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오랜만이구나, 인간 아이야.”
레피오스는 르네거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가 다가옴과 동시에, 르네거의 몸을 잠식하고 있던 통증들이 차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펄펄 끓었던 열은 내려갔고, 마치 결박된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던 손과 다리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흐려져 가던 정신도 돌아왔고, 시야에 힘이 생겼다.
르네거는 레피오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죽을 뻔했구나. 미안하구나. 친우의 죽음을 애도하느라 미처 너를 생각지 못했단다.”
친우, 라 하면 히론을 말하는 것일 테다.
르네거는 쓰디쓴 입안을 느끼며 침묵했다.
“히론이 내게 부탁하고 간 것이 있었지.”
레피오스는 르네거의 옆에 바로 서며 말했다.
“너를 아포칼리타로 만들어 달라고.”
르네거의 눈이 사붓 흔들렸다.
기실, 이제는 가능성이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한 대화를 나누었던 것은 히론밖에 없었으므로, 그가 죽은 이상 자신은 영원히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다. 눈앞의 레피오스는 제게 히론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히론 님은.”
르네거는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스스로가 죽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레피오스의 입매가 굳었다. 그는 다소 허망해진 눈을 갈무리하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모든 생물들은 자신이 죽을 때를 알기 마련이지. 너조차도 지금 죽으리라 생각하고 있지 않았느냐.”
그가 말을 돌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나, 르네거는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네 몸은 죽어 있다.”
레피오스는 르네거의 이마에 손을 대며 말했다.
“인간의 몸으로 죽음의 강에 두 번이나 다녀왔기 때문이요, 또한 인간의 몸으로 신의 힘을 썼기 때문이다.”
“……신의 힘?”
르네거는 눈을 깜빡였다.
혹시, 자신도 모르게 튕겨져 나왔던 힘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제 의지로 움직이는 게 아니었던 것들.
그의 생각이 맞은 듯, 레피오스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바다신이 너를 꽤 아끼나 보구나.”
그러나 그 웃음은 곧 휘발되었다. 그는 다소 굳은 입매를 내보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는 생명을 관장하지 못하는 터. 너는 죽는다. 아니, 죽어 있다.”
르네거는 가느다란 숨을 내뱉었다.
알고 있다.
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죽음의 강에 다녀왔을 때부터, 그는 저가 죽어 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레피오스의 약 덕분이었고, 제 정신력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늘로 끝이 날 뻔했다. 그는 정말,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으므로.
“아포칼리타가 될 것이냐?”
르네거는 눈을 들어 레피오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묻어 있는 감정은 쉬이 짐작하기 어려웠다. 긍정인가 부정인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르네거는 스스로 선택을 내려야 했다.
“죽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아포칼리타는 기본적으로 불멸이니.”
“그렇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레피오스의 입매가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예상한 바이다.
모든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 레피오스는 모든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는 가볍게 손을 튕겼다. 르네거의 짐 속에서 작은 돌 형태의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용케 챙겨 왔구나.”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의 돌은 자체적으로 발광하며 빛나고 있었다. 레피오스는 눈을 반짝였다.
“안타레스의 마나핵이로구나.”
그는 피식 헛웃음을 뱉었다.
“태양신이 죽어라 싫어하던 놈인데, 네가 가지게 될 줄이야.”
안타레스는 태양신의 아들이 타고 있던 말을 죽여 아들까지 죽게 만들었던 놈이니까.
“태양의 성물이 깨어난다면 기겁을 할 것이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르네거는 침묵했다. 레피오스 역시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는 듯 금세 주제를 바꿨다.
“너는 신을 모시는 아이였지.”
르네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포칼리타가 되는 것에 거부감은 없느냐?”
“없습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대답이다.
“카리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레피오스는 지그시 르네거를 응시했다.
네가 아포칼리타가 되는 것을 카리나는 기꺼워하지 않을 테지만.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게 단 하나뿐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인 터.
이미 죽음을 한 번 경험했던 그로서, 죽음이라는 것이 주는 공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죽는 것만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남겨질 이들의 슬픔도 함께 두려움이 된다.
그렇기에, 이 인간도 기를 쓰고 살려는 것이겠지. 카리나에게 슬픔을 안겨 주고 싶지 않으니.
레피오스는 허무한 웃음을 뱉었다.
“이는 내가 정제한 후 다시 가져오겠다. 그때까지 네 목숨을 붙여 놓을 테니 얌전히 있어야 한다.”
말한 뒤, 레피오스는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
“혹시.”
하지만 르네거가 그를 붙들었다.
“카리나의 계획을 알고 계십니까?”
그는 황급히 르네거를 돌아보았다.
레피오스의 힘을 받아 생명력을 회복한 르네거는 그 어떤 때보다 번뜩이는 눈으로 레피오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리나가 궁극적으로 하려는 일을 알고 계시냐는 말입니다.”
