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르네거를 다시 재웠던 카리나는, 곧장 방 바깥으로 나왔다.
르네거가 무사한 것을 알게 된 이상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레피오스.’
그를 만나야 했다. 만나서 물을 것이 있었다. 답을 들어야 할 것이 있었다.
그녀는 걸음을 재촉했다.
복도에는 신의 형상을 조각한 조각상들이 가득 채워져 있다.
과거에는 이를 봐도 아무렇지 않았으나, 지금은 아니다.
속이 메스꺼울 정도였다.
답답한 기분.
카리나는 눈을 사붓 찡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다 부숴 줄까?”
아.
카리나는 깜짝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옆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다가온 샐러딘이 그녀의 옆에서 환히 웃고 있었다.
“언제 왔니?”
“아까 누나가 르네거 방에서 나왔을 때부터.”
“그런데 왜 말을 안 했어?”
“누나가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서.”
샐러딘은 어깨를 으쓱 올렸다. 어느새 입에 붙어 버린 ‘누나’라는 말을 다시 읊조려 보며 싱긋 웃는다.
“그래서, 말해 봐. 다 부숴 줄까?”
샐러딘은 복도에 가득한 조각상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카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쓸모없는 짓을 왜 하니. 됐어.”
“하지만 보기 싫잖아. 싫은 건 없애야지.”
무해한 웃음을 짓고 있는 그를 보며, 카리나는 허탈한 실소를 뱉었다.
벽에 어깨를 기대며 팔짱을 낀다. 저 멀리까지 뻗어 있는 조각상들을 응시한다.
“가끔 나는 생각해.”
“무슨 생각?”
“내가 신을 싫어하는 게 아포칼리타이기 때문일까, 아닐까, 하고.”
“어려운 질문이네.”
샐러딘은 미간을 좁히며 침음을 흘렸다. 그 역시도 고민하고 있는 듯했다.
“아포칼리타이기 때문은 아닐걸. 난 사실 별다른 생각이 없거든. 그저…….”
그는 카리나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싱긋 웃었다.
“보이지도 않는 신을 맹신하는 인간들이 멍청하다고만 생각 중이야.”
“그래. 그것도 맞는 말이네.”
피식.
카리나도 그와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며 다시 시선을 던진다.
하나하나 표정이 다른 조각상들을, 하나하나 옷자락도 같지 않은 조각상들을.
그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인간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아껴본 적이 있던가.
언제나 나는 한 발을 빼고 살지 않았던가.
아무리 그들을 아낀다 할지라도…….
카리나는 미간을 좁혔다.
맹목적인 사랑.
이를 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 오직 신을 빼고.
신을 믿는다는 건, 맹목적인 사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렇기에 맹목적인 믿음을 바치는 것이고.
결론이 나지 않는 생각이 줄지어 이어졌다. 그런 생각의 흐름을 깨뜨린 건 샐러딘의 말이었다.
“누나.”
그는 카리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괜찮아?”
깜빡, 깜빡.
카리나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샐러딘은 말을 덧붙였다.
“그냥, 많은 일이 있었잖아. 그러니까 모두 다…… 괜찮냐는 말이야.”
“괜찮아.”
카리나는 일갈했다. 동시에 샐러딘의 입매가 미세하게 굳어 들어갔다.
“있잖아.”
그는 카리나의 앞으로 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르네거가 그랬어.”
“…….”
“언제나 괜찮을 수는 없다고. 괜찮지 않을 때가 분명히 있는데, 누나는 항상 괜찮다고만 말한다고.”
카리나의 눈매가 미세하게 떨렸다.
르네거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알고 있었으나, 샐러딘에게까지 그녀를 변호해 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내게도 그럴 거야?”
샐러딘은 카리나의 양팔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조금 더, 내게 기대 주면 안 돼?”
그는 어쩐지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울 게 누군데.
카리나는 허무한 숨을 뱉었다.
“우리는 가족이잖아.”
응?
샐러딘은 채근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카리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가족.
이를 인정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었나.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별은 짧을 게 분명했다.
이 찰나의 시간 동안, 샐러딘에게 마음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카리나는 샐러딘의 뺨을 어루만졌다.
“괜찮지 않아. 괜찮지 못해.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겠니.”
“……누나.”
“히론이 죽었고, 르네거가 아포칼리타로 변했고…… 또.”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눈을 들어 올렸다.
“모든 아포칼리타가 사라져 버렸는데.”
“…….”
“우리만 남게 됐어.”
잃어버린 정체성은 쉬이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모든 아포칼리타가 죽은 지금.
그녀는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민도 찰나였다. 어차피, 모든 것이 끝나게 되면…….
‘나는.’
사라질 테니까.
그녀는 얼굴에 드리웠던 착잡함을 빠르게 지웠다. 샐러딘의 머리에 손을 얹고 머리칼을 헝큰다.
