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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128화 (128/135)

128화

벌려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밀려왔다. 동시에 부드러운 기운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르네거의 힘이 넘어오고 있었다.

카리나의 위에 올라타 있는 르네거는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뒷목을 그러당겼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카리나는 가만히 스러져 있었다.

이렇게 돼도 괜찮은 것일까.

자문해 본다.

르네거의 힘을 내가 받아도, 정말 괜찮은 것일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르네거에게 있어서 성력은 그의 정체성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신의 아들로 태어났고, 신자가 되었으며 그 힘을 이용해 살아왔으니.

자신 때문에 그가 무언가를 버린다는 건.

“르네거.”

카리나는 르네거의 가슴을 지그시 밀며 눈을 들어 올렸다.

“네 힘이 없어도, 나는 자일을 이길 수 있어.”

그러니까 그만해도 괜찮다고.

카리나는 그리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르네거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침음을 흘렸다.

그는 몸에 남아 있는 성력을 카리나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그래야만 아포칼리타가 될 수 있으므로.

하지만 이를 말할 수는 없었다. 만약 카리나가 안다면 화를 낼 게 분명했으니까.

그러니.

이번 한 번만,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겠다고.

르네거는 카리나의 뺨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저는.”

조심스러운 입맞춤은 카리나의 목덜미를 따라 쇄골까지 내려왔다.

벌려진 셔츠의 단추를 이로 물어 툭, 툭, 풀어낸다.

“당신과 함께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는 카리나를 지그시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제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습니다.”

카리나의 눈이 흔들렸다. 확장된 동공은 또렷했으며, 그렇기에 그 안에 담긴 뜻이 더 명확히 보였다.

왜.

너는 왜 이러니.

그리 묻는 것 같았다.

르네거는 생각했다. 나는 왜 성력을 넘겨주며 아포칼리타가 되려 하는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사랑하니까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카리나의 동요하던 눈이 사붓 가라앉았다. 그러곤 슬쩍 시선을 피한다. 르네거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나 하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카리나는 항상 이렇게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이 사실이 기쁘기도 하면서도, 못내 안타까웠다.

그녀가 사랑에 익숙하지 않다는 증거와 다름없었으므로.

르네거는 카리나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당신은요?”

카리나의 내려갔던 시선이 다시 올라왔다. 확장되고, 좁혀지는 동공 속. 그녀의 감정을 쉬이 추측할 수 있었다.

“……나는.”

하지만 그 뒤의 말은 잇지 못한다. 예상한 일이다. 르네거는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뺨에 제 뺨을 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카리나의 뒷머리를 그러안는다. 일전보다 조금 더 절박해진 손길이다. 그의 몸은 조금 더 뜨거워져 있었다.

“카리나.”

르네거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사랑합니다.”

카리나는 그의 등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그가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쿵쾅거리는 맥박이 느껴졌다.

카리나는 천천히 눈을 내려 감았다. 포개지는 입술이 느껴졌고, 파고드는 그가 느껴졌다.

그녀는 다소 격해진 숨을 가파르게 뱉으며 르네거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못내 하지 못한 말을 더듬어 본다.

사실은 나도,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언젠가는 말해 주겠다고.

그녀는 르네거를 받아들였다.

* * *

이른 아침, 페넬로피는 마탑의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카리나에게 당했던 상처는 씻은 듯 나은 지 오래다. 그런 상처는 페넬로피에게 고통을 줄 수 없었다.

더불어 더한 고통은 카리나가 지고 있을 게 분명하므로…….

‘하아.’

페넬로피는 걸음을 늦추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자신이 아포칼리타를 동정하게 될 줄은 몰랐다. 또한 그녀를 안타까워하게 될 줄도 몰랐다.

페넬로피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과거에는, 궁금했다. 카리나가 왜 인간들을 돕는 것인지.

-카리나가 그러고 싶어 하니까 그러는 것뿐이야.

-너희 인간들도 신이 시켜 아포칼리타와 싸우던 거 아니냐?

-똑같은 거야, 똑같은 거. 너희 같은 인간이나 우리나 똑같다는 거지.

하지만 이런 말을 듣고 나니, 이유가 대관절 무슨 상관일까 싶었다.

그들은 우리와 같다.

우리와 같은 목표로, 아포칼리타의 멸망을 바란다.

이것만으로도 된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 뱀이 죽을 줄이야.’

카리나와 퍽 가까운 사이의 뱀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죽은 게 마음에 걸렸다. 그뿐 아니라.

‘만약 카리나가 더 이상 싸움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이기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이 두려웠다. 카리나가 인간들을 버릴까 겁이 났다.

과거에는 카리나가 왜 인간들을 돕는 것인지 궁금했다면,

지금의 페넬로피는 카리나가 인간들을 버리지 않기를 바랐다.

배반적인 생각이었으나 이는 당연했다. 그녀는 데이펜의 수장. 자신의 신자들을 보호해야 했으므로.

‘카리나를…….’

만나야 할 텐데.

지금 그녀와 마주쳐도 되나 싶은 의문도 함께 들었다.

