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카오스는 반드시 죽어야 돼.
레피오스는 그리 말했다.
그의 예지는 정확했으나, 모든 것을 명확하게 보여 주진 않는다.
그렇기에 카오스가 언제 어떻게 죽는지는 예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자명했다.
-그가 죽을 때에…….
히론은 뒷말을 떠올리지 않았다.
아가리를 크게 벌리며 노후한다. 그의 몸집이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히론.”
카리나의 말이다. 그녀는 히론의 날 선 비늘에 손을 올렸다.
“너 혼자 아버지를 상대할 수는 없어.”
[내가 무어라 말했느냐.]
히론은 단호히 대꾸했다.
[리치 새끼는 내가 반드시 죽인다고 하지 않았더냐.]
“하지만…….”
[지금의 싸움은 나와 카오스와의 케케묵은 앙금을 풀기에 적당할 터.]
그는 어느새 사람보다도 커진 머리통을 들어 올리며 혀를 날름거렸다.
[그리고 너희는 자일 놈을 상대해야지 않겠느냐.]
말대로, 자일은 카오스의 힘을 전달받아 완전히 회복한 상태였다. 더불어 기세가 남달라졌다. 풍겨지는 기운이 괴기하기 짝이 없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아가.]
카리나를 핥아 주는 손길이 지나치게 다정했다. 또한 따뜻했다. 그렇기에 카리나는 묘한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다치지 마.”
히론은 대답 대신 웃어 주었다. 결계를 유지하고 있는 르네거를 쳐다본다.
[카리나를 지켜라.]
르네거는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
반쯤 벌려진 입술 너머, 할 말이 담겨 있는 듯하였으나 그는 차마 뱉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히론은 만족스럽다는 듯 낮게 웃은 후, 곧장 결계를 뛰쳐나갔다.
쿠구궁!
바깥은 카오스가 만들어 낸 번개로 부글부글 들끓고 있었다.
강물이 범람한다. 땅이 불타오른다. 하늘이 시꺼멓다. 바람이 매섭다.
히론은 거친 대지를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목적지는 오직 한 곳, 카오스가 있는 바로 그곳.
카오스 역시 히론의 기색을 느낀 것일까. 번개가 차츰 잦아들었다. 히론이 가는 길마다 작은 불꽃이 하나 둘씩 피어올랐다.
그리고 둔덕 끝에 다다랐을 때쯤.
“오랜만이군.”
카오스의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마치 망자의 것처럼 어둡고 퀴퀴한 음성이다.
[딱히 반갑지는 않구나.]
히론은 쯧 혀를 찼다. 그의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나를 혼자 상대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지금의 너는 과거의 너와 다를 텐데 말이다.”
카오스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 멀리, 자일의 힘과 카리나의 힘이 맞부딪히는 게 보였다.
[하기야. 과거의 나였다면 네놈 따위 한 입 거리도 안 되었을 테니.]
히론은 그런 카오스를 향해 빈정거렸다.
[지금은 두 입 거리 정도는 되겠구나.]
“예나 지금이나 입만 살았군.”
[뱀은 원래 말을 잘하지.]
그는 비죽 웃으며 몸통을 세웠다.
금세라도 카오스를 잡아먹을 것처럼 부푼 몸뚱이는 위협적이다 못해 괴기했다.
[카오스.]
히론의 검은 눈이 카오스의 전신을 향했다.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카오스의 얼굴이 빳빳하게 굳었다.
마치 역린이 건드려진 양, 그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너는 아무것도 보지 못해서 그리 말하는 것이다.”
눈에 핏발이 섰다. 충혈된 흰자는 홧홧한 열기를 드러냈다.
“우리의 종말을 네 두 눈으로 보지 못했기에 그리 고고한 척을 하는 것이란 말이다!”
쿠웅!
카오스가 딛고 있던 지반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는 순식간에 히론의 앞으로 날아왔다.
“네 동료의 죽음을 보았느냐? 네 친구의 죽음을 보았느냐? 네 연인의 죽음을 보았느냐? 어제까지 함께하였던 신들이 나의 동료를, 친구를, 연인을 죽이는 것을 보았느냐?”
카오스의 목소리에도 핏발이 섰다.
그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가며 으득 이를 갈았다.
“그들은 웃고 있었다. 우리를 죽이며 웃고 있었어!”
마물의 옷을 벗은, 스스로 리치가 된 그의 몸은 과거와 같지 않았다. 마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용서할 수 없다.”
후우.
히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카오스의 흥분한 얼굴을 직시하며 입을 벌렸다.
[나도 보았다.]
히론은 느리게 말을 이었다.
