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오랜만이야.”
카리나.
이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가슴 한가운데에 응어리가 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일은 제게 달려드는 언데드의 두개골을 꿰뚫으며 카리나를 응시했다.
“아버지처럼 리치가 된 것 같지는 않고.”
카리나는 개의치 않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되살아났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었어.”
[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녀의 목을 감싸고 있는 히론이 말을 덧붙였다.
카리나는 히론의 턱을 쓰다듬으며 자일을 내려다보았다.
자일의 모습은 일전과 변함이 없었다. 피를 탐하는 뱀파이어답게, 붉고 검은 얼룩이 몸 전체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달라진 점이라 해 봤자 끝이 검게 변한 머리카락 정도일까.
하지만 카리나는 생각했다.
“너는 정말…….”
죽음에서 되살아 온 자일은,
“괴물이네.”
세계의 흐름을 거스른 괴물이라고.
쿠웅!
카리나의 손끝이 움직이자, 언데드들이 몸을 일으켰다. 갈라진 땅을 기어서 올라오는 언데드의 수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쐐액!
그들은 자일을 향해 안광을 번뜩였다. 달그락거리는 뼈의 소리는 괴기하기만 하다.
이렇듯 언데드가 가득한 대지 한가운데에, 자일은 홀로 고고하게 서 있다.
“카리나.”
그의 머리카락이 우수수 흔들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붉은 눈은 섬뜩할 정도로 깊다. 살기가 지독한 눈.
카리나는 피식 웃었다.
“뭐가 늦지 않았다는 건지 모르겠네.”
그녀는 날개를 퍼덕이며 자일과의 거리를 좁혔다.
“일단, 네가 도망칠 시간은 늦었어.”
쿠구궁!
그녀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검은 힘이 대지를 휘감았다. 마치 융기를 하듯 치솟은 대지는 자일의 몸을 삼킬 것처럼 그에게 쏟아졌다.
촤아악!
자일은 빠르게 위로 솟구쳤다. 그 틈을 기다린 건 카리나였다.
“윽!”
자일은 카리나의 힘에 스친 어깨를 부여잡으며 공중제비를 돌았다.
“쥐새끼처럼 피하기는.”
쯧.
카리나는 그의 어깨를 벤 힘을 회수하며 혀를 찼다.
“정말 나와 싸울 생각인가?”
자일의 어깨를 따라 붉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것이리라. 카리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너와 싸울 생각으로 이곳에 왔지, 왜 왔겠니.”
“카리나.”
자일은 야트막한 숨을 내뱉었다.
“나는 널 죽이고 싶지 않다.”
“퍽이나.”
카리나는 비소했다.
“내 몸에 있는 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시고 싶어 하잖니. 내가 그걸 모를까.”
“그런다 한들 너는 죽지 않는다.”
“몸이 죽지 않는다고 해서 꼭 죽지 않는 걸까.”
이는 자일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아니, 그는 언제나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만들어졌으므로.
그래서 카리나는.
“난 정말 네가 싫어, 자일.”
자일이 죽도록 싫었다.
“이제 그만하자.”
카리나의 눈동자에 하얀 백태가 꼈다. 뱀의 것처럼 변한 눈은 쐐액 동공을 벌리며 곳곳에 힘을 방출했다.
촤악!
자일 역시 얌전히 당할 이가 아니었다.
그는 양팔을 벌렸다. 새빨간 힘이 그에게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푸드득!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수십, 수백. 아니, 수천 마리.
박쥐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 * *
“아오, 진짜!”
챙!
샐러딘은 제게 달려드는 박쥐의 날개를 자르며 악을 질렀다.
“이 새끼들은 왜 이렇게 커!”
말대로, 박쥐의 크기는 사람의 몸집만 했다. 독니를 제외하고는 강하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수가 워낙 많으니 처리하기가 배는 힘들었다.
“야, 넌 괜찮냐?”
샐러딘은 쉼 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 르네거를 향해 말했다.
이곳에 온 이후부터, 르네거가 조금 이상했기 때문이다.
