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그래서, 찾지 못했다고?”
피에톤은 제 전령새인 코버의 목을 긁으며 말했다. 코버는 푸드득 날개를 흔들며 눈을 반짝였다.
“어쩔 수 없지.”
쯧, 피에톤은 짧게 혀를 찼다.
그는 자일의 흔적을 찾고 싶어 했다.
부상을 입고 도망을 쳤다고 하니 찾을 수만 있다면 자신들의 전력을 이용해 그를 무찌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포칼리타는 그렇게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자일 아포칼리타는 흔적도 없이 도망쳤고, 결과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졌다.
‘……아니.’
설사 찾았다고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었을까?
우리의 전력을 다한다 한들, 그를 쓰러뜨릴 수 있다는 확신이 과연 있는가?
피에톤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들은 괴물이다.
우리 같은 인간들이, 감히 덤빌 수 없어.
‘그렇다면…….’
카리나는?
피에톤은 고개를 비스듬하게 들어 탑을 올려다보았다.
카리나는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하다. 그러나 그녀 역시도 그들이었다. 다름이 없는 아포칼리타.
그렇기에 피에톤은 궁금했다. 카리나 아포칼리타는, 대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후우.”
피에톤은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제 어깨에 앉아 있는 코버를 쓰다듬어 주며 발을 재촉한다.
이때였다.
“태양신의 아이로구나.”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에톤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늙은이 같기도, 혹은 젊은이 같기도 했다. 얼굴을 보고 있자면 혼이 빠지는 것처럼 멍해졌다.
피에톤은 고개를 저으며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누구십니까?”
레피오스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무어라 말을 해 주어야 할까, 본디 태양신이었던 신의 아들이라 말을 해 주어야 할까. 레피오스는 사붓 인상을 찡그렸다.
“……네 삼촌?”
“예?”
“아니다.”
레피오스는 빠르게 말을 갈무리했다. 인간에게 많은 것을 털어놓을 수는 없다는 판단을 내린 까닭이다.
“이 새는 태양신의 전령이겠군.”
그는 땅을 짚고 있던 지팡이의 끝으로 피에톤의 어깨를 가리켰다.
그러자 피에톤의 어깨에 앉아 있던 코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공포에 질린 듯한 모습.
코버는 날개를 활짝 펴 황급히 하늘 높이 비상했다.
“코버!”
피에톤은 그를 불러 보았지만, 코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아가 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피에톤은 눈을 날카로이 뜨며 레피오스를 돌아보았다.
“겁먹지 말거라, 아이야. 나는 너를 해하러 온 것이 아니란다.”
레피오스는 빙그레 웃으며 지팡이를 살짝 흔들었다.
지팡이의 끝에서 흘러나온 불그스름한 빛이 피에톤의 살에 닿았다.
그 즉시 모래바람에 긁혀 있던 살이 완전히 깨끗해졌다.
피에톤은 놀란 눈으로 제 팔을 내려보다, 다시 레피오스를 응시했다.
“당신은 치료사이십니까?”
레피오스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어 주었다.
하아.
피에톤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르네거는 괜찮습니까?”
“물론.”
답하던 레피오스는, 돌연 눈을 찡그리며 의미 모를 말을 했다.
“괜찮다는 기준이 네게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글쎄.”
그가 아포칼리타가 되기를 선택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으니, 레피오스는 말을 돌리는 것을 선택했다.
“자일을 찾고 있었구나.”
“어떻게 아셨…… 아니, 됐습니다. 네. 찾고 있었습니다.”
“찾는다면, 어찌할 생각이었느냐?”
피에톤은 레피오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침묵에서 오는 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레피오스는 피식 실소했다.
“아이야, 너는 탑을 배신하고 나가지 않았더냐.”
“…….”
“한데 이제 와 아포칼리타에게 달려들려 하다니,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
피에톤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과거, 탑에서 도망쳤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피에톤은 아포칼리타와 다시는 싸우지 않을 것이라 결심했다.
그러나 지금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이 먼저 아포칼리타를 찾고자 하지 않는가.
이러한 변화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카리나 아포칼리타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카리나 때문. 아니, 그녀 덕분이다.
“도움을 받았고, 그것을 갚고 싶습니다. 이게 제 이유입니다.”
피에톤은 자신도 모르게 쥐고 있던 주먹을 천천히 펴냈다. 어찌나 세게 쥐고 있었던지 자국이 나 손바닥이 욱신거렸다.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레피오스는, 다시금 지팡이를 휘둘렀다. 붉은빛이 피에톤의 손을 감쌌다. 통증이 사라졌다.
“너는 과거에 만용을 부려 죽게 되었지.”
과거? 피에톤은 눈을 가늘게 떴다.
“감히 태양을 탐하다 고삐를 놓쳐 버렸단다.”
