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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120화 (120/135)

120화

[죽음의 강이라…….]

샐러딘의 말을 모두 들은 히론은 꼬리를 파르르 떨며 말했다.

[인간들이 감히 갈 수 없는 곳이지.]

그는 피에톤을 돌아보며 말했다. 카리나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피에톤은 다른 마법사들과 바깥에 있는 게 좋겠어. 샐러딘에게 세계의 끝으로 가는 워프석을 받아 보관해 놓으렴. 문제가 생겼다 싶으면 그때 워프 게이트를 여는 역할을 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알겠어.”

차례로 대답하는 피에톤과 샐러딘을 뒤로하고, 카리나는 르네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르네거는.”

[르네거는 함께 간다.]

뭐?

카리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왜긴 왜겠느냐. 저놈을 데리고 가는 게 득이니 그렇지.]

“르네거도 인간이야. 인간이 감히 갈 수 없는 곳이라 한 건 너고.”

카리나는 짜증을 섞어 말했지만, 히론은 물러서지 않았다.

[어차피 죽음의 강에 한 번 다녀온 놈이 아니더냐. 그리고 어떻게 돌아 왔는지 저도 모른다고 하던데.]

“그건.”

[이번에 가면 확실히 알 수 있게 되겠지.]

카리나 역시도, 르네거가 그곳에서 어떻게 돌아왔는지 궁금했다.

만약 신의 힘을 쓴 것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발휘했는지도 궁금했고.

하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하니?”

그저 호기심일 뿐이었다. 그의 목숨과 맞바꿀 만큼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다.

“별 상관이 없는 일 아니야? 난 르네거와 함께 가고 싶지 않아.”

[카리나야.]

히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걱정하는 건 알겠지만, 무조건 같이 가야 한다.]

“하지만.”

“카리나.”

그런 그들의 대화에 끼어든 건 르네거였다.

르네거는 카리나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전 갈 겁니다.”

조금의 떨림도 없는 그의 손은 견고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듯했다.

“당신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는 애가, 아까는 힘을 모두 다 내게 준다고 했니.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들이라고.

카리나는 르네거와 히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뭔가가 있어.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둘이 무슨 작당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카리나는 닿아 있는 르네거의 손을 떼어 내며 말했다.

“난 잠자코 넘어가 주지 않을 거야.”

그러곤 벌떡 몸을 일으켰다. 르네거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말한다.

“밤에 출발하자. 샐러딘은 게이트를 준비해.”

그런 카리나의 태도에, 르네거는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의 내 생각을 알게 되면 당신은 화를 내겠지.

당신은 인간이 되고 싶어 했고,

나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된 것이니.

어쩌면 그 후에 카리나가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후회할까.’

르네거는 재차 웃었다. 쌉싸름한 감각이 입안에 가득했다.

* * *

“오늘 떠난다는 말이오?”

피에라의 말이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카리나는 긴 다리를 쭉 뻗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렇게 갑자기.”

“이 싸움이 빠르게 끝나길 가장 염원하고 있는 건 나야.”

“……마법사들을 모으겠소.”

“너희는 가지 못해.”

여전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카리나는 단호히 대꾸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가야 하거든.”

피에라의 눈이 커졌다.

“죽음의 강에 간단 말이오?”

“그래.”

카리나는 말을 덧붙였다.

“그 앞에서 피에톤과 함께 기다리렴. 혹시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말인즉, 자신들을 아포칼리타와의 전투에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싸움은 카리나 자신이 할 것이라고.

피에라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카리나의 생각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당신은.”

그녀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가며 말했다.

“우리의 힘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니오? 그래서 우리와 동맹을 맺은 것이 아니었소?”

같이 싸우자는 것인 줄 알았다. 아포칼리타와 함께 대응하자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하여 수백, 어쩌면 수천의 피를 흘릴 것을 각오하고 있었건만.

“난 지팡이가 필요했어.”

카리나는 너무도 냉정히 말을 끊었다.

단순히 지팡이만 필요했다니. 피에라는 헛웃음을 뱉었다.

그녀의 금색 눈이 사붓 날카로워졌다.

“우리를 죽이고 가져갈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오.”

카리나는 그제야 천장에 두었던 시선을 내렸다.

피에라를 바라본다. 혼란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그녀를 응시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카리나는 작게 입을 열었다.

“널 죽이고 싶지 않았거든.”

진심이었다.

원작에서, 그녀는 피에라를 꽤 응원했었다. 그래서 뒤에 피에라가 죽었을 때 눈물을 찔끔 흘리기도 했고.

그녀는 피에라의 신념을 존중했다. 올곧은 태도를 존경했다.

그래서, 피에라가 죽는 걸 원치 않았다.

