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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125화 (125/135)

125화

터벅터벅.

샐러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카리나의 뒤를 얌전히 따라갔다. 기실 그뿐만이 아니라 그곳의 모든 이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카리나의 경고 때문이 아니다. 그 경고에서 비롯됐던 슬픔 때문이다.

모두가 히론을 안다. 모두가 히론과 카리나가 얼마나 가까웠는지 안다. 그리고 모두가, 히론이 죽은 것을 안다.

그래서, 아무도 말을 할 수 없었다. 감히 하지 못했다.

샐러딘은 앞서 걸어가는 카리나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원래라면 그녀의 목에 매달려 있었을 히론이다. 그러며 자신을 향해,

-[쯧, 멍청한 개새끼 같으니라고.]

……와 같은 말을 던졌겠지.

기억나는 게 고작 욕밖에 없다는 게 웃기기도 하면서, 그 말이라도 듣고 싶어졌다.

자신조차 벌써 이렇게 그가 그리운데, 카리나는 어떠할까. 감히 짐작도 되지 않는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탁.

그녀는 방 문 앞에 당도했다. 문고리를 잡는 순간, 샐러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나.”

카리나의 움직임이 멈췄다.

하지만 고개를 돌린다든가, 샐러딘을 쳐다본다든가 하는 행동은 없었다. 그저 쥐 죽은 듯 가만히 멈춰 있을 뿐.

샐러딘은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아버지는 죽었어.”

동요하지 않는다. 그녀는 문고리를 돌렸다.

“르네거가 죽였어.”

우뚝.

손이 멈췄다. 카리나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샐러딘을 바라본다.

“네가.”

“…….”

“죽이지 못했니?”

샐러딘은 숨을 들이켰다. 어떤 의도에서 묻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과거, 자신 역시 카리나에게 이와 같은 질문을 했었으니까.

샐러딘은 반발하듯 손을 바르쥐었다.

“할 수 있었어.”

그렇지만 카리나를 똑바로 바라보지는 못한다. 시선을 빗겨 내던지며 간신히 입을 떼어 낸다.

“시간이 조금 필요했을 뿐이야.”

카리나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르네거에게 빚을 졌구나.”

그 말에, 샐러딘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다시금 카리나와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차마 입을 떼어 내지 못한다.

카리나의 눈 속에 담겨 있는 것들은 자신이 감히 짐작하기 어려운 감정들이었으므로.

슬픔, 분노. 아니, 그보다는 더 깊은 것들이다.

대체 어떤 슬픔을 느끼고 있는 것인가. 어떤 분노를 느끼고 있는 것인가. 그로부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알 수가 없었다.

샐러딘은 이를 꽉 깨물었다.

“이제 자일 놈만 죽이면 돼. 그럼 모든 게 다 끝나니까.”

“그래. 그렇겠지.”

카리나는 자조적인 중얼거림을 뱉었다.

“하지만 이제 와 그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게 무슨 말이야?”

카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문고리를 돌릴 뿐.

그녀는 무의식중에 목을 더듬었다. 텅 비어 있는 자리가 그녀를 반겼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녀는 씁쓸한 조소를 토해 냈다.

“이제 와, 무슨 소용이 있겠니.”

정말 이제 와서.

카리나는 방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 * *

샐러딘은 닫힌 방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카리나의 말을 곱씹어 생각해 본다. 하지만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이젠 그만하겠다는 뜻일까. 아니, 그러기엔 달려온 길이 너무도 길지 않은가.

“아, 진짜.”

샐러딘은 머리를 헝클었다. 르네거를 만나 이야기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아씨, 깜짝이야. 뭐야?”

언제 온 것인지, 그의 뒤에는 피에톤과 페넬로피가 서 있었다.

샐러딘은 움찔거렸던 어깨를 내리며 인상을 구겼다.

“뭔데?”

“어떻게 된 일인가?”

피에톤의 말이다. 샐러딘은 더욱 미간을 좁혔다.

“보면 알잖아. 뭘 물어봐?”

“정말 그 뱀이 죽은 거야?”

끼어든 건 페넬로피였다. 샐러딘은 왈칵 올라온 성을 입안 가득 머금었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분노를 흩뜨렸다.

“그래. 그리고 아버지도 죽었고.”

그는 쯧,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이제 끝나 간다는 이야기야. 자일밖에 안 남았으니까. 이제 그놈이 죽으면 너희 인간들은 살기 편해질 거다.”

피에톤과 페넬로피가 서로 눈을 마주치는 게 보였다.

저들끼리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다지 궁금하진 않았다. 그래서 샐러딘은 자리를 떠나려 했다.

“왜.”

그런 그를 붙든 건 페넬로피의 목소리였다.

항상 날 서 있던 기색은 어디로 간 것인지, 그녀는 마치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처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야 흥미가 이는 듯, 샐러딘은 팔짱을 끼며 그녀를 응시했다.

“너희는 왜 그러는 거야?”

페넬로피는 뜨거워지려는 눈가에 바싹 힘을 주었다.

“너희에게 득 되는 게 없잖아. 아포칼리타를 죽이건, 죽이지 않건 너희는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을 텐데.”

