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히론이 죽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는 카리나의 울부짖음 때문이 아니다. 느낄 수 있었다. 히론이 죽었다.
르네거 역시도, 울고 싶었다. 펑펑 울며 이래서는 안 된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히론이 나타나 카리나를 보호한 순간에 자리를 뜬 그였다.
그래서 히론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과거의 히론과 약속했던 것.
-내가 만약, 카오스를 죽이지 못하고 돌아온다면.
-네가…… 반드시.
르네거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검을 바르쥐며 검 끝을 겨누었다. 주저앉아 있는, 카오스에게로.
“하, 하하…….”
널브러진 채 앉아 있는 카오스는 허탈한 웃음만을 내리 흘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한쪽 다리는 히론이 뜯어 먹었고, 다른 쪽 다리는 르네거가 잘라 버렸으니까.
휘익! 르네거는 검을 횡으로 그으며 검날에 묻은 검은 피를 흩뿌렸다.
“당신은 도망칠 수 없습니다.”
카오스의 텅 비어 있는 눈이 르네거에게로 향했다. 그는 낄낄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네가 그 바다신의 아들이로구나.”
감히 주제도 모르고 카리나의 곁에 붙어 있는 인간. 자일을 죽였던 인간.
그렇게만 생각했었는데.
르네거의 얼굴을 살피던 카오스의 눈이 빳빳하게 굳었다.
“아니지, 네게는 바다신의 힘이 있구나. 그래, 이렇게 보니 너는 그였어. 그 가증스러운 자식이, 그 더럽고 치졸한 자식이!”
그는 한쪽만 남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끼이익거리는 관절 소리가 기이하게 퍼졌다.
“전에도 우리를 외면하더니, 이제는 우리를 죽이려 하는구나. 괘씸한 자식 같으니라고!”
그는 대체 무엇을 투영하여 보는 것인가. 르네거는 묵묵히 그를 응시했다.
“나를 죽여 없앨 셈이냐?”
카오스는 얼굴을 괴기하게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나는 카리나의 아비인데?”
우뚝. 르네거의 손이 그대로 굳었다.
“히론까지 잃고 아비까지 잃는다면, 카리나가 슬퍼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느냐?”
카오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잘 생각해 보아라. 내가 죽는다면 카리나가 어떤 마음일지.”
그의 눈이 희번덕이며 달아올랐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틈을 보인다면 그때를 이용해 달아날 수 있으리라.
그리 생각한 카오스의 손이 달싹였다. 검은빛이 그의 손끝에 모였다.
하지만.
“미친. 뭐 하는 거야.”
콰광!
거대한 힘이 카오스의 머리를 휘갈겼다.
“쿨럭!”
아무 방비도 하지 못한 카오스는 그대로 쓰러졌다. 바닥에 처박힌 얼굴을 간신히 들어 올린다.
“샐러……딘. 네가 감히……!”
“헛소리는 무시해야지, 뭘 듣고 앉아 있어?”
나타난 건 샐러딘이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분노를 내비치고 있는 카오스를 가뿐히 무시하며 르네거에게로 다가갔다.
살펴보니 르네거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나빠 보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저 몸으로 버틴단 말이지.’
미친놈 같으니라고. 샐러딘은 질렸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야. 저 헛소리를 믿는 건 아니지?”
르네거는 고개를 저었다.
“전 그렇게 멍청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는 검 끝의 과녁을 조정했다. 쓰러져 있는 카오스를 향한다.
“어떻게 죽여야, 더 고통스러울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끄아악!”
피융!
검 끝에서 튀어나온 힘이 카오스의 가슴을 관통했다.
“쉽게 죽이고 싶진 않으니까요.”
카오스는 반쯤 날아가 버린 제 몸통을 내려다보며 아드득 이를 갈았다. 분하다. 분해. 분해서 미칠 것만 같다!
그의 몸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잘려나간 팔과 다리와 뚫린 몸통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감히 하찮은 인간 주제에 나를 능멸하느냐!”
마치 화살처럼 날카로워진 검은 기운은 순식간에 르네거를 향해 날아왔다.
샐러딘이 막으려 했으나 찰나가 부족했다.
르네거가 당하리라.
그는 지금 이 힘을 피할 만큼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촤악!