[내 딸 아이가 죽는 것을.]
아주 오래전, 그러나 바로 어제처럼 느껴지는 일. 전쟁의 신에게 죽임을 당한 나의 불쌍한 딸아이.
히론은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용서하지 않았느냐.]
“용서?”
카오스는 보란 듯이 웃었다.
“넌 약해 빠진 놈이기 때문에 감히 복수할 생각을 하지 못한 게지. 나는 다르다. 나는 너와 달라!”
콰광!
번개가 내리꽂혔다.
메마른 대지는 번개의 불을 견디지 못하고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방해할 것인가?”
[그렇다면?]
“널 가만히 둘 수 없지.”
히론은 비스듬하게 웃었다. 그의 입에 거무스름한 어둠이 맺히기 시작했다.
[바라던 바다.]
* * *
“아버지가 나타나서 살 만해졌나 봐.”
챙!
카리나는 자일의 기나긴 손톱을 쳐 내며 말했다.
“주인이 힘을 주면 살아나는 괴물이라니……. 어쩌면 너도 언데드가 아닐까?”
쐐액!
카리나가 소환한 언데드가 박쥐의 몸통을 길게 갈랐다.
“카리나.”
자일은 그런 카리나를 내려다보며 비소했다.
“말이 많군.”
챙!
자일의 피가 묻은 손톱이 카리나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저 피가 닿는다면 살이 녹아 버리리라. 카리나는 뒤로 물러서며 그와 거리를 벌렸다.
“네가 전투 중에 말이 많을 때는 한 가지 경우밖에 없지.”
자일은 손에 묻은 피를 할짝이며 눈을 들어 올렸다.
“힘에 부치고 있을 때.”
순식간에 그는 달려들었다. 챙, 챙! 카리나와 거리를 좁히며 그녀의 빈 틈을 노린다.
자일의 말이 맞았다.
아까 전, 무리하게 힘을 쓴 때문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리 3차 각성을 했다 한들 힘은 무한대가 아닌 터.
카리나는 이를 꽉 깨물며 간신히 버텨 냈다.
휘익!
자일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를 스쳤다.
잡힌다. 카리나는 몸에 바싹 힘을 주며 힘을 방출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 틈을 노린 이가 있었다. 르네거였다.
“윽!”
자일은 깊게 베인 옆구리를 감싸며 몸을 한 바퀴 굴렸다.
르네거는 아쉽다는 표정을 하며 검을 횡으로 그었다.
“당신의 상대는 나입니다.”
르네거는 검 끝으로 그를 겨누며 말했다.
그 어떤 표정도 담겨 있지 않은 그의 얼굴은 무정하기 그지없다.
그렇기에 잔인해 보였다. 마치, 동정도 연민도 없는 아포칼리타처럼.
“르네거.”
카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불렀다. 르네거의 푸른 눈이 점점이 그녀를 향했다.
“다치진 않았습니까?”
“그러진 않았어.”
“다행이네요.”
그는 생긋 웃었다.
그 웃음은 과거의 것과 변함이 없었으나 어딘가 이상했다. 마치 결이 다른 웃음처럼 보였다.
왜일까. 왜지.
카리나는 묘한 불안함을 떨칠 수 없었다.
모든 것들이 자신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르네거, 라 하였나.”
어느새 회복한 자일의 말이다. 그는 두 날개를 활짝 펴며 허공에 몸을 띄웠다.
“네 덕분에 새 몸을 입고 태어날 수 있었지.”
그의 입술이 반쯤 비틀렸다.
“하지만 감히 내게 덤벼든 대가를 치러야 할 터.”
쉬익!
불식간에 다가온 그는 르네거의 어깨를 노리며 손을 휘둘렀다.
르네거는 빠르게 옆으로 몸을 구르며 검을 바르쥐었다.
기실, 그도 진즉 힘에 부친 상태였다.
이곳, 죽음의 강에 오면서부터 심장이 쉐뜯기는 것처럼 아파 왔기 때문이다.
통증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마당에 전투를 이어 나가고 있으니 그의 몸이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두 다리를 세우며 자일과 마주 선다.
반드시.
‘죽인다.’
르네거의 눈이 번뜩였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자일이 재차 달려들었다.
콰광!
힘과 힘이 맞닿으니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에서 비롯된 바람이 대지를 휘감았다.
자일은 여유로운 얼굴로 대치하고 있는 르네거를 바라보았다. 르네거는 하얘진 입술을 짓씹으며 그를 직시했다.
방금의 폭발로 상처를 입은 건 르네거뿐이다.