“…….”

“대체 왜?”

정말, 궁금했다.

이 아포칼리타들이 대체 왜 다른 아포칼리타들과 대적하고 있는지.

과거에는, 그들이 새로운 세력을 잡기 위해 그러는 줄 알았다.

다른 아포칼리타들이 모두 죽고 나면 카리나가 제일 위에 서서 군림하지 않을까, 그런 합리적 의심을 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켜본 결과 그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런 목적이 있었다면 카리나는 3대 가문의 수장을 제일 먼저 죽였을 테니까.

아직까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피해를 입으면서도 끊임없이 싸움을 이어 가는 게…….

그들에게 돌아가는 이득이 무엇 있다고.

페넬로피는 입술을 짓씹었다.

“나도 몰라.”

샐러딘은 눈썹을 슥 올리며 말했다.

“나는 그냥 카리나가 그러고 싶어 하니까 그러는 것뿐이야.”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그러는 너희 인간들도 신이 시켜 아포칼리타와 싸우던 거 아니냐?”

그는 굳은 페넬로피의 얼굴을 보며 픽 웃었다.

“똑같은 거야, 똑같은 거. 너희 같은 인간이나 우리나 똑같다는 거지.”

페넬로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생각에 빠진 듯 가만히 침묵할 뿐.

샐러딘은 말을 덧붙였다.

“정 궁금하면, 카리나에게 물어봐라. 물론 넌 묻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건 알아 두고.”

피식.

피에톤의 바람 빠진 소리가 들렸다. 페넬로피 역시 비슷한 실소를 희미하게 뱉었다.

이제야 몸에 서렸던 긴장감이 풀어 지는 느낌이 들었다.

“…….”

그러니, 말을 해야 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고마워.”

샐러딘은 멍하니 페넬로피를 바라보았다. 꿈뻑, 꿈뻑. 눈을 느리게 깜빡여 본다.

“살다 살다 인간에게 고맙다는 말도 듣네.”

그는 멋쩍은 웃음을 뱉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그러곤 피에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야, 넌 나한테 안 고맙냐?”

피에톤은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샐러딘을 흘겨보았다.

“죽어 왔으면 더 고마웠을 텐데 말이다.”

“지랄. 내가 죽었으면 넌 슬퍼서 엉엉 울었을걸.”

“기뻐서 울었겠지.”

“이 봐라. 내가 게이트에서 나오자 마자 기뻐했던 게 누군데.”

윽.

피에톤은 침음을 삼켰다.

그 당시에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걸 봤던 모양이다. 피에톤은 흥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다음번은 그러지 않을 거다.”

“뭐, 나도 다음에 살아 돌아올 자신은 없으니까.”

샐러딘은 킬킬 웃으며 그의 어깨를 잡았던 손을 떼어 냈다.

“그건 그렇고, 르네거는?”

아. 페넬로피는 짧게 신음하며 턱을 들었다.

“피에라 님이 치료하고 계셔.”

그녀는 깍지를 낀 손을 더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많이 안 좋은가 봐.”

* * *

아프다.

르네거는 몸을 잠식하는 고통을 느끼며 손발을 비틀었다.

피에라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의 귓전을 채우는 건 빌어먹을 성물들이 떠드는 소리였으니까.

『곧 죽겠군.』

『죽음의 강에서 죽었어도 당연하다 할 수 있을 정도의 몸 상태였다.』

『쯧쯧. 불쌍한 놈 같으니라고.』

그들은 자신의 죽음을 마치 하나의 유희처럼 즐기고 있었다.

으드득.

이가 갈렸다.

죽지 않는다. 죽을 수 없었다.

이는 삶에 대한 애착 때문이 아니다.

자신이 죽은 후에 카리나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좌절적인 현실에서 자신마저 죽어 버리면, 카리나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홀로 남겨져 있는 상황을 감히 그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애쓰지 마라. 어차피 네놈은 죽을 테니까.』

『힘들게 죽느냐 편하게 죽느냐의 차이지.』

성들의 말을 무시한다. 그는 흐려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들었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피에라의 손이 분주해졌다.

그녀가 내뿜는 치료 마법이 한층 더 강해졌다. 이는 르네거의 생명의 빛이 꺼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죽을 수 없다고 다짐한 것이 무색하게도, 그는 죽어 가고 있었다.

손과 발의 신경이 천천히 죽어 간다. 장기의 움직임이 천천히 죽어 간다. 호흡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느려진다.

이대로는, 정말 이대로는……!

르네거의 절박함이 목 끝까지 차오른, 바로 그때였다.

우웅.

낮은 진동이 대기를 동요시켰다.

그와 동시에, 피에라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녀의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르네거는 떠지지 않는 눈을 간신히 떠 주변을 둘러보았다.

놀랍게도, 모든 것이 그대로 멈춰 있었다.

피에라는 그대로 굳어 있고, 빛을 내던 성물들도 그대로 멈춰 있다. 물수건에서 뚝뚝 흐르던 물방울도 허공에 떠 있는 그대로 멈춰 있었다.

르네거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열려 있는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오랜만이구나, 인간 아이야.”

레피오스.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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