르네거는 가볍게 검을 들어 카오스의 힘을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곧장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카오스의 목을 내리 찌른다.
“컥!”
목을 꿰뚫린 카오스는 가슴팍을 꿀렁거리며 몸을 들썩였다.
“허억, 헉…….”
르네거는 가파른 숨을 내뱉었다.
또다.
또 멋대로 몸이 움직였다.
마치 나의 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들.
르네거는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야, 힘이 남아 있었나 보네. 잘했다.”
다가온 샐러딘이 르네거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곤 카오스를 내려다본다. 싸늘하기 그지없는 시선이다.
“그러니까, 아버지. 그냥 처음 죽었을 때 곱게 죽지 그랬어. 왜 다시 살아나서 이렇게 더러운 꼴을 봐.”
“너, 이 개자……!”
“욕해, 욕해. 어차피 뒈질 테니까.”
샐러딘은 카오스의 어깨를 발로 짓누르며 비죽였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긴다. 그리고 저 먼 하늘을 가리킨다.
“저기 봐. 자일이 있지? 그런데 구하러 안 오잖아.”
카오스는 그가 가리킨 곳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정말 자일이 있었다. 날개를 활짝 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자일이.
눈이 마주친 순간.
자일은 곧장 사라졌다. 저 먼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
“자식새끼 잘못 키웠네. 나나 저 새끼나.”
피식. 샐러딘은 조소했다.
마치 세상을 잃은 것과 같은 좌절을 내보이고 있는 카오스를 애써 무시한다.
“따라갈까요?”
르네거의 말이다. 샐러딘은 눈살을 찌푸렸다.
“너 혼자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지금도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그는 차마 뱉지 못한 말을 삼켰다.
“아버지.”
샐러딘은 카오스를 짓밟은 발에 더욱 힘을 주었다. 카오스는 발광했으나, 뿌리칠 만큼의 힘은 없었다.
“이렇게 될 거, 알고 있었잖아.”
그는 한쪽 손에 힘을 머금었다. 빛나는 구체가 그의 손을 잠식했다.
“어차피 우리는 세계의 악이야.”
“이거 놓……!”
“모든 이야기에서, 악은 언제나 죽어.”
그리 말을 하는 샐러딘의 얼굴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씁쓸함이 가득한 미소가 그의 입술을 더듬었다.
“우리도 다를 바 없겠지.”
샐러딘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다를 바 없는 악인.
어차피, 죽게 될 악인.
그러니 나를 탄생시켜 준 아비를 죽이는 것 따위는, 할 수 있으리라. 할 수 있어야 했다.
그가 머금은 힘이 카오스에게 향하려던 그때였다.
푸욱!
르네거의 검이 먼저였다. 그는 카오스의 두개골 정중앙에 검을 꽂았다.
아드득,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파스슥 카오스의 몸이 갈라졌다.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죽은 것이었다.
이렇듯, 허무하게.
“……야.”
샐러딘은 애써 피워 냈던 힘을 사그라뜨리며 주먹을 바르쥐었다.
“왜 또 네가 죽이냐?”
르네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샐러딘은 알고 있을까.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아니, 모를 것이다. 알고 있다면 이리 말을 하지 않았을 테니.
르네거는 검을 거두며 허리를 세웠다.
“이번에도 화를 내실 겁니까?”
후우. 샐러딘은 숨을 크게 내뱉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한다. 마치 무언가를 참으려는 것처럼, 아니면 무언가를 내뱉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뭐가 됐든.
“잘했다.”
이리 말을 하면 된 것이리라. 이걸로 된 것이리라.
르네거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카오스의 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저 먼 쪽, 그러니까 카리나가 있을 곳을 바라본다. 샐러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카리나는.”
“카리나는…….”
잠시 눈을 크게 떴던 르네거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샐러딘에게 말을 하라는 뜻이었다.
후우, 샐러딘은 한숨을 내뱉었다.
입가에 맺힌 피를 손등으로 닦으며, 그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카리나는 네가 부축해. 지금의 난 못 하니까.”
왜, 라고는 차마 물을 수 없었기에.
르네거는 천천히 걸음을 떼어 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도 히론을 찾으며 울부짖고 있는 카리나를 향하여.
* * *
“…….”
레피오스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올려 떴다.
‘히론.’
