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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129화 (129/135)

129화

“고마워. 모두 다.”

작은 속삭임이었지만, 카리나는 오롯이 들을 수 있었다.

마음이 이상했다. 좋냐고 하면 좋다고 할 수 없고, 나쁘냐고 하면 나쁘다고 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들이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

페넬로피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불행한 삶을 사나 종래에는 행복을 쟁취하게 되는, 주인공.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모든 사건에서 페넬로피는 제외되었고, 오롯이 그녀 자신만의 불행을 감당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이 페넬로피의 운명을 망친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마음이 이상했다. 자신은 고맙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으므로.

“페넬로피.”

카리나는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네가 내게 고마워할 일은 아니야.”

페넬로피의 두 눈이 커졌다. 그러다 피식, 하며 바람 빠진 소리를 뱉는다.

“그건 맞지. 미운 일이 더 많긴 하니까.”

그녀는 으쓱 어깨를 올렸다.

“하지만 어쨌든, 네 덕분에 사람들이 다치지 않을 수 있게 된 거잖아. ……과거에는 아니었지만.”

카리나는 페넬로피의 덧붙인 말을 무시했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돌리려 할 때, 페넬로피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너의 친구가 죽은 건 안타깝게 생각해.”

우뚝.

카리나의 몸이 그대로 멈췄다. 페넬로피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

“우리를 버리지 말아 줬으면 해.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네가 지금 우리를 버린다면…… 우리는.”

그녀는 말을 마치지 않았다. 하지만 뒷말을 짐작할 순 있었다. 우리는, 죽게 될 거라고.

카리나는 굳혔던 얼굴을 다소 풀어 냈다. 희미하게 웃으며 시선을 떨어뜨린다.

“내가 무엇을 할 줄 알고 이러는 거니?”

“뭘 할 건데?”

“글쎄.”

그녀는 벽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나른하게 들어 올린 눈동자 안, 페넬로피가 오롯이 담겨 있다.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일 수도 있어.”

“사람들이 죽어?”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페넬로피는 숨을 토해 내며 손을 저었다.

“그럼 됐어.”

페넬로피는 카리나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이렇게 노곤한 분위기로 카리나와 대화한다는 게 조금 어색했기 때문이다.

죽일 듯 달려들던 게 어제 같은데.

‘그렇게 달려들었던 건 나지만.’

페넬로피는 재차 헛웃음을 뱉었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입을 연다.

“내 운명은 아포칼리타를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아니야. 내 삶의 목적은 사람들을 지키는 거야. 그러니까.”

“…….”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리나는 낮게 조소했다.

내가 할 일이 뭐일 줄 알고.

만약 네가 안다면 당장 그만두라 할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카리나는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계획은 아무도 몰라야만 했다. 그 누구도.

“이만 가 볼게.”

“성전으로 돌아가려는 거니?”

“응. 오래 비울 순 없으니까.”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페넬로피는 그런 카리나를 아주 잠깐 응시하다, 이내 고개를 돌리고 앞서 걸어갔다.

그렇게 자리를 떠나려던, 그때였다.

“누나!”

샐러딘의 외침이 들려왔다. 저 먼 복도에서부터 우다다 뛰어오는 샐러딘은,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기에.

카리나는 조여드는 심장을 느끼며 샐러딘을 바라보았다.

“르네거가 이상해!”

* * *

“후우…….”

르네거는 숨을 몰아쉬며 눈을 질끈 내려 감았다.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숨을 들이마셔도 가슴이 부풀지 않았고, 내쉬어도 조여들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에 입안이 썼다.

“쿨럭…….”

왈칵, 검은 피가 쏟아졌다. 르네거는 침대에 얼굴을 묻은 채 요를 바르쥐었다.

손등을 따라 팔뚝까지 퍼런 핏줄이 솟아올랐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레피오스가 준 약을 진즉 먹었지만, 과거와는 달리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차차 정신이 흐려졌다.

이 감각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죽어 가고 있다.’

르네거는 으득 이를 깨물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그는 희미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또 붙잡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성력을 잃은 모양이로구나.”

레피오스의 음성이었다. 그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만큼의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르네거는 입 안쪽 살을 깨물며 눈을 질끈 내려 감았다.

“죽어 가는 네 몸을 그나마 지켜 주던 것이 성력이었으니, 이렇게 아플 수밖에. 당연한 일이다.”

레피오스는 다가와 르네거의 등에 손을 얹었다.

하아, 르네거는 숨을 토하며 몸에 힘을 풀었다.

“네 결심에는 변함이 없는 모양이구나.”

르네거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피오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얹혔다.

“그렇다면 지금…….”

“르네거!”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카리나였다.

그녀는 널브러져 있는 르네거와 그의 곁에 있는 레피오스를 바라보았다.

방 안 가득한 피 냄새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 카리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르네거가 죽어 가고 있음을.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레피오스를 바라보았다.

“묻지 않아도 알고 있지 않느냐.”

카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손끝을 말아쥐었다.

