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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117화 (117/135)

117화

“누나 혼자 싸우게 두지 않을 거야.”

샐러딘의 품에 안긴 카리나는 그대로 숨을 삼켰다.

본래의 계획은 샐러딘이 각성을 마치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샐러딘은 이르게 각성을 했고, 또 저를 붙잡고 말한다. 마치 내 생각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이런 건.’

카리나는 입술을 말아 깨물었다. 슬그머니 샐러딘을 밀치며 거리를 둔다.

“일단, 알았어.”

일단이라니. 샐러딘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럼 내가 앞으로 뭘 하면 될까? 르네거와 계속 싸우면서 힘을 기를까?”

“아니, 그것보다는.”

카리나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사붓 좁혀진 미간은 그녀의 고심을 드러내 주었다.

“다른 형제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와.”

“다른 형제들?”

“그래. 탑에 있지 않던 아포칼리타들 말이야.”

고개를 갸웃하던 샐러딘은, 이내 눈을 가늘게 떴다. 싸늘한 기색이 곧장 스며들었다.

“자일이 그들을 찾아갈 거라 생각하는 거야?”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치만 알아 와. 싸우거나 하지 말고.”

“하지만 나는 이제 강해졌는데.”

“약속해.”

“……노력할게.”

“샐러딘.”

카리나는 눈을 부릅뜬 채 샐러딘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애써 피하려던 샐러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알았어, 알았어. 찾아만 볼게. 됐지?”

“그래.”

카리나는 피식 웃으며 샐러딘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의 뒤편에 서 있는 르네거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샐러딘이 꽤 강해졌지?”

그녀는 피식 조소했다.

“그러해도 널 이기진 못했나 보네.”

“내가 일부러 봐준 거거든?”

“그래, 그래.”

카리나는 재차 샐러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한데 이상한 일이다.

본래 같으면 이럴 때에 르네거가 끼어들어 한두 마디라도 했을 텐데, 이상하게도 말이 없었다.

카리나는 르네거에게로 시선을 집중했다.

르네거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긴 했으나 어딘가 불편함이 느껴졌다.

뭔가 이상해.

그녀는 샐러딘을 지나쳐 르네거에게로 다가갔다.

“괜찮니?”

르네거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안색은 분명한 이상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디가 아파?”

르네거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곧장 몸을 일으켰다.

“아닙니다. 오랜만에 싸워 본지라 힘이 빠져서 그렇습니다.”

“……그래?”

“거봐. 내가 봐준 거라니까?”

르네거의 평온한 답과 샐러딘의 킬킬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카리나는 여전히 시름을 놓지 않았다.

“아픈 거라면, 말해. 레피오스 님을 불러 줄 테니까.”

“아니요.”

르네거는 고개를 저었다.

“전 정말 괜찮습니다.”

대답하는 르네거의 얼굴은 이제 전과 다름이 없었다.

괜찮은 거겠지.

카리나는 어쩐지 불안한 마음을 접어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에 보지 못했다.

허리 뒤로 숨긴 르네거의 두 손이 경련하고 있는 것을.

* * *

“쿨럭!”

방으로 들어온 르네거는 곧장 검은 피를 토했다.

먼젓번 죽음의 강에서 돌아온 이후, 르네거는 이따금씩 피를 토하곤 했었다. 그것도 악취가 나는 검은 피를.

“쿨럭, 젠장…….”

르네거는 히론이 건네주었던 레피오스의 약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남은 것은 고작 세 알.

이것만으로 과연 버틸 수 있을까.

르네거는 으득 이를 깨물었다.

[꼴이 말이 아니구나.]

히론의 음성이었다. 르네거는 열린 문틈으로 들어오고 있는 히론을 바라보았다.

다가온 히론은 르네거의 주변을 뱅뱅 맴돌며 혀를 날름거렸다.

[쯧쯧. 역시나 죽음의 기운이 네 몸에 그득하구나. 이걸 어쩔꼬.]

그는 혀를 차며 말했다.

[곧 죽겠구나.]

르네거는 바닥을 짚었던 손을 바르쥐었다.

죽는다니.

그것만큼은 안 되는 일이다.

적어도, 적어도 카리나가 모든 목표를 이룰 때까지는 살아 있어야 했다.

르네거는 간신히 고개를 겨누어 히론을 직시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습니까?”

가긍할 정도로 간절한 목소리였다.

삶에 대한 욕망을 모르는 히론이 아니었기에, 르네거의 마음을 백번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정과 같은 감정은 사치일 뿐.

히론은 보다 냉정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면 된다.]

“그러니 어떻게.”

[먼저 성력을 버려야지.]

“…….”

[그리고 인간의 목숨을 버려야지. 네 손으로 심장을 꿰뚫는 것도 좋을 테다.]

“……그건.”

[그리고 아포칼리타의 마나핵을 네 놈의 몸에 넣으면 된다.]

르네거는 차분히 숨을 내쉬었다.

히론이 한 말을 종합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

“아포칼리타가, 되란 말씀이십니까?”

아포칼리타가 되라는 것.

르네거의 두 눈이 흔들렸다.

[왜, 네 신념에 어긋나는 일이더냐?]

그러한가?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아포칼리타라는 생명을 이어받는 것이 신념에 어긋나는 행동인가?

“아닙니다.”

과거 나의 신념이었다면 그럴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은 오직 하나.

카리나를 지키는 것뿐.

르네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 당장 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아서라. 지금은 아포칼리타의 핵이 없어.]

히론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곧 다른 아포칼리타를 만나러 갈 것이다.]