말이 없고, 표정이 없다. 그저 베어 내기만 한다. 마치 홀린 사람처럼.
“야. 르네거!”
“……네?”
르네거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촤악! 박쥐의 날개를 잘라 버리는 것도 잊지 않고.
“너 괜찮냐고.”
“괜찮습니다.”
“아까부터 정신이 나가 있는 것 같은데.”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르네거는 짧게 대꾸한 후 다시 검을 바르쥐었다.
사실, 샐러딘의 말이 맞았다. 오롯이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이는 죽음의 강에 왔을 때부터 느껴진 답답함 때문이었다. 목구멍 끝까지 치밀어 오른 텁텁함. 심장이 죄이는 듯한 통증.
이는 과거 이곳에서 정신을 잃었을 때 느꼈던 감각들과 비슷했기에, 르네거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거기에 더불어,
『인간들은 대체 언제 이렇게 강해 진 것이냐?』
지팡이가 자신에게만 들리게 전음하기 시작했고,
『인간이 강한 것이 아니라 이놈이 강한 것이다. 물론 내가 키운 덕분이지!』
성검이 떠들기 시작했다.
『하기야, 다른 놈들은 별 볼 일 없어 보이긴 했다만. 한데 이 박쥐들도 대단하구나. 이런 것은 처음 봐.』
『그건 나 역시도 그렇다.』
『이런 건 잡아서 해부를 해 봐야 하는데.』
『네놈의 그 이상한 탐구력은 여전하구나.』
『하루아침에 변하면 그게 인간이지 어찌 성물이겠나! 하하!』
시끄럽다.
시끄러워.
르네거는 으득 어금니를 깨물었다.
“둘 다 좀 닥치십시오. 집중을 못 하겠지 않습니까.”
푹!
르네거는 박쥐의 목덜미에 검을 꽂으며 말했다.
『인간 주제에 성물에게 닥치라고 하다니. 말세다, 말세야. 신께서 들었다면 불경하다 경을 쳤을 텐데.』
『이놈은 이미 신을 배신한 놈이다. 이런 것쯤은 별일 아닐 테지.』
“알면 좀 다무십시오.”
『그래서.』
지팡이의 전음이다. 르네거의 품에 꽂혀 있는 지팡이는 초록빛을 짙게 뽐냈다.
『넌 어떠냐?』
“무슨 말입니까?”
『네 몸이 어떠냔 말이다. 지금쯤 뒈져야 하는 게 정상인데.』
지팡이는 빛을 뿜어 르네거의 몸 전체를 훑었다. 호오, 그는 흥미롭다는 듯 반짝이며 비음을 냈다.
『바다신이 너를 보호하고 있나 보구나.』
『쯧. 이런 놈이 뭐가 예쁘다고.』
성검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성검은 검은빛을 내보이며 달려드는 박쥐의 숨통을 끊었다.
『신의 보호를 받고 있다 한들 완전한 것은 아니다.』
『그래. 완전할 수 없지.』
신조차 완전하지 않거늘. 성검은 말을 삼켰다.
『이곳을 벗어나면 너는 죽을 것이다.』
『죽게 되겠지.』
『이미 죽음의 강에 다녀왔기 때문에 영혼도 타락했을 터.』
『신의 곁으로 갈 수 없을 테지.』
『그러니 우리를 지금 빼내 주면…….』
“좀.”
후우.
숨을 몰아쉬고 멈춰 선 르네거는 품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닥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팡이에 힘을 불어 넣는다. 지팡이의 끝이 파르르 떨렸다.
『아이고, 이놈이 날 죽인다! 인간 주제에 날 죽인다! 다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이거늘!』
“전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르네거는 지팡이를 당장 부러뜨릴 것처럼 손에 힘을 주었다.
“이미 죽었던 목숨입니다. 카리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진즉 죽어 사라졌겠지요.”
이 사실은, 한 번도 잊은 적 없다.
자신은 과거에 죽었다. 자일을 만나며.
그런 자신을 살려 낸 건 카리나였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구원해 줬을 뿐 아니라 존재 자체를 되살려 주었다.
