 방문이었다.

피에라는 방문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기운과 공명하는 듯, 방문이 낮게 진동했다.

우웅, 웅.

진동의 소리가 커짐과 동시에 방문의 크기도 점점 커졌다.

“결계를 잘 쳤네.”

카리나는 초록색 마법진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방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초대 가주께서 직접 만든 것이니 훌륭할 수밖에 없지.”

피에라는 대꾸하며 방문을 열었다.

방은 단출했다. 아니, 단출하다기보다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장식장을 제외하고는.

피에라는 장식장 위에 다시 손을 올렸다.

그녀의 손끝이 장식장에 닿자마자 환한 빛이 폭발하듯 튀어나왔다. 곧이어 초록색의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 흘러나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풍겨지는 기운이 흉흉해, 르네거는 성검을 바르쥐었다.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모양새였다.

“허튼짓하지 마시오. 이 마법진은 결계일 뿐이니.”

피에라는 르네거를 바라보지도 않으며 말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게 보였는데, 결계를 푸는 과정이 힘이 드는 모양이었다.

도와줄까, 싶었지만 아포칼리타의 힘이 무슨 도움이 될까 싶었다.

카리나는 팔짱을 낀 채 물끄러미 피에라를 응시했다.

결계를 푸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요동치던 방이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피에라는 조심스럽게 장식장 안으로 손을 넣었다.

캄바이트의 지팡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백의 새하얌을 품고 있는 지팡이는 오직 그 끝에만 초록색 빛을 내고 있었다.

파앗!

지팡이에서 환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빛이 점멸했을 때.

『드디어 나를 꺼냈구나, 이 빌어먹을 인간들아!』

지팡이는 기다렸다는 듯 빽빽 소리치기 시작했다.

『내가 몇백 년이나 잠들어 있었는지 아느냐? 내 외로움을 너희가 알아? 너희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 나를 이렇게 함부로 둔……!』

음. 다시 넣을까.

카리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