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아포칼리타의 흔적을 따라 떠났던 샐러딘은, 얼마 가지 못해 비행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느껴지지 않아.’
더 이상 아포칼리타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포칼리타들은 모두 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마치 한꺼번에 증발한 것처럼 모두가 다 사라졌다.
한꺼번에 그들을 죽였다 한들 어떻게 그 먼 거리를 오갈 수 있나, 싶다가도 아버지의 힘을 생각하면 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완전한 부활을 한 것인가.”
처음 세상에 태어나, 아버지를 보았을 때 샐러딘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덜덜 떨었었다.
본능적으로 겁을 먹은 것이었다.
아버지, 카오스의 힘이 강대했기 때문에.
그의 앞에 서 있다 보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게 되었고, 그와 얼굴을 맞대고 있다 보면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턱 막혔다.
이제 막 창조된 주제에 인지 능력이 있겠느냐만. 샐러딘은 본능적으로 강한 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후, 아버지는 약해졌다.
자신의 힘을 뽑아 우리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그에 루나와 같은 이들은 안타까워했고, 자일과 같은 이들은 더욱 아버지의 곁에 있으려 했으나 샐러딘은,
‘잘되었다고 생각했지.’
뒤에서 아버지를 비웃으며 더욱 힘을 키웠었다.
개는 주인을 알아보나, 샐러딘에게 있어 카오스는 주인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물어뜯어야 할 이일뿐.
그래서 카리나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했을 때 기뻐 마지않았다. 그녀가 자신 대신 그를 짓밟아 주었기 때문이다.
‘부활할 줄은 몰랐지만.’
이번에는 내가 죽일 거다.
개로 만들어 개처럼 굴려 나를 키운 그의 목덜미를, 반드시 찢어발겨 주리라.
세계에 퍼져 있던 6마리의 아포칼리타들의 흔적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의 아포칼리타는 없는 것인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한 마리가 남아 있어.’
카리나에게 빨리 말해 줘야 했다.
샐러딘은 그대로 비행의 노선을 틀었다.
캄바이트의 마탑으로 돌아온 샐러딘은 곧 익숙한 누군가를 찾았다.
피에톤이었다.
“야, 버러지.”
샐러딘은 피에톤의 엉덩이를 툭 치며 말했다.
“카리나는 어디 있냐?”
한데 이상한 일이다.
원래 같으면 발광을 하며 화를 내었을 놈인데, 지금은 희한하게 조용했다.
왜 이래?
샐러딘은 눈을 새치름하게 뜨며 피에톤의 앞으로 다가갔다.
“뭐야. 너 우냐?”
“누가 우나. 아니다.”
그런 것치고는 눈과 코가 빨간데. 샐러딘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 있었냐?”
피에톤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굽혔던 허리를 세우고 샐러딘과 마주 선다.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않나? 갈 길 가거라. 귀찮게 굴지 말고.”
“뭐, 뭐, 귀찮아?”
하! 샐러딘은 팔짱을 끼며 헛숨을 뱉었다.
“이 나쁜 새끼. 걱정해 줘도 지랄이네.”
“걱정?”
피에톤의 눈이 다소 커졌다.
샐러딘의 얼굴을 살펴본다. 자신을 비웃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건 과연 오만한 착각이었다. 샐러딘은 저를 그저 쳐다보고만 있었다. 다소 눈을 찌푸리며.
“하, 정말…….”
피에톤은 허탈하게 웃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아포칼리타들이 더 인간 같군.”
그러며 말을 덧붙인다.
“물론 네가 캄바이트를 공격할 때에는 악마라고 생각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샐러딘은 으쓱 어깨를 올렸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좋아졌다.
설마 인간 같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아니, 그건 아닐 테다. 아니어야만 했다.
샐러딘은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인간들이 네게 지랄했냐?”
“…….”
“내가 죽여 줘?”
피에톤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왜?”
그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내 사사로운 분노를 왜 네가 해결해 주겠다는 것이냐?”
그건 당연히 네가 동료니…….
샐러딘은 입을 다물었다. 튀어나오려던 말을 삼키며 흥 고개를 돌린다.
“호의를 베풀면 베푸는 대로 받지, 뭘 그렇게 꼬치꼬치 물어! 짜증 나게!”
그는 피에톤의 어깨를 팍 치며 외쳤다.
“카리나한테 안내나 해!”
그러며 앞서 걸어간다. 뒤이어 피에톤이 푸흡 웃음을 터뜨린 걸 못 들은 척하며.
* * *
“지금.”
그의 뜨거운 숨이 틈 없이 밀착된 그들 사이를 더듬었다.
“당신에게 제 힘을 바쳐도 되겠습니까?”
카리나는 순간 멍해졌다.