레피오스는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떠올린다. 히론의 마지막 말을.
-[카리나가 죽지 않게 해 다오.]
하지만 이미 결정된 미래였다.
카리나가 죽는 것은, 예견된 미래. 결코 바뀌지 않는 것.
‘……하지만.’
친우의 유언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해 봐야 했다.
레피오스는 르네거를 직시했다.
이 인간이라면 어쩌면…….
희미한 희망이 그의 손아귀를 채웠다. 그는 손끝이 말리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구나.”
* * *
카리나는 침대에 누워 있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만을 제외하면, 마치 죽어 있는 것처럼 미동도 없는 상태이다.
그녀는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느리게 깜빡인다.
왜.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자문해 보았지만, 답은 하나였다.
나 때문이다.
내가 아포칼리타와 싸우려 했기 때문, 내가 아포칼리타의 탑을 빠져나왔기 때문……. 아니, 내가 이곳에 태어났기 때문.
나의 존재가 이유이다.
나의 존재가 이 끔찍한 상황을 만들어 냈다.
나 때문에. 오직 나 때문에.
카리나는 눈을 질끈 내려 감았다. 흘러나오고 있는 숨이 느껴졌다. 숨을 참아 본다. 하지만 살고자 하는 본능에 의해 숨이 억지로 튀어나왔다.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 죽을 수도 없었다.
이대로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 포기할 수도 없었다.
양가적인 감정에서, 카리나는 끊임없는 혼란을 느껴야만 했다.
“……히론.”
그를 불러 본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다.
“히론.”
또다시 불러 본다. 하지만 잡히는 것은 없다.
-[내 딸아이야.]
알고 있었다. 히론이 메두사의 아비라는 걸. 그래서 내게 메두사를 투영해 보았던 것을.
그렇기에 카리나는 때때로 스스로가 대용품이 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너를 사랑했단다.]
아니다. 대용품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히론의 소중한 딸이었다.
카리나는 울컥 치미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다. 희미한 울음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전생의 그녀는 아버지를 잃었다. 가난이라는 불행이 아버지라는 존재를 지우게 만들었다.
이생의 그녀는, 자신을 태어나게 해 준 아버지를 죽였다. 그리고 마음으로 나를 낳아 준 아버지도 잃어버렸다.
“히론.”
다시 불러 보지만, 돌아오는 건 여전히 없다. 그녀의 감긴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네게는 이 세계를 구할 의무가 없단다.]
-[네 삶을 살아라.]
이제 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이미 끝에 다다른 이상, 내가 후퇴할 수 있기는 한 것이냐고.
카리나는 감았던 눈을 올려 떴다. 눕혔던 몸을 일으킨다. 손으로 눈가를 박박 닦으며 허리를 세운다.
히론의 유언을, 자신을 들어줄 수 없었다.
이제 와 아포칼리타와 싸우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러면서도 싸워야만 했다.
여기서 물러섰다간 자신뿐 아니라 모두가 죽게 될 것이었으므로.
선택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그 끝에 다다르면, 자신도 그들의 곁으로 갈 수 있으리라.
그곳에 가면 히론을 만날 수 있게 될까. 히론이 자신을 기다려 주면 좋으련만.
카리나는 제 몸을 감싸 안았다. 돋아 있는 비늘을 매만지며, 그녀는 히론의 흔적을 더듬었다.
이때였다.
끼익, 소리가 나며 문이 천천히 열렸다.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카리나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가온 것은 르네거였다.
카리나는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이 세계에 와, 가장 많이 변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르네거였다.
그는 죽었어야 할 인물이었으니까. 이렇게 끝까지, 살아남을 수 없는 인물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살릴 것이다. 르네거를 어떻게든 살려, 살게 할 것이다.
카리나는 얼굴에 드리웠던 슬픔을 애써 지우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괜찮냐고 물어보지도 못했네.”
그녀는 르네거의 뺨에 손을 대며 말했다.
“아파 보이는구나.”
말대로, 르네거는 수척했다.
눈 밑에 짙게 진 그늘이 그가 겪은 고통을 보다 잘 드러내 주고 있었다.
카리나는 마음이 미어지는 것을 느끼며 사붓 눈살을 좁혔다.
“내가 치료를 해 줄…….”
“카리나.”
르네거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카리나, 카리나, 카리나. 이름을 거듭 부르며 그녀를 제 품 안에 넣는다.
머리를 만지고 등을 쓰다듬으며 몸을 붙든다. 어찌나 세게 껴안았는지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그 어떤 때보다 절박해 보였으므로.
“카리나.”
르네거는 카리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숨을 토해 냈다.
“제가…….”
그는 레피오스와 나눴던 대화를 곱씹어 삼키며 눈을 들어 올렸다.
“제가 당신을 지킬 겁니다.”
르네거의 두 눈에는 감히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