침묵이 이어졌다.

피에라는 어떠한 말도 뱉지 않았다. 카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다시금 고개를 뒤로 젖혔다. 천장을, 그러니까 신의 형상이 그려져 있는 천장을 바라본다.

마탑의 곳곳에 신의 형상이 그려져 있다.

이들은 모두 신을 믿기 때문, 이겠지.

그런 맥락에서 아포칼리타의 신전에 새겨져 있는 악마의 형상은 무엇일까.

나는 악마를 믿고 있는 것인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악을 숭배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악인가, 선인가.

피에라를 살리려 한 나의 마음은 선일 테지만 그것을 이끌어 낸 나의 행동은 과연 선인가.

마음과 행동이 같지 않을 경우에, 그것을 무엇이라 지칭해야 하는가.

복잡한 생각이 가슴을 치밀고 올라왔다.

“카리나 아포칼리타.”

한참 동안 이어졌던 침묵을 깨뜨린 피에라의 말이었다.

“당신은 선이 아니오.”

그런 것쯤은 나도 안다고. 카리나는 그렇게 비죽 대꾸할 뻔했다.

“그렇다고 해 악이라 할 수도 없지.”

카리나는 까딱이던 발끝을 그대로 멈췄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되돌렸다. 피에라의 올곧은 얼굴이 보였다.

“당신을 통해 배웠소. 선과 악은 이분법해 나눌 수 없는 것이라고.”

그녀는 카리나를 똑바로 직시하며 말했다.

“그러니.”

피에라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맞잡은 두 손은 떨리지 않고 있다. 마치, 진심이라는 걸 드러내 주는 것처럼.

“고맙소.”

* * *

휘이잉.

바람이 분다.

이는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것.

자일은 제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손을 뻗었다. 죽음의 강을 더듬고 있던 바람이 한곳으로 모여 그의 손가락을 휘감았다.

남은 6마리의 아포칼리타를 죽여 그들의 마나핵을 삽입한 결과, 그는 강해졌다.

발을 구르면 땅이 솟구치고, 손을 뻗으면 폭풍이 몰아치며 날개를 펴면 불길이 치솟는데, 어찌 세계의 지배자가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그는 계획을 실행하려 했다.

이 계획만 성공한다면. 아니, 성공은 확실한 것이니 이 계획이 끝난다면.

그녀를 얻을 수 있으리라. 그녀를 가질 수 있으리라.

세계를 내 발밑에 꿇리고, 그녀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한 마리.’

마지막 하나가 남아 있었다. 이는 카오스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자일과 카오스는 빠르게 기운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흔적을 찾을 순 없었다. 마치 어딘가에 붙잡혀 기운이 막혀 있는 것처럼.

그런 와중, 샐러딘의 힘이 미약하게나마 느껴졌다.

그 힘은 그가 있을 인간의 영역에서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죽음의 경계에서 그의 힘이 느껴졌다.

샐러딘은 지옥의 수장인 케르베로스와 합쳐진 실험체. 죽음의 기운을 얼마든지 다룰 수 있는 존재였다.

그가 죽음의 기운을 쓸 때에는 오직 하나.

‘봉인.’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자일은 곧장 이곳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쿨럭!”

자일은 희미한 생명을 꺼뜨리고 있는 안타레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봉인에서 풀리자마자 자일을 보며 반색했지만, 그에게 가슴을 꿰뚫리게 되자 웃지 못하게 되었다.

안타레스는 바닥을 벅벅 긁으며 마지막 힘을 쥐어짜 냈다.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어떻게, 라니.

그렇다면 어떻게,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는 아포칼리타다!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게 아니라 서로와 힘을 합쳐야 하는!”

그 힘을 합치기 위해, 너를 죽이는 것이 아니던가.

자일의 붉은 눈은 무정하다.

자일의 붉은 머리칼은 싸늘하다.

그는 안타레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공포에 질려 있는 안타레스의 눈이 보였지만, 연민 따위의 싸구려 감정은 자일이 갖지 않고 있는 것.

쿵!

짧은 폭음을 끝으로, 안타레스의 몸이 터졌다.

후두둑 피가 떨어졌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로써 모두 얻었다.’

자일은 안타레스의 살점 사이에 있는 마나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때였다.

휘이잉!

바람이 불어왔다. 하지만 이곳은 바람이 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자일은 빠르게 비상했다.

콰광!

그가 서 있던 지반이 와르르 무너졌다. 무너진 틈을 따라, 검은 기운이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했다. 새하얀 뼈가 우뚝 모습을 드러낸다.

이 힘은 분명.

“자일.”

지나치게 그리웠던 목소리.

지독하게 보고 싶었던 얼굴.

“오랜만이야.”

카리나.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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