“그러니 이런 것쯤은 얼마든지.”
울컥, 검은 피가 올라왔다. 퉤, 르네거는 피를 뱉으며 성검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버틸 수 있습니다.”
그는 달려드는 박쥐에게로 검을 휘둘렀다.
이 순간.
“꿰에엑!”
거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리나가 있는 곳이었다.
『위험하다.』
『위험해.』
『뭔가가 온다.』
르네거는 빠르게 튕겨 나갔다.
* * *
그 소리는 자일이 소환했던 거대 박쥐가 낸 비명이었다.
카리나는 히론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주며 피식 웃었다.
거대화를 마친 히론은, 커다란 몸집을 자랑하며 아가리를 크게 벌렸다.
[먹으면 맛없을 것 같다. 태워 버리는 게 좋을 것 같군.]
“네 말대로 할게.”
음성이 사라지기도 전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검붉은 불꽃은 쓰러져 있는 박쥐에게 옮겨붙어 그 시체를 활활 태웠다.
매캐한 연기가 퍼졌다.
그 연기 너머, 카리나는 자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자일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다리를 절고, 팔 한쪽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으며 쇄골이 꿰뚫려 목덜미에 금이 가 있었다.
그에 비해 카리나는 다친 곳이 없었다. 아니, 다쳤다 한들 모두 다 회복시켰다.
하지만 자일은 회복이 불가했다. 카리나의 힘에 죽음의 기운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샐러딘의 것일 텐데.
“너를 만나기 전에 내 힘을 좀 손 봤거든. 너는 한 번 죽은 목숨이니, 죽음의 기운이 독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
카리나는 이곳에 오기 전, 샐러딘에게 이어받았던 죽음의 기운을 떠 올렸다.
“내 생각이 맞았네.”
카리나는 생긋 웃으며 자일에게로 손을 뻗었다. 자일은 빠르게 쉴드를 쳤다. 거리를 벌린다.
“너는.”
쿨럭, 자일은 피를 뱉으며 눈을 들어 올렸다.
“왜 아포칼리타를 경멸하는가?”
“…….”
“왜 너의 출신을 혐오하는가?”
수없이 들어 왔던 질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명확히 답을 내려 줄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전생부터 꺼내 와 이야기를 해야 할 테니까.
더군다나 자일에게는, 자일에게만큼은 그 무엇도 이야기해 주고 싶지 않았다.
카리나는 그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러는 나도 네게 묻고 싶네.”
그녀는 자일의 잇새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피를 응시하며 말했다.
“넌 내게 왜 이러니?”
왜, 라는 말에는 수십 개의 뜻이 담겨 있으리라.
왜 나를 쫓아다니는 것인지, 왜 나를 붙잡아 두지 못해 안달인 것인지, 왜 나를 끝까지 붙들려는 것인지. 왜, 왜.
결론은 하나였다.
“나를 좋아하니?”
자일의 눈이 커졌다. 그는 마치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것처럼 그대로 굳어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하지만 자일의 말은 끝마쳐지지 못했다.
번쩍!
쾅!
그의 앞으로 번개가 내리꽂혔기 때문이다.
“카리나!”
곧이어 달려온 르네거가 카리나의 몸을 감싸 안았다.
콰과광!
수십 개의 번개가 그들에게로 내리꽂혔다. 르네거가 쉴드를 친 덕분에 카리나와 히론은 무사할 수 있었지만,
“결국 이렇게 됐네.”
상황은 좋은 쪽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카오스. 그가 나타났으므로.
쿠웅!
대지가 뒤흔들렸다.
흔들림의 끝, 그곳에는 검은 망토를 펄럭이고 있는 카오스가 서 있다.
히론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카오스를 뚫어져라 주시한다.
-카오스는 반드시 죽어야 돼.
레피오스의 말을 떠올린다. 히론의 검은 눈이 싸늘하게 번뜩였다.
[이번에는 내가 가겠다.]
히론은 더욱더 몸을 키웠다.
쿠구궁!
그가 딛고 있던 지반이 무너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