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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118화 (118/135)

118화

“윽!”

허공에 매달린 마법사들은 발버둥만 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팡이를 쥘 힘도 남아 있지 않다. 아니, 지팡이를 쥘 수 있다 한들 감히 아포칼리타와 대적할 수 있을까.

카리나는 그런 그들을 무심히 응시했다.

뱀의 것과 같은 눈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싸늘하고, 냉정할 뿐.

마법사들은 곧 발버둥을 포기했다. 이어 찾아올 죽음을 직감했기 때문일까.

카리나의 입술이 비죽 올라갈 때였다.

“그만하시오.”

피융!

초록색 빛이 카리나의 손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피에라의 힘이었다.

“당신은 캄바이트와 동맹을 맺지 않았소?”

피에라는 카리나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동맹은 곧 모두의 안전을 뜻하는 것인 터. 나의 마법사들을 죽일 수 없소.”

카리나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탁, 손을 튕긴다. 그 즉시 공중에 떠 있던 마법사들이 풀썩 쓰러졌다.

“콜록, 컥…….”

그들은 숨을 몰아쉬며 몸을 웅크렸다. 카리나는 그런 그들을 내려다보다, 이내 다시 피에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난 피에톤과의 동맹을 먼저 맺었단다.”

피에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카리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의 아래에 쓰러져 있는 마법사들도 바라본다.

“조건은 저 마법사들의 죽음이었지.”

꿀꺽.

피에톤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느새 카리나가 자신을 직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말을 건네는 듯싶었다.

저들이 죽길 원한다면 그렇게 해 줄게, 얼마든지 말하렴.

피에톤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타인의 생사를 쥐고 있는 권력은 묘한 배덕감을 일으킴과 동시에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피에톤.”

피에라는 그런 피에톤을 붙들었다.

“헬리아스의 죽음을 다른 이의 탓으로 돌리지 마라.”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다른 이의 탓이라니. 피에톤은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자리를 비운 때, 저들이 누이를 괴롭혔다는 증거가 명백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누이가 자살을 한 것이고!”

흥분한 그의 머리를 차게 식힌 것은 피에라의 냉정한 말이었다.

“헬리아스가 고작 다른 마법사들의 흉에 자살을 선택할 이라 생각하느냐?”

피에라는 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얼핏 안타까움이 스쳐 갔으나 명확하지는 않았다.

“너 때문이다.”

피에톤의 숨이 멎었다.

“헬리아스가 마법을 쓰지 못하게 만든, 너 때문이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 때문이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죽음의 강에 맹세하게 만든 자신 때문에, 맹세로 인하여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된 무력감 때문에, 헬리아스가 자살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고 스스로 짐작하고 있는 까닭이 아닐까.

아니, 아니. 나 때문이 아니다. 피에라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헬리아스가 죽은 건 나 때문이 아니라 저 간악한 마법사들 때문이라고!

“이제는 제발 인정하거라, 피에톤. 헬리아스는 누구도 아닌 너 때문에 가장 힘들어했으니.”

피에톤은 입을 뻐끔거렸다.

두 손에서 시작된 경련은 그의 몸 모든 곳을 잠식했다.

눈에 핏발이 섰다. 피눈물이 흐를 것처럼 두 눈이 새빨개졌다.

“하아.”

그런 팽팽한 긴장감을 흩뜨린 건 카리나의 한숨 소리였다.

“언제는 용서하라 했으면서 이제는 인정하라 하는구나.”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 채 이마를 짚었다. 눈가에 힘을 주며 피에라를 노려본다.

“누이를 지키고자 한 일과, 단순히 괴롭히고자 한 일은 결이 다르지 않겠니?”

그러며 마법사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꺄악!”

“으윽!”

“카리나!”

짙은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카리나는 마법사들의 가슴을 꿰뚫은 힘을 천천히 거두며 비죽 비소했다.

“뭐 해? 빨리 옮기지 않고. 저대로 두면 죽을 텐데.”

피에라는 까드득 이를 갈았다. 하지만 지금은 카리나와 입씨름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빠르게 마법을 펼쳐 쓰러져 있는 마법사들을 일으켜 세웠다.

“이 빚은 잊지 않겠소.”

“얼마든지.”

마법으로 그들을 띄운 피에라는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 곧장 치료를 하러 가는 것이리라.

하아.

카리나는 재차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피에톤을 바라보았다.

“죽이라고 하면, 다음에는 죽여 줄게.”

피에톤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떨리는 눈으로 카리나를 바라본다.

그의 벌려진 입에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무어라 말을 하려는 것 같은데, 구현되지 않아 흐린 소리만이 나올 뿐이었다.

“너.”

카리나는 재차 미간을 좁혔다.

“나약하구나.”

피에톤의 정신이 그제야 돌아왔다. 그는 축축해진 눈가를 손등으로 벅벅 닦았다.

“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애꿎은 카리나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입은 멈추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내 마음을 짐작하려 하지 마라.”

