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세계의 끝.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고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곳.
황량한 대지를 갉아먹는 소용돌이만이 존재하는 곳.
카오스는 이곳에 우뚝 서 있었다.
과거 뼈만 남아 있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괴이했던 뼈에는 살이 붙어 있고, 삐거덕거리던 관절은 자유로이 움직일 만큼 멀쩡했다.
죽음 후의 부활 덕분이었다.
부활은 신체의 재생산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으니.
이는 자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르네거에게 팔이 잘리고 가슴이 꿰뚫렸던 그였으나 지금의 그는 상처 하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말끔한 모습이었다.
자일은 붉은 날개를 펄럭이며 카오스에게로 다가왔다.
“아버지.”
카오스는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혼돈을 품고 있는 새까만 눈동자가 자일에게로 닿았다.
“카리나를 보고 오셨습니까?”
“그래.”
카오스는 보았던 카리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낮게 조소했다.
“3차 각성을 마쳤더군.”
자일이 주먹을 바르쥐는 것이 느껴졌다. 카오스는 그런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왜, 너로서는 힘들 것 같으냐?”
자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긍정을 뜻한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을 테지.
자일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아포칼리타는 카리나밖에 없었으니.
그러나 카오스는 태연했다. 그는 카리나가 결코 자신들을 이기지 못 하리라 확신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아들아. 너는 나의 가장 완벽한 피조물이요 그렇기에 너를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없으니.”
자일의 잇새에서 두꺼운 숨이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그의 숨은 뜨거웠다. 팔팔 끓는 용암을 그대로 머금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 인간 남자도 함께 있었습니까?”
카오스는 완전히 고개를 돌려 자일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번들거리는 비소가 얹혀 있다. 마치 자일의 마음을 모두 다 아는 것처럼.
“그 인간의 죽음은 네게 양보해 주겠다.”
답이 들리자 자일의 굳었던 얼굴이 그제야 풀어졌다.
르네거.
르네거 라템.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 버려야 할 인간.
이러한 분노는 자일이 르네거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다.
부활의 힘은 한 번의 죽음 끝에 얻을 수 있는 것.
르네거와의 전투는 부활을 위해 덫을 놓았던 것이다.
자일이 르네거를 노리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카리나.’
감히 그녀의 곁에 붙어 있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캄캄한 죽음의 강에 빠져 가라앉을 때, 자일은 생각했다. 카리나를.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싶었고 몸을 끌어안고 싶었고 그러한 채로 죽음에 몸을 내던지고 싶었다.
이러한 감정은 지금도 유효한 것이었으므로, 카리나의 곁에 있는 르네거가 끔찍하게도 혐오스러웠다.
‘반드시.’
반드시 죽여 주리라.
자일은 바르쥐었던 주먹을 펴며 생각했다.
“아들아. 알고 있느냐?”
카오스의 말이었다. 자일은 그에게 보다 다가가며 귀를 기울였다.
“그 어여쁜 아이가 우리를 위해 성물을 모으고 있더구나.”
카오스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떠올렸다.
그녀의 손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그녀의 곁에 있던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검을.
지난날, 그토록 탐하였던 것.
그것이 모두 다 카리나의 손에 있었다.
번뜩.
카오스는 눈을 올려 떴다.
“이제 그 아이를 돌려받을 때가 온 것 같구나.”
* * *
쾅쾅!
방문이 거세게 흔들렸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던 르네거는 눈을 찌푸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바닥으로 눈가를 지그시 누르며 한숨을 뱉는다. 그러자마자 또다시 쾅쾅 문이 흔들렸다.
혹 잠결에 잘못 들은 것인가 싶었으나 그건 아닌 듯했다.
르네거는 빠르게 방문을 열어젖혔다.
“……샐러딘?”
놀랍게도 문 앞에 서 있는 이는 샐러딘이었다. 르네거는 미간을 깊게 좁히며 샐러딘을 바라보았다.
“어쩐 일…… 아니, 여긴 어떻게 온 겁니까?”
그들이 헤어진 곳부터 이곳 마탑까지는 거리가 상당했다.
자신들은 피에톤의 워프를 이용했지만, 샐러딘은 그러한 능력이 없는 터. 하여 다시 만날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내가 어떻게 왔냐고?”
샐러딘은 킥킥 웃었다.
“그야 날개가 있으니까 날아왔지!”
촤악!
그의 등에서부터 새하얀 날개가 뽑혀져 나왔다.