“그때에 마나핵을 빼 오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르네거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몸의 고통 때문에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려웠으나, 그러해도 생각을 정리할 수는 있었다.

“제가 그렇게 변해 버리면.”

그는 히론을 주시했다.

“지금보다 더 강해질까요?”

피식.

히론의 잇새에서 숨이 새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한 말을 하는구나.]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창밖, 먼 산을 내다보았다.

황량한 대지를, 빛이 들지 않는 공간을.

[나 대신 카리나를 지켜 줄 수 있을 만큼 강해질 거다.]

그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 * *

샐러딘은 곧장 다른 형제들을 찾으러 가 보겠다며 뛰쳐나갔다.

조금이라도 쉰 후 나가라고 만류했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누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은 빨리 하고 싶어.

단호히 말을 하는 그를 차마 말릴 수 없었기에, 카리나는 어쩔 수 없이 샐러딘을 배웅했다.

‘이렇게 빠르게 진행될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잘된 일일 테다.

자일이 다른 아포칼리타를 공격하려 할 때 급습해 그를 죽이면 될 테니.

‘더 강해지기 전에 해치워야 해.’

거기에 아버지까지 있으니 더더욱.

카리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때, 복도 저편에서 익숙한 사람들이 보였다.

피에톤과 피에라.

카리나는 잠시 걸음을 늦추며 그들이 나누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는 수장님과 할 이야기가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피에톤은 보다 날 선 어투로 말했다. 피에라는 착잡한 듯 한숨을 내뱉었다.

“네가 캄바이트를 배신한 것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그럼 무슨 말씀을 하시려 합니까?”

“……이 모든 일이 끝나면.”

피에라는 피에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캄바이트로 돌아올 수 있냐는 말을 하려 했다.”

피에톤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기겁을 하며 피에라의 손을 떼어 냈다. 마치 그녀에게 조금도 닿기 싫다는 듯이.

“제 누이를 죽인 이들을 벌하지도 않으면서, 제가 이곳에 있길 바라는 겁니까?”

“피에톤.”

“제가 돌아오길 원한다면 그들을 먼저 죽여 주십시오. 그렇다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피에라는 안쓰러움이 섞인 눈으로 피에톤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그런 시선을 무시했다.

피에톤은, 이 마탑이 싫었다.

계단을 걷고 있다 보면 누이가 생각이 났다.

방에 들어가다 보면 누이가 떠올랐다.

정경을 보고 있다 보면 누이가, 또 누이가, 누이가…….

이제는 다신 만날 수 없는 누이가 상기돼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누이를 죽음에까지 몰고 간 그들을 더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피에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에톤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세 명의 마법사가 서 있었다.

티투스, 케지아, 에단.

모두 누이를 괴롭히고 핍박했던 이들이다.

피에톤의 눈이 싸늘하게 가늘어졌다.

“우리는 헬리아스를 죽이지 않았다.”

개중 앞에 서 있던 에단의 말이었다.

“정말이야. 우리는 그저…… 헬리아스가 조금 더 강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에.”

“말 몇 마디를 한 것뿐이야. 몰아붙인 게 아니라고.”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알지 못했을 거다.”

그들은 마치 준비라도 해 온 듯 번갈아 가며 말했다.

“그러니까, 피에톤.”

“용서해.”

용서하라고?

피에톤은 주먹을 바르쥐었다. 초록색 빛무리가 그의 주먹 사이사이에서 흘러나왔다.

“헬리아스도 그걸 원할 거…….”

쾅!

피에톤은 에단의 어깨 바로 옆으로 힘을 날렸다. 에단의 뒤쪽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피에톤! 이게 무슨 짓이냐!”

“나는.”

그는 피에라의 외침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도 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점철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떠오르면 가슴이 찢기는 것 같고, 스쳐 보내려 해도 목이 메는 감각이 떨어지지 않아.”

피에톤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너희는.”

“…….”

“누이를 괴롭힌 너희는.”

“…….”

“어떻게 그렇게 쉽게 용서하란 말을 할 수 있나?”

핏발이 선 두 눈 또한, 경련이 가득해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누이의 앞에서 그 말을 한 적이 있었나? 누이의 묘 앞에서 그 말을 한 적이 있었나? 누이를 위해 기도를 올린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냐는 말이다!”

피에톤은 손을 크게 휘둘렀다. 하지만 공격은 하지 못했다. 피에라가 그를 막았기 때문이다.

“피에톤! 그만하라 하지 않았느냐!”

피에톤은 허공에 멈춰 버린 제 손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비스듬하게 고개를 돌려 피에라를 바라보았다.

“저를, 끝까지 말리시는군요.”

그의 눈이 새빨개졌다. 바들바들 떨리는 두 눈과 두 팔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이대로 힘을 폭발한다면, 이곳에 있는 모두가 죽으리라.

피에라는 곧장 달려들 준비를 하며 자세를 잡았다.

이때였다.

“그만.”

그들의 사이에 끼어든 건 다름 아닌 카리나였다. 그녀는 피에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네가 저번에 부탁한 게 있었지.”

카리나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피에톤이 눈이 커지는 그때, 카리나는 탁 손을 튕겼다.

“꺄악!”

“이, 이게 뭐야!”

“다, 당장 내려놔!”

그 즉시 서 있던 마법사들의 몸이 공중으로 부유했다.

놀란 그들은 거듭 소리쳤지만, 이내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 목이 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게 됐네.”

카리나는 그런 마법사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도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을 보면 화가 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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