“그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지. 르네거도, 다행이고.”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샐러딘은 조심스럽게 주억이며 숨을 들이켰다. 뻐끔거리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가 모여 고개를 들었다.
“레피오스 님께 물어봤었어.”
“무엇을?”
“이 모든 걸 알고 계셨냐고.”
샐러딘은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예견된 일이었대.”
말을 들은 즉시, 카리나는 눈을 질끈 감아 내렸다.
예견, 예견, 예견!
그게 대체 뭐라고. 대체 뭐라고 그렇게 맹신을 하며 희망을 꺾는 것인가.
카리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손을 바르쥐며 숨을 몰아 뱉는다.
“이곳에 있었구나.”
이때, 애타게 찾았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리나는 그를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렇지 않아도 찾으러 가려 했지. 르네거는 어떠냐? 일어난 것이겠지?”
레피오스.
그는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레피오스 님.”
카리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쏟아지듯 나오는 분노의 눈빛이 그를 향한다.
“히론이 죽을 걸, 알고 계셨나요?”
레피오스는 걸음을 멈췄다. 사붓 굳은 입매가 보였으나, 찰나였다.
그는 다시금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카리나는 악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목청을 높였다.
“왜, 말해 주지 않았나요?”
“카리나.”
“알았다면 제가 어떻게든 막아 봤을 텐데! 왜, 왜 말을……. 히론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녀는 숨을 거듭 몰아쉬었다. 목구멍이 턱 막힌 듯 답답했다.
꽉 감아 내린 눈은 어둠만을 보고 있었으나, 저 멀리 히론의 형상이 존재했다.
그녀는 울음을 토하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한마디라도…… 해 줬다면.”
“카리나. 너도.”
레피오스는 그런 카리나의 말허리를 단호하게 잘라 냈다.
“알고 있지 않느냐.”
그는 동요 없는 시선으로 카리나를 내려다보았다.
“미래는 변할 수 없단다.”
그는 뒷짐 진 손을 꽉 붙잡았다.
“히론이 죽지 않았다면, 다른 이가 죽었을 게다.”
“다른 이, 누구요? 르네거? 샐러딘? 아니면, 저?”
그녀는 핏발이 선 두 눈으로 레피오스를 직시했다.
“차라리 제가 죽는 게 나았어요.”
“누나! 그런 말은!”
“아니.”
레피오스는 카리나에게로 한 걸음 다가왔다.
“너는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느냐.”
카리나의 눈이 황망하게 흔들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해야 할 일.
이를 떠올림과 동시에, 목 끝까지 차올랐던 분노가 사라졌다.
타오르는 촛불처럼 솟구쳤던 감정들은 휘발돼 다 타 버린 재가 되었다.
새까만 재. 그 안에 파묻혀 있는 나.
카리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천천히 눈을 올려 떴다.
“그 미래도, 변함이 없는 건가요?”
“그래. 모든 것은…….”
레피오스는 두 손을 깍지 껴 잡았다.
“기록되어 있단다. 시간이라는 백지에 모든 것들이 기록돼 있어. 이는 변하지 않아. 변할 수 없단다.”
그는 시선을 모로 돌렸다.
이리도 잔인한 말을 내뱉게 되었는데, 카리나와 마주하며 말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는…….”
뒷말이 입안에 맴돌았다. 그러니 너는…… 희생되어야만 한다고. 뱉지 못한 말이 혀끝을 더듬는 그때였다.
“아니요.”
카리나의 팔을 잡아끄는 이가 있었다.
르네거.
카리나는 그제야 동요하던 몸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를 올려다본다.
“그런 관념은 미래를 바꾸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만들어 낸 허상입니다.”
르네거는 카리나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며 레피오스를 바라본다. 그에게 꽂힌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제가.”
르네거는 두 주먹을 바르쥐며 말했다.
“제가 바꿀 겁니다.”
“…….”
레피오스는 멍하니 르네거를 응시했다.
허망한 숨이 잇새를 통해 흘러나온다.
저 인간에게 희망을 걸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하는 마음에 그에게 모든 미래를 이야기해 주었다.
하지만 그리고 레피오스는 곧장 후회했다.
미래라는 것은 불변하는 것.
신의 예지라는 것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레피오스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곧이어 찾아올 현실에, 저들이 좌절할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의 착잡한 숨이 흘러나오는, 그때였다.
“카리나 님!”
저 멀리서, 피에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꾸만 고꾸라지는 뜀을 하며 그녀는 크게 외쳤다.
“아포칼리타가!”
모든 이의 시선이 모였다. 그리고 그들은 곧장 창가 쪽으로 뛰어갔다.
황량한 대지.
메마른 바람.
따스하지 않은 햇볕만이 있는 곳.
그곳에는.
“……자일.”
수백의 군단을 몰고 온, 자일이 있었다.