카리나는 그런 피에톤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다 피식 실소를 흘린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녀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씁쓸한 조소가 입가에 가득하다.

“나도.”

카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말아 쥐었다.

“나 때문에 형제 열셋이 죽었지.”

피에톤의 눈이 커졌다. 카리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너와 같은 게 아니야. 나는 책임을 전가할 수 없었단다. 정말, 그들은 나를 위해 죽은 거니까.”

울퉁불퉁한 척추는 그녀의 말을 입증해 주는 증거였다. 카리나는 팔을 감쌌다.

“형제 열셋의 생명을 몸에 넣어 보았니?”

“……그건.”

“미치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는 삶을, 너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

과거, 그러니까 얼마 되지 않은 과거, 카리나는 눈을 감아도 떠도 형제들의 형상이 떠오르는 걸 느꼈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죽음을 지울 수 없던 그녀였다. 그들을 외면하지 못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렇지만 말이야.”

카리나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과거니까.”

그것은 이제 과거였다.

쥐고 있는 것이 더 많아진 현재. 언제까지나 과거에 매몰돼 있을 수 없었다.

“과거라고 생각해야지, 어쩌겠니.”

그렇기에 그저 속죄할 뿐. 그들의 안녕을 빌 뿐.

지금은 미래를 생각해야 될 때니까.

“나약한 모습은 오늘로 끝내렴.”

카리나는 피에톤에게로 천천히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곧 전쟁이 일어날 테니.”

* * *

나약한 모습을 끝내라니.

난 몇 년이나 나약하게 살아왔으면서.

방으로 돌아온 카리나는 스스로의 말을 되짚으며 크게 웃었다.

제 흠을 생각하지도 않고 멋대로 타인에게 충고를 한다. 참 우스운 일이 아닌가.

카리나는 넋을 놓고 있던 피에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며 슬픔이 맴돌았던 눈을.

‘짜증 나게.’

그녀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몰아치는 바람을 느끼며 눈을 내려 감는다.

지크, 아실, 니텟, 엘리오르, 로리, 유레이, 칼라니, 시디, 윌터, 패트릭, 아일라, 줄리아, 벤야민…….

척추뼈 하나하나에 각인된 그들의 이름은 쉽게 잊히지 않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미래를 향해 달려 나가고 있다 한들, 과거를 쉬이 지울 수 없었다.

과거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계단이니까.

‘하지만…….’

그러해도, 전처럼 짙은 우울감에 빠져 괴롭거나 하지 않았다. 구역질이 나와 눈물을 쏟으며 끅끅대지 않는단 말이다.

‘모두 덕분이겠지.’

르네거, 샐러딘, 히론. 이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완성이 됐다.

과거를 기억하나 피폐해지지 않는 내가, 미래를 꿈꾸나 과거를 지우지 않는 내가 존재하게 됐단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그들에게 피해를 줘선 안 돼.

내가 모두를 지킬 테니까.

카리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내려 감았다. 방문이 열리는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익숙한 발걸음도.

“카리나.”

그녀는 등 뒤에서 자신을 안는 르네거의 품을 느끼며 슬며시 미소지었다.

“넌 내가 네 생각을 할 때마다 오는구나.”

그 말에, 르네거의 손이 움찔거렸다. 보지 않아도 그가 웃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럼 항상 곁에 있어야 할 텐데요.”

그는 카리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

“당신은 매 순간 제 생각을 할 테니까.”

카리나는 푸흡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게서 등을 떼어 낸 후 몸을 돌려 마주 본다.

“건방지게.”

그녀는 르네거의 뺨을 한 번 튕기며 코를 찡긋했다. 르네거 역시 비슷한 웃음을 내보였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아까 전, 몸이 좋지 않은 것처럼 보이던 르네거가 아니었는가.

그에 연장선인 듯 지금의 르네거도 낯빛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카리나는 눈을 가늘게 올려 떴다.

“무슨 일이 있니?”

“그럴 리가요. 아무 일 없습니다.”

르네거는 빠르게 대답했지만, 카리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이 안 좋은데.”

“잘생긴 건 여전하니 괜찮지 않습니까?”

“농담할 기분 아니야.”

“죄송합니다.”

카리나는 피식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그리고 르네거의 뺨을 쓰다듬었다.

“말해 보렴. 무슨 일이니?”

르네거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내려 감았다.

까끌까끌한 비늘이 느껴지나, 그건 아주 작은 감각일 뿐. 부드러운 손길이 그를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카리나.”

르네거는 천천히 눈을 올려 떴다. 그리고 카리나의 손에 깍지를 끼며 잡았다.

그는 카리나에게로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그녀의 뒤에 있는 난간에 손을 대며, 몸을 더 가깝게 밀착한다.

“당신과 함께하면, 제 성력을 잃는다고 했지요.”

르네거는 카리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지금.”

그의 뜨거운 숨이 틈 없이 밀착된 그들 사이를 더듬었다.

“당신에게 제 힘을 바쳐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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