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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115화 (115/135)

115화

『내가 몇백 년이나 잠들어 있었는지 아느냐? 내 외로움을 너희가 알아? 너희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 나를 이렇게 함부로 둔 대가를 톡톡히 받을 것이야!』

지팡이에서 흘러나오는 전음은 골이 울릴 정도로 매서웠다. 지팡이를 들고 있던 피에라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떨었다.

지팡이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뿐만이 아니었다.

지팡이의 전음은 힘이 있었다. 기세가 날카로웠고 위압감이 가득했다. 피에라는 흐르는 식은땀을 채 갈무리하지도 못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성물들은 원래 다 이렇게 말이 많니?”

하지만 카리나는 멀쩡했다. 지팡이의 힘에 조금도 억눌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피에라에게서 지팡이를 빼앗듯 낚아챘다.

『잠깐만. 이 힘은 분명……!』

지팡이가 뿜는 빛이 파르르 흔들렸다.

만약 지팡이에 눈이 달려 있었다면 요란하게 떨리고 있으리라. 카리나는 지팡이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넌 아포칼리타가 아니더냐!』

우웅.

빛이 더욱 거세졌다.

마치 카리나를 집어삼킬 것처럼 매서워진 빛은 그녀의 손을 기어 팔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헛짓하지 마. 어차피 내게는 먹히지 않으니까.”

카리나는 가볍게 손을 튕겼다. 그러자마자 빛이 일순간 소멸됐다.

지팡이는 더욱 크게 공명했다. 제 힘이 불식간에 사라진 것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이, 이 빌어먹을 아포칼리타가……! 수장!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왜 저 아포칼리타와 함께 있냔 말이다!』

지팡이의 빛은 피에라에게로 날아갔다. 피에라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 그것이…….”

“이거 보이지?”

그런 피에라의 말허리를 끊은 건 카리나였다.

카리나는 지팡이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정확히 말하면 끼고 있는 반지를 보여 주었다.

『그것은 설마……. 데이펜?』

“그래.”

『이익……! 당장 내놓지 못할까! 데이펜이 불쌍하지도 않으냐! 네 힘에 눌려 말도 못 하고 있는 저 모습이!』

말도 못 한다고? 카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껏 반지가 소리를 내려 한 기색을 느낀 적 없었기 때문이다.

르네거를 바라본다.

“반지가 페넬로피에게 말을 한 적이 있었니?”

“아니요. 그런 말은 못 들었습니다.”

르네거는 단호히 대답했다. 지팡이는 더 크게 소리쳤다.

『거짓말하지 마라! 분명 데이펜은…… 어?』

지팡이의 끝이 르네거에게 닿았다. 그는 마치 르네거를 탐색하는 것처럼 빛을 뿜어냈다.

『넌 라템의 아들이 아니더냐?』

“맞습니다.”

『그렇다면 그 검은 분명……!』

르네거는 허리에 차고 있는 성검을 내려다보았다.

성검 역시도 시푸른 빛을 짙게 내뿜고 있었다.

설마.

르네거는 검을 뽑았다. 그 즉시 발광한 빛이 방을 가득 채웠다.

『캄바이트!』

『라템!』

그들은 서로에게 빛을 쏘았다. 빛은 얽히고 얽혀 서로에게 밀려갔다.

전음이 아닌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대화를 하고 있는 듯싶었다.

하아.

카리나는 한숨을 내뱉었다.

“아, 귀가 아프네.”

“괜찮으십니까?”

르네거는 카리나에게서 지팡이를 건네받으며 물었다.

“저것들을 모두 다 부숴 버리고 싶은 것 말고는 괜찮아.”

“부술까요?”

르네거는 너무도 당연하게 되물었다. 카리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머리칼을 헝클었다.

“농담도 못 하겠다니까.”

그러며 지팡이를 툭툭 친다. 우웅, 지팡이가 낮게 진동했다.

“이제 내 말에 집중을 좀 할래?”

지팡이는 그제야 빛을 거뒀다.

『무엇을 원하느냐?』

카리나의 입술이 씨익 올라갔다.

“죽음의 관.”

『…….』

“알고 있지?”

지팡이와 성검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일순간 멈췄다.

서로 눈치를 보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가느다란 빛을 내보이며 웅얼거렸다.

『그 빌어먹을 죽음의 신 자식이 결국.』

『기어코 성물을 남기고 떠나 버렸구나.』

무언가 뒷이야기가 있는 것 같았지만,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카리나는 으쓱 어깨를 올렸다.