힘을 바친다는 게 무슨 뜻인가. 그가 가지고 있는 성력을 모두 다 내게 준다는 뜻이 아니던가.
이런 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안 되는 일이었다. 절대 허락해선 안 되는 일.
“카리나.”
르네거의 음성은 처절했다. 그는 마치 절벽 끝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절박한 목소리로 카리나의 귀를 더듬었다.
“부탁입니다.”
맞닿은 살이 뜨거웠다. 손을 대면 데일 것만 같아, 카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젖혔다.
“너는.”
카리나는 잔기침을 하며 입속의 말을 골랐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니?”
르네거는 그제야 어깨에 묻었던 얼굴을 떼어 내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두 눈이 왜인지 귀엽게만 보였다.
“갑자기가 아닙니다. 항상 이런 생각을 해 왔으니.”
르네거는 속내를 감추며 말했다.
“성력이 없어진다면 너는 약해질 거야.”
“괜찮습니다.”
카리나의 눈이 가늘어진 건 그 순간이었다.
“너.”
그녀는 르네거의 뒷목을 그러당겼다.
“다른 생각이 있는 거구나.”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 르네거의 느슨한 숨과 카리나의 촘촘한 숨이 한데 얽혔다.
“내 옆을 지키겠다고 백 번도 넘게 말했던 너인데, 이제 와 마음이 변했을 리는 없고.”
“…….”
“솔직하게 말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내가 곧 죽게 되니,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당신과 같은 아포칼리타가 되려 한다는 걸 어떻게 말할 수 있냐는 말이다.
철저하게 숨겨야 했다.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르네거는 저를 붙잡은 카리나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그래서 참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른하게 들어 올려진 푸른 눈에는 열망이 얼기설기 엉켜 있었다.
이것만 보자면 그의 말 모두가 진실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이성적이지 않아.”
카리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르네거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사랑이 어떻게 이성적일 수 있습니까?”
르네거는 그런 카리나의 뺨에 제 뺨을 대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카리나.”
그의 입술이 뺨에 닿았다. 조금씩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카리나는 르네거의 어깨를 붙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안 되겠습니까?”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입술을 삼킨 그는 깊은 곳까지 헤집으며 카리나와 더 가까이 밀착했다.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해야 하는데.
카리나는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르네거의 목을 그러당겼다. 다리에 묵직한 감각이 퍼졌다. 르네거는 그녀의 허벅지를 들어 올리며 더욱더 몸을 파고들었다.
이때였다.
쾅!
거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누나! 나 찾아 왔어! 마지막 한 마리가 어디 있는지 알아 왔다고!”
“들어가지 말라 하지 않았나!”
모습을 드러낸 건 샐러딘과 피에톤이었다.
피에톤은 카리나와 르네거를 보자마자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렸고,
샐러딘은,
“너, 너, 너 이 새끼……!”
이를 흉포하게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떨어져!”
* * *
“이씨…….”
샐러딘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씩씩 콧김을 뱉고 있었다.
르네거를 흘겨본다.
아무리 자신이 인간의 삶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해도, 르네거가 카리나에게 하려 했던 게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감히 내 누나를.’
샐러딘은 눈을 부라렸다. 르네거를 씹어 삼킬 것처럼 그를 노려본다.
하지만 르네거는 샐러딘의 시선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카리나만을 바라볼 뿐.
‘하루라도 빨리.’
그녀에게 성력을 넘겨주고, 아포칼리타의 마나핵을 받아야 한다.
그는 울컥울컥 치미는 통증을 애써 가라앉히며 생각했다.
“그래서.”
카리나의 말이었다.
“왜 이렇게 일찍 온 거니?”
샐러딘은 이제야 정신을 차리며 짝 손뼉을 쳤다.
“너무 당황해서 깜빡하고 있었다. 헤헤.”
그는 민망한 듯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아포칼리타들이 다 죽었어.”
“……그래?”
“응. 6마리 모두 흔적이 모두 끊겼거든. 마치 동시에 죽은 것처럼.”
아버지의 힘인가.
카리나는 미간을 좁혔다.
이렇게 되면 그들을 추적하는 게 힘들어질 텐데.
생각한 것도 잠시.
“하지만 한 마리가 남아 있어.”
남아 있다니?
원작에서는 분명 6마리의 아포칼리타가 남아 있지 않았던가.
카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씨익.
샐러딘은 입술을 치켜올렸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내가 호의를 베푼 적이 있거든.”
안타레스.
과거, 샐러딘이 사도를 찾으러 다닐 때 마주했었던 아포칼리타.
그때에 그를 죽이려 하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 봉인해 뒀었지.
“죽음의 강에 있을 거야.”
샐러딘의 힘이 아니면 봉인을 풀 수 없을 테니 자일이나 카오스도 알아채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곳으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