어느새 카리나의 방이 있는 층에 올라온 페넬로피는 복도를 서성였다.

“뭐야, 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넬로피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왜 여기서 알짱거리고 있어?”

샐러딘. 개와 섞인 아포칼리타.

페넬로피는 긴장을 유지하며 그와 거리를 벌렸다.

“카리나를 만나러 왔어.”

“왜?”

“……할 말이 있어서.”

샐러딘은 의뭉스러운 기색을 지우지 않은 채 페넬로피를 노려보았다.

그는 페넬로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나 카리나를 방해하던 이가 아닌가.

“또 헛소리를 하러 왔다면.”

“…….”

“넌 내 손에 죽어.”

살기 어린 시선이 페넬로피를 스치고 지나갔다.

페넬로피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두 손을 맞잡으며 한숨을 내뱉는다.

“반지에 대해 말해 줄 게 있어서 온 거야.”

그녀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위험한 거 아니야.”

“그건 봐야 아는 거고.”

샐러딘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네가 끌고 다니던 놈들은 어디다 버리고 왔냐?”

아힌과 케셰트를 말하는 것일 테다.

아힌은 여전히 데이펜의 장로로서 활동하고 있으나 전과는 달라졌다. 몸을 사리거나 뒤로 빠지는 경우가 잦아졌다.

아마도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페넬로피도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팔이 잘린 케셰트는 그날로 라템에 처박혀 나오지 않았다. 듣기로는 신전 바깥으로 한 걸음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 역시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 이겠지. 더불어 압도적인 힘을 맞닥뜨렸기 때문일 테고.

하아.

페넬로피는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이런 구구절절한 사연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샐러딘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나도 몰라. 만나지 않으니까.”

“퍽이나 그러겠네.”

샐러딘이 잔뜩 빈정거리던 그때였다.

카리나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열린 문 너머로 새하얀 손이 내밀어졌다. 샐러딘은 곧장 그녀에게로 뛰어갔다.

“누나!”

카리나는 잠시 눈을 크게 뜨다, 이내 희미하게 웃으며 샐러딘을 바라 보았다.

“잘 잤어? 아픈 데는 없…….”

샐러딘은 부자연스럽게 말을 끊었다.

보았기 때문이다.

카리나의 목덜미에 놓여 있는 붉은 자국들을. 그리고 그녀의 뒤편, 엉망이 되어 있는 침대를.

“설마. 르네거 새끼와 같이 있었어?”

그의 시선을 느낀 카리나는 셔츠의 단추를 잠그며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은 아니야.”

“지그음은? 그럼 전에는 같이 있었다고?”

샐러딘은 입을 쩍 벌리며 헛숨을 내뱉었다.

“이, 이……! 이익!”

카리나의 반응을 보아서, 제가 짐작하고 있는 일이 맞을 테다.

“아악! 짜증 나!”

그는 제 머리를 꿰뜯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무리 그들이 연인 사이라고는 하나, 이건 너무하지 않나. 아니, 뭐가 너무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한 대만 때리고 올게. 딱 한 대만!”

카리나가 말릴 새도 없이, 샐러딘은 곧장 뛰쳐나갔다. 쿵쿵 내딛는 발걸음에는 힘이 가득했다.

정말 싸움이라도 날 것 같은데.

카리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짧게 조소했다.

그런 그녀의 앞에, 페넬로피가 다가왔다.

페넬로피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카리나를 올려다보았다. 자줏빛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

그녀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야 많았다.

지금의 카리나는 질서를 어지럽힌 아포칼리타이자 자신의 첫사랑을 빼앗아 간 악인이었으니까.

그러나 동시에 구세주이기도 했다.

페넬로피는 입술을 말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페넬…….”

“그 반지.”

그녀는 카리나의 말허리를 끊으며 말했다.

“내가 봉인해 둔 거야.”

페넬로피는 천천히 카리나의 손을 붙잡았다. 카리나는 묵묵히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페넬로피는 카리나의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에 천천히 힘을 주입했다. 붉은빛의 힘이 카리나의 손을 휘감았다.

움찔, 카리나는 손을 달싹였으나 곧이어 찾아오는 따뜻한 감촉에 힘을 뺐다.

페넬로피는 피식 웃으며 펼쳤던 힘을 갈무리했다.

“반지가 말을 걸 거야. ……자기가 하고 싶을 때이겠지만.”

그러곤 그녀는 곧장 뒤를 돌았다.

다시금 복도를 걸어가려는 페넬로피를 보며, 카리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더 할 말은 없니?”

우뚝.

페넬로피의 발이 멈췄다. 그녀는 느리게,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카리나를 응시한다.

“사실 난 네가 미워.”

“…….”

“정말 미워서. 한 대만 때려 주고 싶어.”

실상, 카리나가 없었더라면 자신이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리지 않았을 터였다.

“그렇지만…….”

하지만 카리나가 없었더라면 더 많은 사상자가 나왔을 게 분명했다. 르네거까지도.

후우.

페넬로피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고마워.”

그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모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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