“거기까지 알고 있는 걸로 보니 내가 뭘 할지도 짐작하고 있겠네.”

또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지팡이와 성검 모두 같은 짐작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먼저 소리를 친 건 캄바이트의 지팡이였다.

『내가 몇백 년이나 잠들어 있었는지 알면서도 그런 잔인한 말을 하는 것이냐? 피도 눈물도 없는 것 같으니라고!』

“아포칼리타에게 눈물을 원하다니. 참 재미있는 성물이네, 너.”

카리나는 르네거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툭툭 치며 비죽였다.

으으, 지팡이가 몸을 바르르 떠는 게 느껴졌다.

이때, 성검의 푸른빛이 카리나의 손등에 닿았다.

『카리나 아포칼리타.』

실로 오랜만에 카리나에게 말을 거는 성검이었다.

그래서인지 성검의 전음은 떨림이 가득했다. 두려워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진정, 모든 것을 소멸시킬 생각이더냐?』

카리나의 목표를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 * *

[귀찮은 놈 같으니라고.]

히론은 간신히 떼어 놓고 온 샐러딘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깟 3차 각성 따위, 충분히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도와줄 일이라고는 그저 옆에서 지켜봐 주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래서 볼일을 보고 오겠다며 나오려 했는데,

-왜 나를 두고 가는 거야!

라며 칭얼거리는 게 아닌가.

히론은 그런 철없는 샐러딘의 다리를 꽉 물어 주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곤 자리를 황급히 떠났다. 만날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배로 바닥을 기며 나아가는 히론은, 점점 몸을 키웠다.

실뱀처럼 가느다랗던 몸은 점점 두꺼워졌고, 주먹만 했던 얼굴은 확장돼 사람의 몸통만큼 커졌다.

바실리스크라는 종족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모습이었지만, 그러해도 지금 그의 형체는 놀랄 만큼 괴기했다.

히론은 입 밖으로 튀어나온 송곳니를 번뜩이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곧이어, 찾고 있던 이를 만날 수 있었다.

“내 흔적을 느꼈구나.”

레피오스. 그는 싱긋 웃으며 히론을 향해 다가왔다.

[그렇게 냄새를 흘려 대는데 내가 모를 리 있겠느냐?]

“찾아 주길 바랐기 때문이란다.”

[흥. 그렇게 하지 않아도 네놈이 와 있다는 건 진즉 알고 있었다.]

히론은 부러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부터 따라다녔지?]

아까부터, 라고 하면 카리나가 샐러딘을 구하고자 데이펜의 성전을 찾아갔을 때부터를 말하는 것일 테다.

레피오는 빙그레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너는 카오스가 나타날 걸 알고 있었느냐?]

“태양신의 말씀은 틀리지 않는 법이란다.”

[수천 년간 숨어 있는 놈이 무슨. 모습이나 드러내라고 해라.]

“왜, 아버지가 보고 싶은 건가?”

[내가 그놈을 보고 싶어 할 리 있겠느냐!]

히론의 외침에 레피오스는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그루터기에 걸터앉았다.

[카오스가 나타날 걸 알았다면 미리 말을 해 주어야 하는 게 아니더냐!]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었을까?”

[그건……!]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 된 것이 아닌가. 카오스는 그저 모습을 드러낸 것뿐이니 말이야.”

레피오스는 말을 하며 피웠던 웃음을 접어 내렸다.

과거, 카리나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들이 모두 죽는 미래를 보셨다 해도, 제게 알려 주지 않았을 건가요?

그에 레피오스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카리나는 알고 있으리라.

자신은 결코 입을 열지 않으리란 것을.

레피오스는 서늘하게 웃었다.

미래라는 것은 석판에 새겨진 글자와 같아서, 결코 변하지 않는다.

제아무리 그것을 막아 보고자 해도, 바뀌지 않는 게 바로 미래였다.

[너는 정말 갈수록 짜증이 나는 놈이다.]

“하하. 내가 보고 싶었다며 달려오던 게 엊그제 일 같은데 말이다.”

[철천지원수도 오랜 기간 보지 않으면 그리워지는 법이다.]

히론은 비죽이며 대꾸했다. 레피오스의 옆에 목을 세우며 똬리를 튼다.

[그래서, 어디 있느냐?]

짧은 말이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방대했다.

히론의 음성을 더듬던 레피오스는, 이내 한숨을 뱉으며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카오스를 말하는 것인가?”