그는 왈칵 올라오려는 감정을 겨우 추슬렀다. 치미는 슬픔을 억지로 붙잡으며 고개를 떨어뜨린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한 일이다.’
이미 알고 있던 일이었다. 막을 수조차 없었던 일.
미래는 언제나 이런 식이다. 항상 정해져 있으며, 결코 바뀌지 않는다.
그렇기에 레피오스는 때때로 이렇게 무력감에 휘감길 수밖에 없었다.
‘카리나를…….’
그녀를 만나야 했다.
지금, 아니. 히론의 부재에 대한 슬픔이 가실 때 즈음. 아니, 그때가 과연 오기나 할까. 그러니 정리가 되었을 때 즈음, 그녀를 만나야 했다. 만나 해 줄 말이 있었다.
그는 앉혔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저 멀리, 요동치고 있는 게이트가 보였다.
카리나와 그 일행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리라.
그를 보며 지나치려 했던 레피오스였다. 하지만 한 인간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저자는 분명…… 데이펜의 수장일 텐데.”
그녀가 왜 이곳에?
분명 카리나에게 크게 당한 이가 아니었나.
혹 복수를 결심하고 온 것이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
레피오스는 떠나려던 발걸음을 돌리고 두 눈을 부릅떠 힘을 주었다.
혹여 저 인간이 그릇된 행동을 하려 한다면 자신이 막아야 했으므로.
하지만 페넬로피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카리나와의 전투에서 다친 몸이 회복되었을 때쯤, 페넬로피는 그녀를 만나고 싶어 했다.
만나서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답을 들어야 하는 게 있었다.
그러나 카리나는 이미 죽음의 땅으로 건너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곳에 가, 다른 아포칼리타와 싸우고 있노라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
왜 인간들을 데리고 가지 않았느냐, 하니 죽음의 땅에 가면 죽을 것이 자명한데 그들을 데리고 갈 수 없다 하였더라.
그 말을 들은 순간, 페넬로피는 웃었다. 기가 차 웃음이 나왔다.
자신들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그녀처럼 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렇게 하지 못했을 테다. 어차피 죽음은 숭고한 것, 그리 생각하며 모든 인간들과 함께했겠지.
이리 생각하니 마치 자신들이 악이 된 것만 같았다. 악, 악한 것, 정의할 수 없는 악.
페넬로피는 그 즉시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카리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며 그녀는 아무 걱정이 없었다. 카리나의 힘을 목도한 바, 그녀가 패배할 것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이트가 열립니다.”
피에톤의 말과 동시에게이트에 검은빛이 돌았다.
울퉁불퉁 움직이는 표면을 따라, 불쑥 하얀 손이 나타났다. 샐러딘 아포칼리타였다.
“뭐야, 환영식이냐?”
그는 피식 웃으며 앞서 걸어갔다.
그의 뒤를 이어 르네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뒤에, 카리나가 나타났다.
그게 끝이었다.
게이트는 모두를 토해 냈다는 듯, 점점 작아졌다.
피에톤과 피에라, 그리고 페넬로피는 카리나를 살폈다. 그녀의 목과 팔과 몸과 다리를 바라본다. 그 어디에도, ‘그’의 흔적은 없었다.
설마.
서로 눈이 마주쳤다.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연민이 섞인 시선이 뒤엉켰다.
“……카리나.”
그런 그들의 침묵을 깨뜨린 건 페넬로피였다.
카리나에게 다가간 페넬로피는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나와 얘기 좀…….”
쾅!
페넬로피의 몸이 그대로 튕겨져 나갔다. 커헉! 페넬로피는 피를 토하며 몸을 웅크렸다.
우웅, 카리나의 주변 공기가 요동쳤다. 땅이 진동했다. 몸이 절로 들썩였다.
카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쏟아져 있는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눈이 보였다. 뱀처럼 갈라진 눈은 독을 뿜는 것처럼 날카로이 번뜩였다.
“내 앞에서 한마디만 더 한다면.”
그 기세가 일전과 달랐다.
싸늘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녀의 눈에는, 틀림없는 살기가 담겨 있었다.
“그게 누구든 죽일 거야. 그러니까.”
그런데 왜.
왜 이렇게도,
“내게 오지 마.”
슬퍼 보이는 것인지.
모두가 이유를 짐작하나 차마 말하지 못했다.
말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