자일의 피가 스친 그의 살은 검게 썩고 있었다.
정신이 흐려졌다. 르네거는 이를 꽉 깨물며 간신히 버텼다.
“인간 주제에.”
자일은 뒷말을 하지 않았다. 인간 주제에, 그 뒤에 나올 말이라 해 봤자 뻔했기 때문이다.
자일은 이 인간이 싫었다. 본래부터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 그였으나 특히나 더 이자가 싫었다.
이는 인간 주제에 카리나의 곁에 있기 때문, 이었고 인간 주제에 카리나의 사랑을 탐내고 있기 때문, 이었다.
카리나의 곁에는 내가 있어야 했다. 그녀의 마음을 탐하는 건 내가 되어야 했다. 그녀의 태고부터 탄생까지 지켜봐 온, 나여야만 한단 말이다.
-나를 좋아하니?
그래. 그 말이 맞았다. 나는 카리나를 좋아한다. 그녀를 사랑한다. 그렇기에,
“살려 둘 수 없다.”
눈앞의 이 남자를 죽여야만 했다.
자일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기기긱, 르네거의 몸이 뒤로 밀렸다.
“르네거!”
카리나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듣자마자 자일은 나머지 한 손을 휘둘러 자신과 르네거만을 가둘 수 있는 결계를 만들었다.
쾅! 쾅!
카리나가 결계를 향해 힘을 방출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깨뜨리지 못할 것이다. 설사 깨뜨릴 수 있다 한들, 그때에는 이 인간 놈이 죽은 후일 터.
“신의 전쟁에 함부로 끼어든 대가다.”
자일은 마지막 일격이라는 듯 눈을 번뜩였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피를 탐하며 번들거렸다. 그의 송곳니가 기다랗게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
자일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깊게 파인 상처가 보였다. 후두둑 떨어지는 핏줄기가 보였다.
“허억, 헉…….”
르네거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까득 어금니를 깨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르네거조차 알 수 없었다.
갑자기 푸른빛이 심장에서 돌더니, 손이 제멋대로 움직였으니까.
“어떻게…….”
자일은 쿨럭 검은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가슴만 베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슴에 박아 두었던 마나핵 세 개가 동시에 파괴되었다. 힘이 빠져나가는 감각을 차마 감당할 수가 없었다.
“르네거!”
결계가 흐려진 덕분, 카리나가 뛰어왔다. 그녀는 르네거의 문드러진 살에 재빨리 손을 올렸다.
“너는 대체.”
카리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더 할 말이 많았으나 지금 할 수는 없는 것. 그녀는 빠르게 르네거를 치료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르네거는 그런 카리나의 손을 잡아 내리며 말했다.
“당신이 하겠습니까?”
그의 시선은 자일에게 닿아 있다. 말뜻은 자일의 끝을 카리나에게 넘긴다는 게 분명했다.
카리나는 다소 떨리는 눈으로 르네거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곧, 고개를 끄덕였다. 자일을 내려다본다.
오만한 기색을 보였던 게 언제냐는 듯, 자일은 꿀렁꿀렁 피를 토하며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이는 마나핵이 폭파됐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르네거의 힘에, 자신도 모르는 더러운 감각이 끼어 있기 때문이다.
‘이건 분명.’
자일은 생각했다. 그리고 판단했다. 아버지에게 말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지금은 쉬이 움직일 수 없었다. 움직일 힘도 없었을뿐더러,
“형제들의 마나핵을 모두 집어넣었으면 그걸 다 찾아서 폭파하는 것도 일일 테지.”
카리나가 자신을 보내 주지 않을 테니까.
카리나는 전에 없이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 몸을 가루로 만드는 게 좋겠어.”
그녀는 손을 뻗었다.
우웅, 하는 진동과 함께 그녀의 손에 검은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손톱만큼 모였던 빛은 점점 두꺼워져 주먹만큼, 몸통만큼, 그보다 더 커져 자일을 집어삼킬 것처럼 그 위세를 자랑했다.
그 힘을 자일의 머리 꼭대기에 내리꽂으려 하는, 그 순간이었다.
[조심……!]
익숙한 소리.
카리나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녀의 눈앞이 새하얘졌다.
번쩍!
빛이 그녀의 눈을 잠식하는 순간, 카리나는 직감했다. 이 번개가 자신에게 꽂힌다는 걸.
쾅!
카리나는 눈을 질끈 감아 내렸다. 온몸이 불타는 고통이 느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하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카리나는 천천히 눈을 올려 떴다. 그리고,
[커헉!]
제 몸을 가로막고 있는, 히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번개에 맞아 새까맣게 변해 버린 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