[그래.]

“…….”

히론의 검은 눈이 닿았다. 레피오스는 부러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카오스는 부활 후에 더욱 강해졌단다.”

[알고 있다.]

“지금의 네 힘으로는 이기지 못할 게야.”

[역시 알고 있다.]

“그렇다면.”

[레피오스.]

히론은 몸을 크게 부풀렸다. 일전보다 더 커진 몸의 하얀 비늘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너는 미래를 알고 있지 않느냐.]

히론은 독을 품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말했다.

[그럼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도 알겠지.]

레피오스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착잡함, 그리고 불안함이 뒤엉킨 숨이 잇새에서 흘러나왔다.

* * *

피에라에게 방을 안내받은 카리나는 들어오자마자 창문을 활짝 열었다.

이는 탑의 갑갑한 공기에서부터 탈출하기 위한 것으로써,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습관 중 하나였다.

‘아포칼리타의 탑을 벗어난 지도 꽤 됐는데.’

아직도 이렇게 답답하다니.

카리나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들고 있던 지팡이를 침대에 내던진다.

그에 지팡이가 낮게 진동했으나, 말은 하지 않는다.

아까 전, 한 번만 더 시끄럽게 군다면 그 즉시 부숴 버릴 거란 협박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쁜 것 같으니라고.

지팡이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본체가 없는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카리나는 창가에 기댔던 몸을 떼어냈다.

그리고 벽에 달려 있는 거울로 천천히 다가갔다.

3차 각성을 하고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그녀였기에, 다소의 긴장감이 걸음에 섞여 있었다.

그리고 거울에 몸을 비춘 순간.

“……하.”

카리나는 헛웃음을 뱉었다.

“왜 피에톤이 끝까지 말 한마디를 안 했는지 알겠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꽤나 징그러웠다.

완전히 뱀으로 변해 버린 눈동자와 목과 뺨에 돋아 있는 비늘은, 그녀가 인간과 전혀 다른 종족이라는 것을 오롯이 드러내 주었다.

저가 보아도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어색한 모습이다.

그래서 더더욱 르네거가 대단해 보였다.

‘이런 모습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다니.’

그녀는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알고 있다.

르네거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얼마나 자신을 위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카리나는 더더욱…….

‘안 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하니까.

이때였다.

“카리나.”

문이 조금 열리더니, 르네거가 모습을 드러냈다.

“걱정되어 찾아왔습니다.”

르네거의 새하얀 피부에는 검은 시름이 얼룩덜룩 묻어 있었다.

그는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며 카리나에게 손을 뻗는다. 하지만 카리나는 의식적으로 그의 손을 거부했다.

“걱정이라니, 어떤?”

르네거는 어디에도 닿지 못한 자신의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카리나와 벌려진 거리는 지나치게 멀었다.

“내 마음의 안위를 묻는 거라면 아까 전에 진즉 끝냈고. 보다시피 내 몸은 멀쩡하니 그건 아닐 테고.”

카리나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성검의 말이 마음에 걸려서 찾아온 거니?”

르네거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 또다시 성검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진정, 모든 것을 소멸시킬 생각이더냐?』

피에톤과 피에라는 그 말이 아포칼리타의 소멸을 뜻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르네거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르네거는 묘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소멸, 모든 것의 소멸.

그 ‘모든 것’이라는 말에, 카리나 자신도 포함돼 있으리라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르네거는 느리게 눈을 들어 올렸다.

카리나를 바라본다. 흔들림 없이 올곧은 시선이 그녀의 피부를 따갑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뜻인지 물으려고 온 게 아닙니다.”

그는 성큼 다가왔다. 카리나가 뿌리치기도 전에 그녀의 손을 붙잡는다.

“당신은 모든 것이 끝나면 제 손을 잡고 함께 밖을 나가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카리나는 숨을 들이켰다.

과거, 르네거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는 그때였다.

그때에는 이러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많은 게 달라지지 않았던가.’

자일과 아버지의 부활.

이는 세계의 멸망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카리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런 약속 같은 건 머리에서 지우고 있었는데.

“그 약속은 유효한 것이라고 말하고자 왔습니다.”

그는 카리나의 손에 깍지를 꼈다. 힘이 들어간 손은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단단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르네거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머리를 기울여 그녀의 손등에 이마를 대었다. 뜨거운 체온이 손등을 홧홧하게 만들었다.

“약속을 어겨서는 안 됩니다.”

카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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