천사의 날개가 저러할까.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순백의 색에, 르네거는 일순 눈이 멀어 버릴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각성을 한 겁니까?”
“그럼!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샐러딘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크게 외쳤다.
그는 정말 기뻐하고 있었다. 지난 시간 동안 가장 간절히 원했던 각성을 비로소 이룬 것이었으니까.
샐러딘은 기쁨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눈을 반짝였다.
“그러니까 말이야.”
샐러딘은 르네거의 팔을 잡아당겼다.
“한판 붙자.”
그의 입술이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 * *
이른 아침 일어난 카리나는 또렷한 햇살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었다.
탑이라는 장소의 그나마 좋은 점을 꼽아 보자면, 고도가 높기 때문에 여과 없이 햇살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카리나는 저를 쓰다듬어 주는 햇빛의 결을 느끼며 차분히 눈을 감아 내렸다.
보다 이 시간을 길게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카리나는 짧게 혀를 차며 문 쪽으로 다가갔다.
벌컥 문을 열자마자 보인 건 피에톤이었다.
전날의 혼란스러워하던 모습은 없다. 그는 그저 그의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어쩐 일이지, 생각하던 것도 잠시.
“이거. 주려고 왔다.”
피에톤은 제 손을 감싸고 있는 히론을 내던지듯 안겨 주었다.
“히론?”
카리나는 눈을 크게 뜨며 히론을 내려다보았다.
피에톤은 그때에 맞춰 손을 휘둘렀다.
히론의 입가에 맺혀 있던 초록색 빛무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 망할 놈의 인간 자식아! 어떻게 내게 마법을 걸 수 있느냐!]
“시끄러워서.”
[네 이놈……!]
히론은 꼬리를 파르르 떨며 그를 노려보았다.
짐작건대 피에톤이 마법을 이용해 히론의 입을 막아 버린 듯싶었다. 카리나는 피식 웃으며 히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는 왜 피에톤에게 간 거니?”
[어, 그것이…….]
히론은 말끝을 흐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피에톤이 끼어들었다.
“네 방을 못 찾고 헤매고 있던 걸 발견했다.”
[너……! 말하지 않겠다면서!]
“뱀과 하는 약속은 지키는 게 아니라고 들었다.”
히론은 입을 크게 벌렸다. 사나운 독니가 날카롭게 빛났다.
카리나는 빠르게 히론의 머리를 잡고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그만. 싸우지 마.”
[그러해도 저놈이!]
“히론.”
[……알았다.]
히론은 침울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카리나는 히론의 축 처진 꼬리를 일으켜 주며 부드럽게 그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딜 다녀왔어?”
[……말해 주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비밀이 많아서야, 원.”
히론의 행적에 대해서는 후에 물어 봐도 충분할 테다.
카리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히론을 어깨에 올렸다. 피에톤을 바라본다.
“넌 이제 괜찮니?”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날 보는 게 괜찮냐는 말이야.”
피에톤의 눈가가 사붓 떨렸다. 그는 카리나를 올곧게 직시하며 대답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거짓말.”
피에톤은 피식 헛웃음을 뱉었다.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시선을 떨어뜨린다.
카리나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그녀를 보는 것이 껄끄러웠다.
인간 같지 않은 모습이 두려웠고, 또한 인간 같지 않게 행동하는 모습이 역겨웠다.
그녀가 아포칼리타인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런 생각을 하다니.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본능적인 거부감이 그를 옥죄었다.
그런 와중에,
“르네거가 그러더군.”
르네거가 자신에게 말했다.
“선과 악을 나눌 수 없듯,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나눌 수 없다고.”
그 말을 들은 순간, 피에톤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진정 인간 같지 않은 건 누구던가.
제 누이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이들이 아닌가.
한데 자신은 그들을 인간이라 생각한다.
선을 위하여 움직이는 카리나 아포칼리타를 괴물이라 칭하며.
피에톤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카리나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고작 하루지만, 널 멀리했던 것을 사과하겠다.”
카리나는 뻗어진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사과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그녀는 헛웃음을 뱉으며 그의 손을 슬쩍 밀었다.
“딱히 손을 잡는 건 안 좋아해서. 마음만 받을게.”
“얼마든지.”
피에톤은 대답하며 힐끗힐끗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변한 모습은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으나, 두 번째로 보게 되니 그렇게 크게 어긋나 보이지는 않았다.
뱀의 비늘은 원래부터 그녀의 것이었던 것처럼 보였고, 뱀의 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금세 익숙해질 것을, 자신은 왜 그러했던가.