“르네거가 죽는다는…… 말인가요?”

레피오스는 대답 대신 쓰러져 있는 르네거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조차 뜨지 못하고 있었다. 고통에 겨워 경련하고 있는 게 보였다.

“왜?”

카리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왜, 르네거가…… 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와락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를 꽉 물며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버텼다.

“인간의 몸으로 죽음의 강에 다녀 왔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너 또한 알고 있었을 터.”

“하지만 르네거는.”

“신의 아들이라 하여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또한 자일과의 싸움에서 너무 많은 죽음의 힘을 맞닥뜨렸어.”

아.

카리나는 황망한 시선으로 레피오스를 바라보았다.

또, 나 때문인가.

나 때문에, 르네거가 죽는 것인가.

내 잘못된 선택으로…….

“르네거가 죽는다고?”

뒤이어 들어온 샐러딘의 말이다. 샐러딘은 경악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며 성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법이 있지? 요?”

그는 레피오스와 마주 서며 말했다.

“방법이 있으니까 찾아온 거잖아!”

사색이 된 샐러딘을 바라보며, 레피오스는 조그맣게 웃었다.

고작 인간 하나의 목숨에, 몇몇의 아포칼리타가 달려드는 것인지.

과거였다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 하지만 그보다 더 먼 과거였다면 당연했을 일.

레피오스는 그들의 피에 담겨 있는 친우들의 흔적을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히론이 부탁하고 간 것이지.”

히론, 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카리나의 고개가 번뜩 들렸다.

“르네거를 아포칼리타로 만들 생각이란다.”

“레피오스 님!”

카리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소리쳤다.

“그건. 그건 말도 안 돼요. 아니, 애초에 그럴 일은…….”

“그럼 르네거를 죽게 둘 생각이냐?”

카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르네거가 온전하게 인간이기를 바랐다. 인간으로 살고 인간으로 죽기를 바랐다. 자신과는 달리.

그렇기에 르네거를 아포칼리타로 만든다는 건,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르네거는 죽는다. 죽어 버린다.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다.

이 잔인한 선택 앞에서, 카리나는 어찌할 방도 없이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이 역시도…….”

그녀는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견된 미래였나요?”

“그래.”

“그렇다면 왜 제게 말해 주지 않았죠?”

“…….”

“알고 있었다면 제가 다른 선택을 했을 수도 있는데.”

“아니.”

레피오스는 단호히 대꾸했다.

“결과는 변하지 않았을 거란다.”

카리나는 팔로 제 몸을 감쌌다.

어젯밤까지만 하더라도, 르네거는 그녀를 소중하게 안아 주었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귀하게 자신을 대해 주었다. 제 귀에 거듭 속삭이던 사랑한다는 그 말을, 카리나는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아주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레피오스 님의 말대로 한다면, 르네거는 살 수 있는 건가요?”

레피오스는 빙그레 웃었다. 반대로 카리나의 얼굴은 와르르 무너졌다.

“그럼…….”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는.”

두 주먹을 움켜쥐며, 들끓은 숨을 천천히 토해 낸다.

“저는 보지 못해요.”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방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고.

샐러딘은 카리나가 나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후우, 한숨을 토하며 이마를 짚었다.

“야. 뒈졌냐?”

그는 쓰러져 있는 르네거를 발로 툭 건들었다.

“넌 이렇게 뒈질 놈 아닌 거 알고 있다.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

르네거는 신음만 흘릴 뿐, 몸을 가누지 못했다. 샐러딘은 더 이상 못 보겠다는 듯 고개를 휙 돌렸다.

“뭐, 이놈이 우리 쪽이 되면 좋은 거 아니야?……요? 더 강해질 수 있을 테니까.”

레피오스는 그런 샐러딘에게 답해 주지 않은 채, 덜덜 떨며 서 있는 페넬로피를 향해 말문을 틔웠다.

“인간 아이야, 네 생각은 어떠하느냐?”

“…….”

페넬로피는 그런 레피오스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눈을 내려 르네거를 바라본다.

신을 배신한 것으로도 모자라, 신의 아들임을 포기하고 아포칼리타가 되겠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이젠.’

페넬로피는 두 손을 꽉 붙잡았다.

“죽는 것보다는 낫겠죠.”

레피오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탁, 그는 손가락을 부딪쳐 튕겨 냈다. 그 즉시 그의 품에 있던 안타레스의 마나석이 둥둥 떠올랐다.

“이미 정해진 일이었단다.”

허공에 떠 있는 마나석은 천천히 르네거에게로 다가갔다.

우웅, 진동이 퍼졌다. 기이익, 괴이한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방문을 등지고 서 있던 카리나 역시도, 그러한 소리와 진동을 들을 수 있었다.

카리나는 눈을 질끈 내려 감았다.

모든 게, 나 때문인 것만 같았다.

아니.

모든 게 다 내 탓이다.

카리나는 문을 타고 주르륵 내려앉았다. 후회로 점철된 숨이 그녀의 얼굴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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