“그게 무슨…….”
“이번에는, 부디 조심하거라.”
자신은 눈앞의 이 남자를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이 남자는 자신을 아는 것처럼 말을 한다.
알 수가 없었다. 이유가 궁금했다. 피에톤의 입이 반쯤 열릴 때였다.
“그…….”
“피에톤!”
쿵!
그들 사이로 묵직한 무언가가 떨어졌다. 살펴보니 커다란 돌덩이였다.
레피오스와 피에톤은 동시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자신들에게 날아오고 있는 샐러딘의 모습이 보였다.
촤악!
샐러딘은 레피오스와 피에톤 사이에 끼어들었다. 가파른 숨을 뱉으며 레피오스를 노려본다.
“뭐야. 왜 당신이 여기 있어?……요?”
샐러딘은 황급히 피에톤의 팔을 낚아챘다. 그를 뒤로 물러서게 한다.
“얘한테 무슨 짓 한 거 아니야?……요?”
그런 샐러딘을 내려다보던 레피오스는,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네놈도 많이 변했구나.”
그러며 샐러딘의 정수리에 손을 올리고 머리칼을 흩뜨린다. 샐러딘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아, 머리 만지지 말라고!……요. 무슨 일이에요? 왜 왔어?”
레피오스는 경계하는 샐러딘의 뺨을 툭 치며 턱을 들어 올렸다.
숨을 크게 들이킨다. 마탑의 텁텁한 공기가 그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이제 돌아갈 생각이란다.”
그의 음성에는 때아닌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가물가물한 외로움이 담겨 있는 목소리.
-[반드시.]
어쩌면 친우를 그리워하는 음성일 수도 있었고, 또 어쩌면 짧은 여생을 더듬어 보는 음성일 수도 있었다.
-[끝을 내야 한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말이다.”
* * *
“르네거.”
카리나는 저를 끌어안고 있는 르네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르네거의 고개가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한껏 날카로워져 있던 눈빛이 차차 가라앉는다.
두 눈동자에 오롯이 카리나를 담는 순간, 르네거는 부드러이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거니?”
무의식중에 질문을 한 카리나는, 이내 허탈하게 웃으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니, 무슨 일이 참 많지.”
그녀는 떨리는 손을 갈무리하며 르네거의 가슴에 이마를 대었다. 다시금 제 등을 감싸 안는 르네거의 손이 느껴졌다.
“나는 괜찮아. 정말이야. 히론도…… 괜찮아. 어차피 전쟁을 한 이상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있었고.”
“카리나.”
르네거는 그런 카리나의 턱을 부드럽게 잡아 올렸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카리나는 눈을 길게 감았다가 천천히 들어 올렸다.
르네거는 항상 이런 식이다.
언제든 내 곁에 있으며, 또한 언제든 나의 편을 들어 준다.
나를 지키겠다고 말을 하며 그 말을 또한 지키고, 나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든다.
이것이 때때로 답답하게 느껴졌다. 족쇄와도 같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거부는 내 안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이 발현됐기 때문이 아닐까. 도움을 받는 것이 익숙하지 않으므로,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래서…….
카리나는 다시금 르네거의 품 안으로 고개를 묻었다.
아니, 이래서는 안 된다.
나는 르네거를 지켜야 했다. 그의 목숨을 책임져 주어야 했다. 그에게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되었다.
이게 바로 나의 사랑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
“카리나.”
르네거는 그런 카리나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당신에게 힘이 되고 싶습니다.”
속삭이는 음성은 지극히도 작았으나, 그 안에 담긴 뜻은 커다랬다.
“저의 성력을, 당신에게 바치겠습니다.”
카리나는 르네거의 가슴을 밀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흔들리는 눈이 명료하다. 혼란이 가득한 것이 보였다.
“너는 모든 힘을 잃게 될 거야.”
“당신의 힘에 보탬이 될 수만 있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카리나.”
르네거는 카리나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조금씩 다가오는 그의 숨은 지극히도 뜨거웠으며, 동시에 아찔할 만큼 자극적이었다.
그는 카리나의 허리를 낚아채듯 휘어 감았다. 붕 뜬 몸이 천천히 뒤로 밀려났다.
털썩, 침대에 몸을 눕힌 카리나는 멍하니 르네거를 올려다보았다.
“저는 더 이상, 못 참겠습니다.”
카리나의 다리 사이로 몸을 세운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카리나의 이마, 눈, 코, 입, 목덜미, 쇄골, 모든 곳을 더듬으며 내려가던 르네거는 그녀의 위로 스러지듯 몸을 맡겼다.
“당신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입술이 포개졌다. 벌려진 입술 너머, 르네거의 뜨거운 힘이 천천히 넘어왔다.
10장 삶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