부끄러움이 올라왔다.
그런 피에톤을 지그시 바라보던 카리나는 재차 실소를 뱉었다. 그의 생각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르네거는?”
그렇기에 말을 돌린다. 이 주제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꼭대기에 있다. 연무장에 있는 것 같던데.”
“거길 왜?”
“글쎄.”
분명 쉬라고 말을 했는데, 또 내 말을 안 들었다 이거지. 카리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가 보지, 뭐.”
그녀는 방 밖으로 발을 내밀었다. 피에톤을 툭 치며 말한다.
“같이 갈래?”
“……그래.”
마탑의 길을 알고 있는 피에톤은 앞장서 걸어갔다.
카리나는 히론의 목을 만져 주며 그의 뒤를 따랐다.
가는 도중 몇몇의 마법사들과 마주쳤다.
피에톤은 그에 눈살을 찌푸렸고, 카리나는 싱긋 웃어 주었다.
두 가지의 다른 반응을 보였건만, 마법사들은 같은 반응을 보였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도망친 것이다.
아무래도 어제 지팡이를 제압했던 게 퍼진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두려워할 리 없으니.
‘피에라도 다시 봐야 하는데.’
그녀와 할 이야기가 많았다.
오늘 다시 한번 피에라를 만날 생각을 하며, 카리나는 피에톤이 열어 주는 문 너머로 발을 내디뎠다.
이곳은 마법으로 만든 공간이었다. 그렇기에 수풀이 있었고, 맑은 하늘이 있었고, 드넓은 초원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 르네거가 서 있다. 가파른 숨을 몰아쉬면서.
“헉, 허억…….”
이렇게까지 힘에 부쳐 하는 그의 모습은 꽤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카리나는 자연스레 그의 검 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샐러딘이 있었다.
“와, 이 미친놈 같으니라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샐러딘은 허탈하게 웃으며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이번에는 무승부다. 알지?”
“제가 이긴 것 같습니다만.”
“너도 지금 곧 죽을 것처럼 보이는데, 뭐.”
그건 맞는 말이었다.
르네거는 허탈하게 웃으며 검을 거뒀다. 샐러딘에게 다가가 손을 뻗는다.
“대단하군요. 까딱하단 죽일 뻔했습니다.”
“죽을 뻔이 아니고?”
“그럴 리가요.”
피식.
샐러딘 역시도 실소를 뱉었다. 르네거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킨다.
르네거는 샐러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3차 각성을 마친 그는 지나치게 강했다. 전력을 다해도 힘에 부칠 만큼.
이것이 바로 진정한 아포칼리타의 힘이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르네거는 마른침을 삼켰다.
일전에 히론에게서 들었던 말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인간이기를 포기할 생각은 없느냐?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지금보다 더 강해질 것이다.
더 강해진다면 카리나를 지킬 수 있겠지. 그녀에게 도움이 되겠지.
명료한 욕망이 목 끝까지 치달았다.
그렇게 그가 생각에 잠식될 때였다.
“너희, 뭐 하는 거야?”
카리나의 목소리였다. 르네거와 샐러딘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누나!”
어디서 힘이 난 건지, 샐러딘은 우다다 뛰어 카리나에게로 달려갔다.
“3차 각성의 힘을 한번 시험해 보려고 르네거와 싸워 봤어! 봤지, 무승부인 거? 나 이렇게 강해졌어!”
샐러딘은 아이처럼 재잘거리며 카리나에게 파고들었다. 카리나는 그런 샐러딘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뱉었다.
3차 각성을 하라고 검을 던져 준 건 맞았지만, 한 달 정도의 시간은 걸릴 것이라 생각했던 그녀였다.
하여 그 시간 안에 모든 것을 끝내려 했는데.
‘벌써 각성을 해 버리다니.’
카리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누나? 왜 그래?”
샐러딘은 그런 카리나의 상태를 바로 알아챘다.
“안 되는 거였어……? 르네거와 싸운 게 싫은 거야?”
“아니, 아니. 그럴 리 있겠니.”
카리나는 우울해진 샐러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히 말했다.
“강해졌구나.”
샐러딘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그는 히히 웃으며 카리나에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있잖아, 누나.”
그러며 귓가에 속삭인다.
마치 카리나의 모든 계획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기에 이렇게 빠르게 성장을 이룬 것처럼.
“누나 혼자 싸우게 두지 않을 거야.”
그는 카리나를 꽉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